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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츠윌리엄 다아시 Jan 19. 2024

런던

영국 잉글랜드

첫째 날

런던탑 - 버로우 마켓 - 빅 벤 - 웨스트민스터 사원 - 런던 브리지 - 아폴로 빅토리아 극장

 런던에 도착한 것은 19시쯤이었지만, 숙소에 체크인한 것은 23시가 넘어서였다. 저렴한 에어비엔비 숙소를 찾다 보니 Crouch End—에미레이트 스타디움보다도 북쪽에 있다—까지 가게 되었고, 주인 Sian도 내가 이렇게 늦게 올 줄 모르고 공연에 갔다가 늦게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1시간 가까이 어두컴컴하고 을씨년스러운 Parkland Walk 구석에서 나름의 사주 경계를 하며 기다렸었다. 그렇게 자정이 넘어서 잤음에도, 동행분들이랑 9시 30분까지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 했다. 8시도 되기 전에 일어나서 대충 아침도 먹고 바로 나왔다. 런던탑까지 가는 데에는 40분이 걸렸다. 아침 런던의 지하철은 역시나 복잡했다. 그래도 마음에 들었던 점 하나는, 진행 방향에 종점 이름뿐만 아니라 어느 방위로 가는지도 나와있어서 좋았다. 나는 평소 목적지들의 위치를 머릿속에 넣을 때 중심을 기준으로 몇 시 방향에 있는지를 기억해 두기 때문에, 런던탑으로 갈 때 헷갈리지 않고 Southbound 열차를 타면 되어서 매우 편했다.

 딱 시간에 맞추어 동행분들을 만났다. 먼저 와있던 분은 20대 후반 남자 직장인이었고, 내가 도착하고 곧이어 온 분도 20대 중반 여자 직장인이었다. 이전까지 동행들은 대부분 학생이었는데, 이번에는 두 명 다 직장인이라 살짝 놀랐다. 런던탑은 에든버러 캐슬과 같이 밋밋한 건물 색채는 비슷했지만, 그보다 훨씬 넓고 전시관도 많았다. 과거에 이 탑을 지키기 위해 사용된 무기들과 전사들이 입었던 갑옷 등 정말 많은 것이 전시되어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Crown Jewels이었다. 매우 큰 다이아몬드와 그 다이아몬드를 아낌없이 박아둔 왕관도 볼 수 있었다. 전시관들을 다 본 뒤에는 성벽 위를 걸으며 런던 시내도 구경했다. 다른 배경들은 별로였지만, 타워 브리지가 보이는 곳은 나쁘지 않았다. 사실 이날 날씨가 흐려서 모든 것이 칙칙하게 보였다. 동행분들을 기다리면서 난간에 기대 쉬고 있었는데, 까마귀가 옆에 도도하게 서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셀카를 찍었더니, 갑자기 까마귀가 내 팔을 물었다. 외투를 뚫고 부리가 느껴졌을 정도로 부리는 날카로웠다. 탐스러운 귀가 아닌 팔을 물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유혈 사태까지 날 뻔도 했다. 거 참 까칠하기는...

Crown Jewels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 어린이들을 이끄는 가이드들은 이런 중세 복장을 하고 다녔다

 이후 잠시 타워 브리지를 거쳐 버로우 마켓으로 갔다. 초코렛과 치즈 등 다양한 음식들을 팔고 있었다. 한 동행분이 이곳에 SNS에서 유명한 해산물 리조또가 있다고 해서 그곳을 찾으려고 했는데, 구조도 너무 복잡하고 말 그대로 시장판이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점심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던 중에, 긴 대기줄이 있는 또 다른 리조또 점포를 발견했다. 여기서 치즈버섯리조또를 한 그릇씩 사서 벽에 기대 서서 먹었다. 치즈가 너무 많아 느끼하긴 했지만, 2파운드를 더 주고 뿌린 트러플 소스가 어느 정도 잡아주어 맛있게 먹었다. 우리 앞을 지나가는 수많은 행인 앞에서 쪼그려 먹는 협소한 공간 속에서도 깨끗이 다 비웠다.

저 안쪽 좁은 곳은 훨씬 더 붐볐다 | 오랜만에 버섯을 마음껏 먹어서 좋았다

 배도 채웠으니,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인 빅 벤을 보러 도시 중앙으로 이동했다. 빅 벤은 이름과 달리 생각보다 크지도 높지도 않았지만, 외벽이 금색이라 우아했다. 그러나 막상 웨스트민스터 교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나와 시계탑을 한 장에 온전히 담기 힘들었다. 빅 벤과 웨스트민스터 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사원에 들어갔다. 규모도 규모지만, 스테인드글라스가 매우 아기자기하고 선명했다. 여러 무덤과 조각상 등을 둘러본 뒤, 남쪽 익랑에서 내가 아는 작가들을 찾아보기도 하였다. 잠시 의자에 앉아 쉬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다 다 모이자 밖으로 나갔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윌리엄 셰익스피어,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찰스 디킨스

 팔리아멘트 스퀘어 가든에 있는 처칠 동상을 지나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 스팟, K2 Telephone Boxes로 갔다. 이곳에서 왼쪽에는 빨간 전화부스, 오른쪽에는 빅 벤이 동시에 보이는 가장 '영국스러운' 인증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10분 정도 줄을 서야 했다—킹스 크로스 역의 9와 4분의 3 승강장보다는 훨씬 짧다. 우리 차례가 오자 번갈아서 한 명이 전화부스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등의 포즈를 취하는 동안, 나머지 두 명은 마구 셔터를 눌렀다. 셋의 사진을 비교해 보니, 아직도 사진 모델이 되는 것을 어색해하는 나의 사진들이 가장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우리는 런던탑에서 각자 보고 싶은 뮤지컬을 예매했었다. 나와 동행 중 1명은 19시 30분 'Wicked'를 예매했다. 그때까지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다시 타워 브리지 근처 난간에 가서 또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하늘이 흐려서 사진들이 다 아쉽게 느껴졌다. 사진을 한참 찍으니 피곤해져서 바로 옆 Five Guys로 갔다. 나는 딸기바나나 밀크셰이크만 1잔 사 먹었다. 밀크셰이크는 정말 맛있었지만, 6파운드나 하는 가격을 볼 때마다 입맛이 떨어졌다.

빨간 전화부스와 빅 벤 | 하늘이 흐려서 다리에 있는 하늘색 구조물들마저 밋밋해 보였다

 'Wicked'를 보기 전, 동행 누나가 공유해 준 블로그로 내용을 예습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오즈의 마법사'의 뒷이야기를 창작한 내용이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뮤지컬을 직접 볼 때는 흐름을 잘 따라가지 못하였다. 첫째로, 영어다 보니 대사 하나하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특히 노래들은 멜로디만 즐길 수 있었다. 둘째로, 이야기 자체에 흥미가 있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리가 거의 맨 뒤라 몰입이 전혀 안 되었다. 결국 2부에 들어서는 졸아버렸다. 노랫소리에 깨어보니 'Defying Gravity'가 들리고, 배우들이 커튼콜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 열렬히 박수를 치길래, 나도 대충 박수를 치는 척하다가 나왔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데에는 1시간 가까이 걸렸다. 뮤지컬을 보며 푹 잤음에도, 그동안 여독이 너무 많이 쌓여 숙소에 도착하니 잠이 몰려왔다. 정말 다행히도 다음날 오전에는 정해진 일정이 없었다. 늦잠 잘 생각에 설레어 침대에서 맥주 병나발을 불다 잠에 들었다.


둘째 날

하이드 파크 - 버킹엄 궁전 - 트라팔가 광장 - 해리포터 스튜디오

 아무 걱정 없이 자다 일어나 보니 9시였다. 느긋하게 아침을 해 먹고—숙소에 있는 빵에다 버터를 발라 먹었다—, 밖으로 나와 버킹엄 궁전에는 11시쯤에 도착했다. 근위병 교대식이 열리기 1시간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매우 늦게 온 편인 나와 철장 사이에는 3명이나 있을 정도였다. 쨍한 햇볕 아래—이날 타워 브리지가 훨씬 더 예뻤을 텐데—사람들과 엉켜 한참을 기다리다, 식은 정오 5분 전부터 시작되었다. 빨간 제복에 브로콜리 모자를 쓴 근위병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행진했다. 그리고 궁전에서는 어디선가 한 번씩은 들어본 듯한 위풍당당한 음악들을 연주했다. 수많은 인파 때문에 근위병들은 호두까기인형 같이 보였다. 오히려 영상을 찍고 있는 앞사람의 휴대전화 화면으로 더 많이 봤던 것 같다. 그 인파 속에 끼어있는 것에 지쳐 30분이 되기도 전에 빠져나왔다. 바로 옆에 있는 세인트 제임시스 공원을 거닐었다. 날이 좋아서 그런지 이곳 또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근위병 교대식을 보기 위해 빅토리아 메모리얼에 몰려 있는 사람들 | 까치발을 너무 오래 들어 종아리가 아팠다

 중간에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주변에 있는 차이나 타운으로 갔다. 확실히 이곳은 서양인보다 중국인이 훨씬 많았다. 모든 간판이 중국어로 되어 있었고, 분위기도 매우 낯설었다. 처음에는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할까 하다, 돌아다니면 다닐수록 거부감이 들어 주변에 있는 한식당에 가기로 했다. 다른 한식당들은 비싸길래, 한국 마트 Seoul Plaza에 딸려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마파두부가 딸려 있는 볶음면을 주문했다. 매우 실망스러웠다. 마파두부는 그냥 싱거웠고, 볶음면에는 이상한 신맛이 났다. 진심으로 마트에서 같이 산 헛개차가 가장 맛있었다. 외국인들이 한식에 대해서 나쁜 인식을 가질까 봐, 이렇게 맛없는 음식을 한국 마트에서 판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도 했다.

 14시에는 미리 예약해 둔 해리포터 스튜디오로 출발했다. 거의 2달 전에 예약을 했었지만, 이 시점에도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어서 어쩔 수 없이 16시 30분으로 예약을 했었다. 왓포드 역에 내려서 스튜디오까지는 전용 셔틀버스—Powered by muggle electricity라는 문구가 인상적이었다—를 타고 갔다. 입구에는 마법사들의 지팡이가 크게 전시되어 있었다. 이렇게 기대는 계속 부풀어져 갔지만, 둘러보면 둘러볼수록 이곳에 온 것을 후회했다. 비싼 입장료를 통해 얻은 감동이 전혀 없었다. 촬영 당시 사용했던 세트장을 옮긴 것이었지만, 다 가짜 같아 보여서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같이 가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어야 그나마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걸음을 멈춘 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호그와트 급행열차가 있는 곳에서는 갑자기 어두워지고 스산한 음악이 나오면서 죽음을 먹는 자들이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무섭게 공연한 뒤에 아이들이 다가오자 반갑게 사진을 찍어주는 모습이 귀여웠다. 바로 다음 장소는 식당이었다. 그 유명한 버터맥주를 팔고 있길래 사 먹을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가격은 무려 7파운드로 터무니없이 비쌌지만, 언제 또 마셔보겠느냐는 생각에 한 잔을 사보았다. 귀여운 200mL 잔에 뽀글뽀글한 거품과 함께 담겨있었다. 맛은 전혀 특색이 없었다. 평범한 휘핑크림에 설탕을 듬뿍 친 탄산수 느낌이 났다.

거품 모양 하나만큼은 정말 예뻤다 |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호그와트 모형

 저녁을 위해 마트에서 맥주와 사이다, 감자칩을 사 왔다. 맥주도 한 병에 2파운드가 넘는 것은 여전했지만, 7파운드짜리 버터맥주에 비하면 양반이라는 생각에 거부감 없이 집어 들었다. 사이다는 기대만큼 맛있지 않았다. 역시 씁쓸하면서도 시트러스 한 IPA가 최고다.


셋째 날

Wimbledon Lawn Tennis Museum -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

 내가 스코틀랜드를 간 것은 위스키 때문이었다면, 런던에 온 것은 스포츠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런던에 도착했을 때부터 '스포츠 데이'로 지정해 놓은 이날이 오길 고대하고 있었다. 10시 15분에 시작하는 윔블던 박물관 투어를 위해 8시에 일어났다. 내 숙소가 북쪽에 있던 것과 달리 윔블던은 런던 남서쪽에 위치해 있어서 가는 데에 1시간이나 걸렸다. 도착해서 투어 집합 지점 주변을 둘러보니 올해 대회의 대진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시간이 되자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고, 가이드가 우리를 코트들이 있는 곳들로 이끌었다. 일반 코트들은 계단 형태로 되어 배치되어 있었다. 대회가 끝나서 네트와 심판석, 심지어 관중석까지 모조리 다 치워져 있었고, 정말 아무것도 없는 잔디밭만 휑하니 있었다. 바로 옆을 지나다니면서 잔디를 맛보고 싶은 욕구도 있었으나, 가이드가 투어를 시작할 때부터 제발 조코비치를 따라 하지 말라고 강하게 경고했기 때문에 그러지 못하였다.

2023년 윔블던 남자 단식 대진표 | 꾸준히 관리되고 있는 텅 빈 코트들

 그다음 1번 코트에 들어갔다. 엄청 크진 않았지만, 일반 코트들과 다르게 사방이 갇힌 스타디움이었다. 센터 코트도 아닌데, 개폐식 천장이 있는 것도 놀라웠다. 이후 The Hill과 역사적인 사흘동안의—정확한 경기 시간은 11시간 5분이었다—경기가 펼쳐진 18번 코트를 지나 기자실로 갔다. 실제 선수들처럼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찍고, 휴식 공간을 거쳐 선수들의 사인으로 도배되어 있는 백보드 앞으로 갔다. 빼곡하게 적혀있는 사인들 중 페더러의 사인이 가장 인기가 많았지만, 사인이 별로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세련된 다리를 건너 드디어, 센터 코트에 입성했다. 항상 유명 인사들이 얼굴을 비추는 황토색 테두리의 Royal Box와 올해 남자 단식 결승전의 최종 스코어가 그대로 남겨져 있는 점수판을 보니 내가 윔블던 센터 코트에 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네트와 심판석 등이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관광객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이다. 아래 내려가서 잔디 맛집의 잔디를 눈앞에서 보지 못하는 것도 다소 아쉬웠다. 텅 빈 잔디밭과 이를 사방으로 둘러싼 좌석들을 배경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경기에서 이기고 행복한 나를 상상하며 사진을 찍었다 | 내가 아는 선수들의 사인을 찾는 재미도 있었다 | 윔블던 센터 코트 전경

 이렇게 가이드의 투어가 끝났고, 여러 물품들을 전시해 둔 박물관을 혼자 구경하다 기념품점으로 향했다. 정말 안 사고 싶은 물건들이 없었다. 총 2개를 사기로 스스로 마음먹었다. 일단 가장 유용한 테니스 타월이 한 자리를 차지했고, 나머지 한 자리는 고심 끝에 하얀색 모자로 채우기로 결정했다. 평범한 새하얀 모자에 윔블던 로고 딱 하나 박힌 간단한 모자였지만, 그 위엄 있는 로고 하나 때문에 모자의 디자인과 가격 모두 명품을 위협하는 수준이 되었다. 70파운드를 지르고 숙소로 돌아가기 전, 블로그에서 발견한 윔블던 맛집 명량 핫도그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나라에 있는 명량 핫도그랑 다른 점은 전혀 없었지만, 이렇게 다채로운 핫도그를 유럽—특히 무미건조한 런던—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맛집 반열에 오를 자격이 된다고 생각한다.

페더러와 조코비치의 상징적인 자세 | 기념품점에서 산 모자와 테니스 타월 | 우리나라에서 먹던 명량 핫도그와 똑같았다

 숙소에 소중한 기념품들을 놔두고, 바로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거리 상으로는 그렇게 멀지 않았지만, 직행 지하철이 없어서 30분 넘게 걸렸다. 경기 시작 2시간 전에 도착했음에도, 경기장 주변부터 하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리버풀과의 경기여서 그런가, 원래 축구에 대한 열정이 뜨거워서 그런가 여간 많은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추석이라 그런지 한국인이 3할은 차지하는 것 같았다. 정말 주영한국대사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동행 분들을 만나기 전, 기념품점에 들어가 가족들에게 선물할 유니폼을 샀다. 기념품점이 정말 넓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으로 사람—특히 한국인—이 많았다. 역시나 손흥민의 유니폼이 불티나게 나가고, 나간 만큼 직원들이 분주하게 그의 유니폼을 재고에 채웠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겨우 손흥민 유니폼 청소년용 XL 2벌과 성인용 S 1벌을 찾을 수 있었다. 성인용 S는 아버지 것이었지만, 직관할 때 유니폼이 없으면 아쉬워서 그냥 뜯고 내가 입었다. 유럽이라 M이 클 것 같아서 S를 샀는데, 이 사람들 키에 비해 어깨가 좁은가 보다. 어깨가 꽉 끼어 불편하고 옷 입은 테도 이상했다.

 유니폼을 사고 힘겹게 빠져나온 뒤, 인파 속에서 힘겹게 새로운 동행 분을 만났다. 추석 연휴에 휴가 쓰고 여행 다니고 있는 30대 초반 남자 직장인이었다. 경기장 앞 트럭에서 파는 맥주를 한 잔씩 마셨다. 각자 맥주를 따르는 셀프서비스였는데, 처음 해보는 거라 가득 따르지 못해 매우 아쉬웠다. 나머지 동행 한 분을 기다리는 동안 그동안의 여행 이야기로 수다를 떨었다. 확실히 직장인이라 그런지 돈에 대한 걱정이 없어 여유가 느껴졌다. 그사이 나머지 한 분도 오셨다. 이 분도 똑같이 휴가 쓰고 여행 중인 30대 초반 여자 직장인이었다. 경기 시작까지 3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아 얼른 들어가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손흥민이 몸 푸는 것을 구경하다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2019년에 개장한 신상 경기장이라 그런지 매우 세련됐다 |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 전경 | 경기 전 몸을 풀고 있는 손흥민

 내 자리는 122구역 8열로, 100파운드짜리—가장 높은 등급의 경기라 유독 비쌌다—좌석이었다. 멤버십 가격 60파운드까지 하면, 축구 한 경기를 보는 데에 160파운드, 한화로 25만 원이 넘는 돈을 썼다. 하지만 이날 경기와 분위기 등 모든 것이 그 이상의 가치를 했다. 일단 경기가 무척 재미있었다. 총 3골이 나왔고, 그중에서 손흥민의 동점골도 있었다. 비록 내 자리와 먼 쪽 골대에 넣은 것이 살짝 아쉽긴 했지만, 모두 다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환호하며 그의 골을 마음껏 즐겼다. 게다가 마지막 골은 후반전 추가시간에 나온 극장 역전골—리버풀의 자책골이긴 했다—이었다. 골뿐만 아니라 경기 자체도 서로 빠르게 공수전환을 하며 치고받고 싸우는 분위기여서 흥미진진했다. 리버풀 선수 2명이 퇴장당한 이후로는 토트넘의 일방적인 공격이 펼쳐져서 조금 답답했지만, 그 답답함은 응원가가 날려 보내주었다. 팬들이 응원가를 매우 열정적으로 부르고, 그 노래들도 좋았다. 그것들 중 내가 아는 Nice One Sonny는 나도 따라 불렀다. 리버풀은 9명이서 뛰는데 오랫동안 동점이었을 당시에는 원정석에 앉은 리버풀 팬들의 응원 소리 또한 뚜렷하게 들렸다. 그렇지만 토트넘 팬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응원을 했고, 극장골을 넣은 이후에는 그 열정이 폭발하였다. 경기가 끝나고 두 손을 왔다 갔다 하며 부르는 노래를 시작으로 토트넘 팬들은 축제를 벌였다. 그들 중 승리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은 경기장에 있는 모든 물건을 쾅쾅 치면서까지 응원가를 불렀다. 이 소리는 경기장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계속 들렸다.

선수들의 치열한 볼 다툼을 코앞에서 볼 수 있었다 | 확대해서 찍은 손흥민

 귀가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인파 속에서 힘들게 동행 분들과 다시 만났다. 이 좋은 분위기를 이어가 펍에서 맥주 한 잔씩 하기로 했다. 허나 이 생각을 우리만 할 리가 없었다. 모두들 집에 가지 않고 펍에 가서 승리를 즐겼다. 그러다 보니 경기장 주변 펍은 모두 만석이어서, 우리는 맥주 한 잔씩 사들고 서서 마셨다. 두 분 다 우연히 금융권에 종사하는 분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이해는 잘 안 됐지만, 돈을 많이 벌고 그렇게 번 돈으로 여유롭게 여행을 다니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제껏 시간으로 돈을 사는 여행을 해왔고 이번 학기 계속 이런 여행을 할 내게는 그들이 부러웠다. 반대로 그들은 나의 외롭고 가난한 여행이 낭만 있다며 자신들은 어릴 적 교환학생을 하지 않은 걸 아쉬워했다. 그 나이에만 즐길 수 있는 여행이 있다는 깨달았다. 이번 학기에는 원 없이 '부족한 여행'을 다니며 학생의 신분을 누려야지. 10년 뒤 '음, 좀 비싸네. 근데 뭐 가격이 대수인가.'라는 마음가짐으로 '배부른 여행'을 다닐 나를 상상하면서.

개장한 지 얼마 안 된 경기장인데, 저렇게 벽을 막 치면 금방 허물어질까 걱정도 되었다


넷째 날

대영 박물관 - 세인트 폴 대성당

 벌써 런던에서의 마지막 날, 아니 자유여행의 마지막 날이 와버렸다. 그러나 아쉽다는 느낌은 딱히 들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일단 런던에서 더 이상 가보고 싶은 곳이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늦게 체크아웃을 하고 킹스 크로스 역 주변 짐 보관소에 캐리어를 맡겼다. 어디를 갈지 한참 고민하다 그래도 런던에 왔는데, 대영 박물관을 안 가긴 그래서 일단 이곳으로 향했다—사실 입장료가 무료인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8년 전, 아무것도 모를 때 이곳에 한 번 왔었다. 모나리자를 멀찍이서 까치발 들고 보았던 기억이라도 있는 루브르 박물관과는 달리, 이곳의 어떠한 작품도 머릿속에 남아있질 않았다—그래도 매표소와 기념품점이 있는 중심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돈을 아끼고자 배낭은 짐 보관소에 맡기질 않았는데, 이 박물관에 짐을 맡기려면 또 돈을 내야 한다고 해서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박물관을 다녔다. 그러다 보니 금세 지쳤다. 물론 애초에 고대 유물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없긴 했지만. 결국 30분은 넘겼을까, 와이파이가 잘 되는 자리를 찾아 앉아서 뮌헨에 도착하면 바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나 했다. 그렇게 와이파이를 열심히 써먹고, 출출해져 밖으로 나왔다.

 마트에서 Meal Deal로 끼니를 해결하고, 남아 있는 런던 패스를 털기 위해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갔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비해 특색이 없다고 느껴져서 대충 쓱 둘러보고 나왔다. 더 할 게 없어서 일찍 히드로 공항으로 향했다. 오히려 참 다행이었다. 더 늦게 갔으면 자칫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을 해서, 히드로 공항으로 가는 Elizabeth Line이 끝까지 안 가고 중간에서 멈추었다. 이렇게 낙오된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었고, 그러다 보니 기차역 앞 버스 정류장은 공항 행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로 빼곡했다. 심지어 이 정류장으로 오는 버스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 10분 정도가 남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고민하다, 문득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직전 정류장으로 가서 미리 버스를 타면 적어도 지금 있는 정류장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먼저 탈 수 있겠다.' 지체하지 않고 바로 걸어갔다. 5분 정도 걸어 도착했는데, 이 정류장에는 사람이 적지는 않았으나 기차역 옆 정류장과 비교하면 확연히 적었다. 버스가 도착했을 때 이미 버스에 사람이 많았다. 새로 옮긴 정류장의 사람들이 다 타자, 버스는 바로 만원이 되었다. 그래서 다음 정류장, 기차역 옆에 있는 정류장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단 한 명도 타지 못하였다. 잘 가나 싶었지만, 이 버스도 갑자기 운행을 중단하여 '지하철 대체 버스의 대체 버스'로 또 갈아타며 우여곡절 끝에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였다. 순간의 기지로 무사히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25일간의 대장정이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웅장한 대자연도 감상하고, 멋들어진 건물들이 늘어선 도시도 둘러보고, 위스키도 마음껏 공부하고 마셨다. 무엇보다 가장 뜻깊었던 것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던 것이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하루 종일 같이 다니면서 알아가는 것과,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짧고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 그리고 때로는 혼자가 되어 생긴 외로움마저도 이번 여행을 더 오래 기억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현지인들에게 받은 크고 작은 도움들도 잊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생겨났을 안 좋은 일들을 생각하니 끔찍하다. 그리하여 나 스스로 변한 점이 몇 가지 있다. 일단 처음 보는 사람을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거의 전무하다 싶었던 위트도 조금은 생긴 것 같다. 또 전보다 더 대범해졌다. 외국에 나가서도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겁 없이 혼자 도전해 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앞으로 교환학생 생활을 하면서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될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배우고 느낀 점들이 큰 도움이 되겠지. 한 단계 진화한 내가 남은 5개월 동안 어떻게 유럽 생활을 할지 매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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