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스코틀랜드
Strathisla 증류소
그리고 드디어 최종적으로 나오는 Spirit을 숙성시키는 Warehouse로 이동하였다. Warehouse는 천국 그 자체였다. 가이드가 창고 문을 딱 여는 순간 참나무와 위스키 원액이 섞인 냄새는 나를 황홀하게 만들 정도였다. 마치 격한 운동을 하고 숨을 고를 때처럼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정말 많은 캐스크들이 양쪽에 가지런히 보관되어 있었다. 오크통에 있는 원액을 마셔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럴 기회는 주지 않았다. 매일 이 창고에 들러 위스키 향을 맡아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직원들에게는 최고의 복지 아닐까 싶다. 어느새 증류소 탐방이 다 끝나고 시음 장소로 갔다. Strathisla 12년과 Chivas Regal 13년 Rye Finish, Strathisla 15년, 이렇게 총 3잔을 맛보았다. Strathisla 12년은 부드럽고 꿀과 카라멜이 느껴지는 평범한 싱글몰트였다. Chivas Regal은 기본적인 위스키의 맛도 라이의 향도 다 밋밋해서 아쉬웠다. 하지만 Strathisla 15년은 달랐다. 셰리 캐스크의 영향을 오래 받아서 그런지 말린 과일 향과 맛이 진했고 끝에는 다크 초코렛을 먹은 느낌이 났다. 그리고 겨우 47.7도임에도 맛이 풍부하고 묵직했고, 결코 낮은 도수가 아님에도 알코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혀가 알코올에 절여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투어가 종료되고, Visitor Centre에 있는 바에 가서 Chivas Regal Mizunara Cask도 시음해 보았다. 기존 12년에 비해 더 부드럽고 바닐라 향이 났다. 그렇지만 Strathisla 15년의 감동을 잊지 못해—Chivas Regal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Strathisla는 영국에서조차도 구경하기 어렵다—100파운드를 주고 바로 사버렸다. 이렇게까지나 증류소 투어가 만족스러울 줄은 예상치 못했다. 기분이 좋아 날아갈 듯한 몸을 소중한 보물을 꼭 껴앉으며 간신히 가라앉혔다. 이 위스키를 언제 개봉할지 상상하며, 기차와 36번 버스를 타고 더프타운에 있는 숙소까지 갔다.
에어비엔비 숙소 주인은 70대 할아버지로 이름은 Neil이었다. 무뚝뚝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친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저녁으로 마트에서 간단히 빵과 스파게티를 사 왔는데 직접 조리해 주었다. 그가 키우는 개도 그만큼 착했는데, 그와 다르게 매우 활달했다. 나를 보자마자 달려들어—개의 덩치가 워낙 커 화들짝 놀랬다—안아달라고 난리도 아니었다. 겨우 Neil이 와서 제지하고 다른 방에 가둔 후에야 제대로 식사할 수 있었다. 방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침대가 2개였지만, 3개였던 스카이섬 숙소보다 널찍했고, 청소 상태도 매우 깔끔했다. 이 방도 박에 65달러로 다른 도시들에 비해 비싼 편이었지만, 스카이섬 때문인지 Neil 덕분인지 꽤나 합리적이라고 느껴졌다. 이튿날 증류소를 3곳이나 가야 하기 때문에 마트에서 사 온 IPA만 한 병 마시고 일찍 잤다.
Glenallachie 증류소 - Aberlour 증류소 - Glenfarclas 증류소
투어가 시작하는 10시 딱 5분 전에 증류소에 도착하였다. 평일 오전 투어라 그런지 관광객이 나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투어가 일대일로 진행되는 웃긴 상황이 연출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있으면 가이드가 질문을 해도 조용히 있으면 되는데, 일대일로 진행되다 보니 대답과 호응을 열심히 해야 됐다. 한국어였으면 별로 부담이 없었겠지만, 영어라서 초반에는 긴장되었다. 그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였다. 단점은 이것뿐이었다. 시간이 남아 돌기 때문에 가이드가 내 사진—물론 실력은 형편없었다—도 많이 찍어주고, 원래 투어에서 안 가는 곳들도 들렀다. 이번 투어도 Strathisla 증류소 때와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곳은 신생 증류소다 보니 기계들이 거의 다 신형이었다—Washback이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표적이다. 이 증류소의 경우 Warehouse 방문은 포함이 안 되어있는데, 이번에는 시간이 넘쳐흘러 특별히 내게만 열어주었다. 역시나 Warehouse에서 풍기는 냄새는 향기로웠다. 정말이지, 증류소 Warehouse 향 방향제가 있다면 망설임 없이 살 것이다.
시음은 Glenallachie 10년, 12년, 그리고 15년 총 3잔을 하였다. 점점 갈수록 맛이 진해지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맛이 진한 15년이 가장 맛있었다. Strathisla 15년과 비슷했지만 살짝 더 단 느낌이었다. 하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봄에 친구 집에서 마셨던 Glenallachie 10년 CS가 계속 생각났다. 그 파괴적인 달콤함과 꿉꿉함, 그리고 묵직함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투어가 끝나고 Visitor Centre에서 무슨 병을 살까 고민했다. 이날 마침 처음 출시된 Meikle Toir—저명한 마스터 디스틸러 Billy Walker가 이곳으로 이적한 이후 그의 첫 작품이라고 한다—을 살까 아니면 Glenallachie 10년 CS를 살까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10년 CS는 우리나라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Meikle Toir로 정했다. 4종류를 다 마셔보았는데, 셰리 캐스크에서 피니시 한 The Sherry One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The Turbo도 끌렸지만, 너무 훈연향이 세서 나중에 피트가 더 익숙해지면 다시 사 보기로 했다. 그렇게 Glenallachie와 아무 관련 없는 일반인 중에는 처음으로, Meikle Toir - The Sherry One를 사들고 다음 증류소로 향했다.
왔던 길을 다시 지나 Aberlour 증류소로 갔다. Aberlour 12년이 내가 처음 구매한 싱글 몰트 스카치위스키이고, 그게 너무 마음에 들어서 8월 초에 제주도에 다녀오면서 Aberlour 16년—원래는 Aberlour A'bunadh를 사려고 했으나 재고가 없었다—을 또 샀을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증류소이다. 셰리와 버번이 섞여 40도밖에 안 되는 알코올 도수에도 불구하고 매우 풍부한 맛—셰리의 힘이 센 것도 내 마음에 쏙 들었다—이 주는 것이 큰 특징이었다. 아쉽게도 이 증류소는 2024년까지 공사 중이라 위스키 제조 과정은 못 보고 시음 투어만 가능했다. 내게 의미가 큰 증류소인 만큼 한 단계 더 비싼 Single Casks Explored 투어—사실 이 투어로 신청해야 시간이 딱 들어맞았다—를 신청했다. 투어는 정오에 시작되었다. 8명이서 투어를 들었다. 간단히 위스키 제조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본격적으로 위스키를 마셔보았다. 총 5잔이었는데, 첫 잔은 숙성을 하기 직전의 원액—즉 아직 스카치위스키가 아니다—이었다. 곡물의 향과 맛이 매우 진했다. 이 거친 원액이 참나무와 상호작용하면서 맛이 변하고 부드러워지는 것이 참 신기했다. 이후 4가지의 캐스크 원액을 마셔보았다. 다 55도가 넘는 고도수의 위스키였지만, 알코올이 치지 않고 부드러웠다. 특히 2nd Fill Sherry Butt에서 21년이나 숙성된 위스키는 정말 풍미가 깊었다. 지갑 사정 때문에 같은 병을 사진 못하고, Aberlour 12년 1st Fill Sherry Butt을 샀다. 나중에 Aberlour A'bunadh도 사서 두 위스키를 비교하면서 마셔볼 생각에 설레었다.
동네 편의점에서 Meal Deal로 점심을 해결한 뒤, 36A번 버스를 타고 Glenfarclas 증류소로 갔다. 이 증류소도 한적한 시골에 덩그러니 있었다. 투어 시작까지 1시간이나 남아 영롱하고 신성한 The Family Casks를 한참 구경했다. 아직 1955년에 숙성이 시작된 병도 있었다. 가장 최신은 2008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또한 가격이 200파운드가 넘어 살 엄두가 안 났다. 이번 투어에는 참가자가 꽤나 많았다. 가이드 1명이 여남은 명의 사람들을 이끌며 설명하다 보니 힘들어 보였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어서 그런가,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이번 투어는 다소 지루했다. 하지만 Warehouse는 언제나 가도 좋은 곳이다. 어김없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들어갔다. 이전에 갔던 증류소들과는 다르게, 캐스크들을 높지 않고 3층까지만 쌓았다는 점이다. 낮은 높이에도 불구하고 지지대들이 약해 보여서, 오히려 캐스크들이 굴러 떨어질까 걱정이 되었다. 시음은 단 2잔만 했다; Glenfarclas 10년과 12년. 둘 다 그전에 마셨던 것들에 비해 너무 밍밍했다. 하긴, Aberlour 증류소에서 마셨던 것들은 물을 아예 안 타 모두 50도를 넘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그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Glenallachie 10년보다도 심심하게 느껴졌다. 이곳이 셰리 위스키 3대 명가인 이유는 오로지 Glenfarclas 105나 The Family Casks 때문인가 보다. 이미 3병이나 사버려서 돈과 캐리어의 공간을 아낄 겸 이번에는 위스키를 사지 않았다. 나중에 우리나라에 가서 Glenfarclas 105는 꼭 마셔보고 싶었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36A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10분 정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퇴근하던 투어 가이드가 차를 대더니, 더프타운에 가는 거면 자기 차에 타라고 '야타'를 시전하였다. 금방 버스가 올 것이긴 하지만, 현지인이 베푸는 호의에 거절하는 것은 또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매우 고맙다는 말과 함께 차에 탔다. 차 안에서 가볍게 담소를 나누었는데, 그녀가 내 영어 실력을 칭찬해 주어서 기분이 좋았다. 겨우 15분 정도 대화를 나눈 것이었지만,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숙소에 가기 전 마트에 들러 맥주와 연어를 샀다. 저녁으로 연어를 전자레인지에 데우려고 했지만, Neil이 자기가 해주겠다며 앉아있으라고 했다. 그가 데워준 연어를 맛있게 먹고 방으로 올라가 짐을 정리했다. 이때까지 산 3병을 각각 옷이나 수건으로 꽁꽁 싸매어 넣었다. 짐을 다 싸니 딱 1병이 들어갈 자리가 남았다. 내일 또 어떤 위스키를 살지 행복한 상상을 하며 맥주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했다.
Glenfiddich 증류소
스코틀랜드 증류소에서 위스키를 살 마지막 기회였기에 이번에는 정말 신중하게 골랐다. 문득 내가 직접 병입 하는 위스키가 있길래 자세히 살펴보았다. Warehouse에서 가져온 캐스크를 가져다 놓았는데, 여기서 내가 직접 병에 따라 뚜껑을 닫고 밀봉한 뒤 이름까지 쓰는 독특한 위스키였다. 게다가 Cask Strength여서 더 끌렸다. 직원에게 문의하여 한 잔을 마셔보았는데, 버번 캐스크의 특징이 강하게 드러나는, 매운 꿀 느낌이 났다. 셰리 캐스크가 아니라 살짝 고민이 되었지만, 안 사면 후회할 것 같아서 사기로 결정했다. 내가 직접 이름과 병입 날짜, 캐스크 번호를 쓰고 나무 케이스에 병을 담으니, 순간 Master Distiller가 된 기분이 들었다. 화끈하게 160파운드를 주고 Glenfiddich - The Distillery Malt를 쟁취해 내니 후련했다. CS로 버번 캐스크 숙성과 셰리 캐스크 숙성 위스키를 비교하며 마실 생각에 또 한 번 설레었다.
숙소로 돌아와서 귀하디 귀한 Glenfiddich - The Distillery Malt를 캐리어에 쑤셔 넣고 Neil과 작별인사를 했다. 다시 36번 버스를 타고 Elgin으로 가 애버딘 공항이 있는 Dyce 역에서 내렸다. 그런데 역에서 공항까지 가는 버스가 없었다. 당연히 있을 줄 알고 찾아보지도 않고 하차했는데,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버스 안내판이 없었다. 같이 내린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다 잘 모르겠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비행기 이륙까지 1시간 30분밖에 안 남아서 비행기를 놓치면 어쩌나 걱정되어 떨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한 아저씨가 내게 다가왔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가엽게 보았는지, 내게 자기가 공항 가는 택시를 불렀는데 같이 타자고 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어플에 얼마가 찍혔냐고 물어보니, 돈은 자기가 다 낼 거라며 그냥 타라고 단호하게 얘기해서, 무임승차로 단 10분 만에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덕분에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되었다고 수차례 감사의 말을 하고 얼른 체크인을 하러 갔다.
하지만 새로운 난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asyjet 직원이 내 배낭을 유심히 보더니 가방 크기를 검사하는 통에 넣어보라고 했다. 빵빵했던 내 배낭은 당연히 들어가지 않았다. 체크인 마감까지 배낭을 저 통에 넣지 못하면 60파운드를 더 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은 나는, 추하게 체크인 카운터 옆에서 캐리어와 배낭을 다 펼친 뒤, 짐을 다 풀고 다시 쌌다. 체크인 마감까지 20분밖에 남지 않아, 있는 힘없는 힘 다 써가며 캐리어에 짐을 욱여넣었다. 그거로도 부족해서 춥지 않았음에도 외투를 한 겹 더 입고, 작은 짐들은 다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배낭을 그 통에 올려놓고 발로 꾹꾹 누르니 드디어, 가방이 딱 맞게 들어갔다. 이때가 체크인 마감 5분 전이었다. 직원의 "Okay"라는 말과 함께 긴장이 확 풀렸다. 60파운드를 지켜낸 나의 문제해결능력과 집념을 다시 한번 진심으로 칭찬한다. 탑승 대기장으로 가서는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혼이 다 빠진 나는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기다렸다. 이렇게 극적으로 스코틀랜드 여정을 마무리하였다.
여태 살면서 가장 많은 돈을 쓴 2박3일이었다. 그만큼 행복했고 재미있었다. 나를 위해서 이렇게 큰돈을 사용하니 후련하기도 했다. 직장인이 되기 전까지 이렇게 나를 위해 비싼 선물을 사줄 기회는 다시없을 것이다. 이 4병의 위스키를 언제 개봉하고 어떻게 누구랑 마실지 행복한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벌써 값어치를 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위스키를 만드는 과정을 눈으로 직접 보면서 공부하니, 술에 대해 더 깊게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취업을 하면 그때부터는 술 공부를 열심히 해봐야지. 요컨대 '생명의 물'은 내 인생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위스키 외적으로도 이번 2박3일은 뜻깊었다.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숙소 주인 Neil부터 숙소까지 차를 태워준 Glenfarclas 증류소 가이드, 공항까지 택시에 태워 준 아저씨까지. 이들이 없었으면 이 여행이 제대로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보답할 수 없는 사람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 정말 고통스럽다지만, 문득 나도 도움을 주고 보답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매는 이방인에게 선뜻 도움을 주는 현지인, 나도 그런 멋진 현지인이 되어야지. 현지인으로서 이런 도움을 아무렇지도 않게 줄 수 있는 것은 권리이기도 하지만, 쉬운 만큼 반드시 도와줘야 하는 의무도 있지 않을까? 술을 많이 마시니 맥락 없이 허세 넘치는 생각들만 떠오른다. 이곳에서 산 위스키들을 마실 때마다 이들을 떠올리며 조용히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