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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츠윌리엄 다아시 Sep 16. 2024

슐리어제, 테게른제

독일

 뮌헨에도 관심을 주기로 마음먹은 것은 2023년이 열흘도 남지 않았을 시점이었다. TUM 도서관도 들락날락거리고, 올림피아 수영장도 가보고, Sendlinger Tor 주변을 둘러보다 물담배도 오랜만에 피웠다. 또 여행하는 기분을 내보려고 유랑에서 동행을 구해 나름의 관광지들과 크리스마스 마켓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진짜 뮌헨 사람처럼 주변에 트래킹을 가기로 했다—패션 Münchener가 되기는 싫었다. 뮌헨 근교 트래킹을 검색해 보니, 남쪽에 있는 슐리어제와 테게른제가 트래킹 하기 괜찮다는 블로그들이 몇 개 나왔다. 그렇게 트래킹으로 솔로 크리스마스를 커플들 못지않게 알차게 보내기 위해 야심 차게 계획을 세웠다.

 독일에도 나름 위스키를 생산하는 증류소들이 몇 군데 있다. 단지 유명하지 않을 뿐. 그들 중에서 슐리어제 근처에 Slyrs 증류소가 있는데, 크리스마스 당일에도 영업을 한다길래 트래킹 하는 겸 방문했다. 술을 몇 잔 걸치고 트래킹을 할 생각에 기차 안에서부터 설레었다. Neuhaus라는 시골 동네에 자리 잡은 증류소에 들어가니 손님은 나밖에 없었다.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증류소들만큼 투어에 대한 수요가 있지 않아 가이드 투어는 10명 이상의 단체가 예약을 할 때만 받는다고 했다. 대신 10유로짜리 셀프 투어가 신청하여 안내 화살표를 따라 혼자 증류소를 돌았다—가이드에게 영어 폭격을 당할 일이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좋았다. 증류소 소개 영상도 보여주고 각 위스키 생산 과정에 대해 소상히 설명해 놓는 의외의 퀄리티를 자랑했다. 사람도 별로 없는데 이렇게 정성스레 투어 공간을 마련해 놓은 것이 조금 의문스러웠다.

 투어를 다 마치고 환상적인 경치를 자랑하는 바에 가서 시음도 했다. Slyrs Single Malt Whisky Classic과 Slyrs Vanilla Honey Liqueur 한 잔씩을 맛볼 수 있었다. 리큐르를 먼저 맛보았다—일반적으로 도수가 낮은 것을 먼저 마신다. 향에서는 바닐라가 확 느껴졌고, 맛을 보니 꿀의 단 맛과 끈적한 바디감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배고픈 상태에서 달달한 술이 부담 없이 들어가니 반해버렸다. 그다음 위스키를 마셔보았다. Classic 모델이라 그런지 특색이 전혀 없었다. 딱 말해서 뭐 하나 튀는 거 없는 밋밋한 위스키였다. 매우 아쉬운 마음에 바텐더 할아버지에게 다른 위스키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연세 치고는 이 업종에 오래 종사한 사람은 아닌 듯했다. 정말 많은 종류의 캐스크 피니시 제품들이 있었는데, 전반적으로 다 추천해 주는 듯했다. 그래서 그냥 내가 접해보지 못했던 아몬틸라도 캐스크 피니시를 한 잔 주문했다. Classic에는 없던 견과류 향이 많이 올라왔는데, 피니시 제품이라 그런지 어정쩡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증류소에서 다양한 피니시 제품들을 실험하고 판매하고 있다면 그만큼 원액에 자신이 없다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아무튼 추가로 한 잔 마신 것에 대해 결제를 하려고 했는데, 할아버지는 씩 웃더니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그냥 가라고 했다. 정말 사소하지만 마음은 따뜻해지게 만드는 선물이었다.

사용했던 캐스크들을 가져다 놓아 창고처럼 꾸며놓은 곳이다 | 위스키보단 뷰 맛집

 기분도 좋아졌겠다, 본격적으로 트래킹을 시작했다. 지도에는 코스마다 번호와 난이도가 표시되어 있었다. 파란색이 초급, 빨간색이 중급, 검은색이 고급을 뜻한다—스키장에서도 같은 규칙을 따른다. 테게른제로 바로 가려면 검은색으로 칠해진 20번 코스를 택해야만 했다. 이 코스에는 북쪽과 남쪽 두 가지 길이 있었는데, 슐리어제를 구경할 수 있는 북쪽 길을 택했다. 지리산과 한라산 정상도 정복해 본 나는 비웃으며 자신 있게 길을 나섰다.

'긴 등반으로 어려운 여정'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20번 코스 | 두 호수 사이 빽빽한 산들을 가로질러 갔다

 슐리어제를 오른편에 끼고 Freudenberg까지 올라가는 길은 편했고 아름다웠다. 왼편에는 곧이어 통과할 험난한 길을 예고하는 산들이 있었지만, 당장은 길이 매우 평탄했다. 하늘도 맑은 데에다가 이따금씩 사람들과 심지어 말들도 만나 마음도 편안했다. 사람들은 나를 마주치면 'Servus'라고 무심하게 인사해 주었다. 'Servus'는 바이에른 지방의 인사말로, 'Hallo'보다 조금 더 친근한 느낌을 준다. 나도 무덤덤하게 'Servus'라고 맞인사를 했다. 현지인인 척 최대한 자연스럽게 인사를 했지만, 속으로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괜히 뮌헨 사람으로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반려마와 함께 산책하고 있는 여자 | 독일에는 맑은 물을 품은 거대한 호수가 매우 흔하다

 마을을 지나 서쪽으로 길을 트니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이제부터 진짜 트래킹이구나 싶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다 보니 주택들은 점점 사라지고 어느덧 나무들만 가득했다.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는 만큼 길 옆에 쌓인 눈은 두꺼워져만 갔다. 급기야 쓰러진 나무들도 몇 그루씩 보였다. 그냥 단순히 쓰러진 게 아니라, 며칠 전의 한파와 더불어 뮌헨을 휩쓸고 간 강풍 때문에 정말 큰 나무들이 내 길을 막고 있었다. 쓰러진 나무 기둥이 내 허리보다 높이 누워있어 기어가듯 나무를 넘으며 나아갔다.

 어느덧 산길로 접어들었다. 추석 성묘를 연상시키듯 길은 제대로 닦여있지 않았다. 초반에는 대충 이곳이 길이겠다 싶어서 갔는데 점점 정말 사람이 다니는 길이 맞나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구글맵 GPS에 의존하여 길을 찾아갔는데, 급기야 구글맵에는 길로 표시되어 있던 곳에는 길이라고는 전혀 상상되지 않는 오르막이 있었다. 나의 길 찾기 본능보다는 구글맵을 믿고 길을 개척해 나아갔다. 10분 정도 걸으니 운이 좋게도 하얀 줄 3개가 그어져 있는 나무를 발견했다. 맞게 왔다는 확신이 들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구글맵으로 방향을 추측하여 올라가니 띄엄띄엄 사람의 흔적이 남겨져 있는 나무들을 계속 찾을 수 있었다. 영하의 날씨에도 땀이 나도록 산을 타다 보니 끝내 정상이 눈에 보였다.

 다만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을 찾지는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무릎 높이까지 수북이 쌓여있는 눈길을 뚫고 정상을 향해 나아갔다. 조그맣게 보이던 십자가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 엄청난 성취감을 느꼈다. 내가 이 낯선 타지의 길 없는 산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정상을 찾아 올라가다니. 나는 정말로 'Servus'라는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길을 떡하니 막고 있는 나무 | 나무에 하얀 줄이 없었더라면 누가 이곳을 길이라 말하겠는가 | 유럽 산 정상에는 십자가가 많다

 다행히 하행 길은 비교적 편했다. 길도 널찍히 잘 닦여 있었고 제설도 다 되어 있었다. 터벅터벅 길을 따라 내려가니 드디어 밭과 마을, 그리고 마침내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덧 태양도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3시간이 넘도록 산을 타며 겪은 고생을—엄밀히 말하자면 스스로 사서 한 고생이다—아름다운 경치로 보상받았다. 하지만 그만으로는 부족했다. 먹을 것으로도 보상받아야 했다. 사실 테게른제를 가보지 않은 독일인들도 이곳을 분명 들어는 봤을 것이다. Tegernseer Hell라는 맥주를 웬만한 마트에서 다 팔기 때문이다. Hell은 라거들 중에서도 매우 맑고 가벼운 라거로, 내 취향은 아니나 이왕 테게른제에 가게 된 거 현지 양조장에서 한 번 마셔보고 싶었다. 그래서 사실 이번 트래킹의 시작과 끝을 모두 알코올과 함께하기로 계획했다. 힘겹게 Tegernseer 직영점에 도착한 것은 16시 10분 전이었다. 뿌듯한 마음에 식당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배정받길 기다렸다. 하지만 직원이 오더니 나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인종차별인가 싶었지만, 뒤에 들어온 사람들도 전부 받지 않았다. 알고 보니 휴일이라 16시까지밖에 영업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거의 계획대로 착착 이루어졌던 일정이 마지막에 와서 흐트러지고 말았다. 야심 차게 계획했던 '술미상관 트래킹'은 그렇게 용두사미가 되었다. 또다시 춥고 배고프고 외로운 나만 남았다. 허탈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뮌헨행 기차에 올라탔다.

맛있는 맥주가 될 호숫물만 실컷 감상했다 | Bräustüberl Tegernsee

 집에 돌아와서 바로 밥을 지으려고 내 주방 서랍을 딱 열었다. 처음 보는 작은 쿠키 봉지가 하나 있었다. 마침 밖으로 나가려는 플렛메이트 Lisa를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이 쿠키에 대해 물어보니 자기가 친구들과 직접 만들었는데 크리스마스 선물로 넣어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내 타지 생활만 챙기기 바빠 플렛메이트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이런 선물을 받아 무척 감동받았다. 귀국까지 2개월 남짓 남았는데 그 안에 플랫메이트들에게 한식이라도 대접하기로 결심했다.

심지어 맛있기까지 해서 못 참고 이날 밤 다 먹어버렸다 | 백 선생님께 배운 된장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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