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 와 無가 둘 아니네

185. 꽃부리의 이야기 < 2016년 9월 18일>

by 임선영


유난히도 더웠던 올여름 추석이 지난 지금까지도 더위는 떠날 줄을 모르고

우리 주위를 맴돈다.

더위도 마음이나 육체나 걸쳐야 되는 기본조차도 잃어버리고 훌러덩 벗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을 즐기다 보니 떠나기 싫은가 보다.

너무 많이 채워져서 땀 흘리게 하니 지겨워지는 여름, 빨리 오지 않아 더 그리워지는

가을, 빨리 비우고 채움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작은 생활 속에서 만사를 다 깨치고 배워간다.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바라본 그릇과 컵들, 모두 한가운데가 텅 비어있다.

이 그릇들이 덩어리로 되어 있다면 이 집에서 무엇을 담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난다.

"앗차! 비워있기 때문에 그릇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무엇이든 담을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가니 텅 비워서 채울 수 있어 식구들 먹이를 담을 수 있게

되니, 무생물인 이 그릇 하나하나가 식구에게 무한한 공덕을 짓고 있지 않는가?

얼마나 소중한지 더 깨끗이 목욕으로 빚을 갚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에

포드득포드득 그릇 목욕을 시키게 된다.


이런 생각이 마음에 들기 시작하니 오만 가지가 다 비워 놓고 있다.

반찬을 넣으려 냉장고 문을 열고 보니 그 또한 냉장과 냉동으로 만들어져

그 속에 넣을 반찬을 위해 속을 텅 비우고 어서 들어오세요, 하지 않는가?

비워야만이 배려를 할 수 있고 만사를 다 표용 할 수 있고, 쓸모가 생겨나는

것을 물건들이 다 가르쳐 주고 있구나.


안방 목욕탕에서 급히 부른다 " 여보 등 좀 밀어줘"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텅 빈 안방 창문이 훤하게 나를 맞이한다. 문과 창이 만들어져서 안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고, 비워 둔 장롱 안에는 안, 밖의 주인 옷들을 걸어

보관해 주고 또 문을 여니 텅 빈 욕조 안에 따뜻한 물을 가득 담아

바깥 주인의 몸 더러움을 녹여주고 있다.

그 내부들이 다 비어 있기 때문에 안아주고 받아주는 의미가 현실 눈앞에 있다.

유와 무가 공존하는 작용을 통해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짐을 확연히 들어내고

가르쳐주는 현장, 부르는 사람 있어 오게 되는 현실도 얼마나 소중한지

순간 있음과 없음은 어느 한 쪽도 뺄 수 없는 상생의 관계임을 가슴 깊이

느낀다.


더운 여름 집에서 에어컨 바람도 자꾸 틀자니 전기세도 걱정이고 찬바람도

지긋지긋하여 좀 답답하여 훌훌 나다니고 싶어

"당신 좀 제발 밖으로 나가다녀, 나 좀 나가게요"

마누라의 성화에 책 한 권들고 나가는 남편 뒤꽁무니를 따라 나가서 놀다가

그것도 지겨워 집으로 들어온다.

텅 비어 있는 집, 문득 혼자 왔다 갔다 하다, 혹시 나 혼자 이 큰집을 이리 서성인다

하면 얼마나 허전하고 무서울까, 들어와 행복하게 살라고 텅 비워놓은 곳곳의

비움을 열어보며, 외조자가 나간 텅 빈 집의 허전함이 불안에 휩싸이며 걱정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전화를 건다.

"여보, 어디예요, 들어오세요"

" 응, 곧 갈게" 반가운 그 소리, 없음을 쫓게 되면 없음을 등진다는 가르침이 생각난다.

있음을 버리지도 말고, 없음을 쫓지도 말아야 하는 진리가 가슴을 친다.


아내의 말에 급히 달려온 외조자의 손에 자주색 모자가 들려있다.

"아니 무슨 모자예요?"

"전철을 타려 가는데 모자 집에서 어떤 여자가 그 모자를 사서 썼는데 너무 이뻐서

모자 좋아하는 당신이 쓰면 참 이쁘겠다 하는 생각이 나더라고, 그래서 사 왔어"

별로 비싸 보이지 않는 모자였지만, 화가 나서 나갔지만 순간 털털 털어버린 미운 마음,

텅비운 마음을 사랑으로 채워서 들고 온 모자가 큰 감동을 준다.

삶의 현장에서 한 수 위인 외조자

있음과 없음을 바로 공존하게 만드는 재주가 곧 마음 공부임을 느끼게 된다.

"여보 이 모자 몇 십 만 원 짜리라고 생각하고 쓰시게"

유와 무가 둘이니니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지 않겠는가.

이 모든 것이 다 살기 위한 흐르는 세상 일일뿐 날씨 이리 더운 것도 있어서 생기는 일

아니던가.

비워라 비워, 비워야 채워지고, 들어오지....

고맙고 감사하고 가벼운 하루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매일매일이 다 좋은 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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