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꽃부리 이야기 <2015년 9월 26일>
고창 선운사를 찾아들었다.
유연한 옛 흐름을 느끼는 길 불현듯 안기고 싶은 충동이 스멀스멀 스며든다.
세월이 이리 흘렀는데도 가을 바람결에 춤추는 옷깃의 물결이 간지러운 날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이겠지, 속으로 기쁜 일이야 외쳐본다.
구비 굽이를 돌아 걸어 들어가는 입구에
애처롭게 곱게 핀 꽃 무더기가 모여있다.
"무슨 꽃인가"
" 상사화라 부르는 꽃무릇이에요"
꽃을 보는 순간 안에서 오르는 섬찟함이 뭉클하게 가슴 적신다.
읍성 길을 낭자히 적시고 있는 꽃, 다 벗은 줄기 위에 누구를 위해
저리 고운 빛으로 피여 자연을 노래하는가.
아름다워서 너무 아름다워서 유심히 쳐다보았다.
어느 이름 없는 풀숲에 묻혀 이름 없이 지는 들꽃은 분명 아니었다.
여름 잎이 다 말라죽고 난 후 가을에 꽃이 피므로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한다
하여 상사화라 부른다 하지만 내가 보기는 꽃 술이 꽃 잎보다 훨씬
길어서 어디에서도 보지 못할 감히 근접하지 못할 숭고함이 베여있는 꽃이었다.
가장 몸에 걸친 것 하나 없이도 화려한 운치로 길손을 녹이는 꽃으로 보였다.
꽃술이 꽃 잎을 에워싸 보호하고 있어서 범접하지 못할 아름다운
요염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살포시 코를 같다 대 보았다.
"아니 이 아름다움에, 향기가 없다니, 분명 무슨 속절이 있구나"
아름다움에 비해 향기마저 없어서 벌과 나비를 불러 드리지 못하는
꽃이라 한다.
불러 드리지 못하니 열매마저도 맺지 못하는 꽃
그 아름다움은 누구를 위해서 이리 군락을 만들었는가.
혼자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외로움 있기에
그리 힘을 모아 피였나 보다.
임과의 만남도 행복도 멀리하고 심심산골 외로운 골짜기 숲 속에서
고독에 묻혀 저토록 혼불 같은 꽃을 피웠는가
정성을 모다 치켜세운 끝에 잎도 없이 한 송이 꽃을 불태우는 꽃무릇 어찌 보면
가장 순수하고 장엄하고 순결한 소망으로 타오르는 촛불 같다.
정열을 감추이고 부처님 전에 그 긴 꽃술을 모아 기도하는 자태 같다.
자신을 초월하여 온몸을 정갈하게 한 후 자신의 기구한 염원을
갈구하는 순교자의 의연한 자태 아니던가.
향기도 없고 벌 나비도 끌어 드리지 못하는 꽃, 꽃이라 할 수 있을까
아마 꽃무릇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꽃 그 자체이고자 한 것이 아닐까
한 송이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꽃술을 두 손 삼아 길게 길게
허공의 중력을 한 곳에 모은 것은 아닌가.
사랑보다는 좀 더 차원 높은 그 무엇을 갈구한 엄숙함과 영혼의 눈빛을
나는 그 꽃에서 느낀다.
너무나 아름다워 사람들의 마음을 오랫동안 사로잡으면
그 감도의 여운이 전설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솔밭 밑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꽃무릇들은 참선 수도하는 스님같이 초연하다.
붉은 꽃잎이 연약한 듯하면서도 강인해 보이고, 손 댈 수 없는 위엄이 있다.
벌, 나비가 함부로 넘나들도록 허용하는 꽃이 아니라 오로지 향기마저 없애고
깨달음의 끝에 피어난 꽃인 듯하다.
아마 한 여승이 한 남승을 사랑하다 지쳐 스러져간 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때문에 인가(人家)가 아닌 사찰 주변에 심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집중력을 기울여 깨달음의 꽃 한 송이를 피운 꽃무릇
구월의 선운사 길을 붉게 물들이는 상사화의 꽃무릇
곁에 있는 소박한 것도 마음에 담기면
예술품이 된다 하였던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촛불이 마음에도 길에도 켜진 듯
오래오래 깊은 감동으로 물결치는 마음을 함께한다.
꽃무릇을 어루만지는 사이 내 마음을 하늘도 읽었는지 잠시 가을바람 살포시
가슴을 파고든다.
공연히 외로울 것 같은 허전함이 꽃무릇 무리에서 연기처럼 솔솔 솟아나
눈물이 핑그르르 돈다.
갑자기 허기가 진다. 삶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