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꽃부리의 이야기 <허무, 해질넠 향기 등외 3편 >
허무/ 임 선영
夏庭에 자욱이 안개 내리니
빈 뜰 밤 깊어 찬 기운돈다
쓸어내릴 붓 끝의 한 줄기바람
소나무 몇 그루 없는 뜰 흔들고
사람도 애틋함도 벗어놓은 세월
물 같이 바람 같이 흘러가는데
쏟아 낸 슬픈 만삭 서정 섧구나
어루만지기조치 서러운 허허로움
정녕 뉜들 그 마음 알까
해질녘의 향기 / 임 선영
한 잔의 차를 들고
해질녘 창가에 앉으면
황금빛 향기 눈길을 튼다
눈 길로 음악은 흐르고
하루를 끌어 안은 그녀
마치 아무 일 없는 듯
느릿느릿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이야기 가득한 바깥 풍경을 읽는다
어디선가 환상의 하모니
이름 모를 목청 고운 새
앙상한 겨울 숲에서
아직 볼 일 남아 있나 보다
나오지 못한 말 / 임 선영
시인의 가슴 속에는
늘 쪼그리고 있는 것이 있다
바깥 구경 한 번 못한
바람 소리 한 번 듣지 못한
마르디 마른 언어들이
죽은 듯 숨어있다
장대 같은 고독 속에서
군더더기 없애고 살아서
금세라도 입에서 튀여 나갈듯
금방이라도 손에서 해방되려고
말은 감춰지고
눈을 감지 못한다.
여울목에서 / 仁泉 임 선영
가슴 가득한 독(毒) 쓸어 내리고
여울물에 마음 담갔네
상처는 쓸어 내겠는데
쓸어 낼 수 없는 고요
승냥이 마냥 바람 달려들어
황혼을 불빛 삼은 신경의 간지러움
흔들리는 풀꽃 하나가 위로가 된다
고요가 던져주는
여울목에 나뒹군 비애
뚝하고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쪼르르 달려가는 다람쥐의 기쁨
도토리 하나가 얼마나 위안인가
심장에 내리꽃는 시어의 갈증
평온함에 왈칵 솟아나는
경이로운 세계
시가 여울목에서 내게로 온다
붓방아 / 임 선영
매일매일 방아를 찧으며
붓으로 정을 버무리며
햇빛과 숱한 바람 찢으며
들숨날숨 쉬며 꽃 피어 내
광채를 더 하는 붓방아 길
원고지가 환희에 찬다
말간 햇살 타고
반짝이며 글 비 쏟아지는 날
온통 먹구름 허공을 덮어
형틀 위에 누운듯 송구스러운 날
뿌리부터 머리끝까지
취기가 차올라
세상이 돈짝만 해지면
생각을 화들짝 열고
콸콸콸 서정을 말로 부어
꿍더꿍 붓방아를 찢는다
자연은 서재 / 임 도인
뜰은 늘 서재였지
흐르는 물 처럼 인간도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존재
산 길 과 들길을 타는 것도
골짜기를 굽이굽이 흐르는것도
밑으로 흐르고 흘러
모이는 곳은 큰 바다
작고 크고 더럽던 것들도
다 품어 스러안고 말 없는 곳
화려히 피여 보는 이 없어도
고고하던 너도
그렇게 지고 말이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