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지하지 못한 우주의 패러다임들 03.
개미는 자신 위에 신발이 있다는 걸 모른다.
물고기는 물속 너머 육지에 영화관이
매진이라는 사실을 영영 알지 못한다.
인간은 무얼 모르고 있을까?
개미를 볼 때마다 오니즘(Onism)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한 번에 한 곳밖에 있을 수 없음을 깨달을 때 느끼는 좌절감을 말하는 단어다. 3차원에 거주하는 인간은 그런 계약을 맺고 살아간다. 내 몸 하나로는 모든 삶과 모든 장소, 모든 가능성을 경험할 수 없다는 제약이 걸려있다.
‘나’라는 존재는 그렇게 더 넓은 구조 안에 갇혀 산다.
집단 지능이 높은 개미도 3차원 공간을 전체적으로 인식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머리 위로 인간의 발이 다가온다면 갑자기 나타난 시커먼 무언가에 의해 순식간에 파괴된 거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개미에게 신발이 이해 불가능한 외부 힘이듯, 인간에게도 이해 못 할 개입이 여럿 있다.
우연, 직감, 타이밍.
말하려던 걸 순식간에 잊는 순간,
무언가를 열렬히 피하면 오히려 빨려 들어가는 상황,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이없는 불행 같은 것들.
개미를 내려다볼 때마다 나는 누구의 개미일까를 떠올린다. 누군가를 밟을 수도 있고, 밟힐 수도 있는 무수하게 굴곡진 우주 사이에서 왜소해진 나를 체감한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개미가 뉴발란스 신발은 알지 못해도 신발의 그림자는 느낄 수 있듯이, 내가 감지할 수 있는 더 높은 존재의 그림자는 무엇일까?
인간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가 있다면 그들은 시간 전체를 한 번에 꿰뚫어 보고 수많은 변수를 동시에 연산할 수 있는 존재다.
마치 우리가 한 권의 책을 읽듯, 시간을 초월한 구조 안에서 이미 완성된 한 편의 나를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읽어주기라도 하면 고맙겠지만, 잠깐 가볍게 보는 오락거리로 대충 넘기고 있을 수도 있다.
그곳은 어떤 세상일까?
이곳에서는 사랑, 아름다움, 의미 같은 건 눈으로 볼 수도, 무게나 길이를 잴 수도 없다.
그래서 간혹 물질적인 것들에 거세게 밀려난다. 그럴 때마다 무언가 크게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가장 중요한 것들은 꽤나 이성이 아닌, 느낌으로 먼저 온다는 직감이 있었다.
그래서 사랑이나 의미처럼 마음속 환상으로만 보이던 것들이 실은, 더 높은 차원에서 질감을 가진 실체일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더듬었다.
사랑은 특정한 색을 가진 구체, 의미는 빛과 그림자가 섞여 뒤엉킨 구조물로 실재하진 않을까.
입체를 평면으로 보는 어리석은 인간이라, 측정하지 못하고 그저 단편적으로만 느꼈다면 얼마나 큰 것을 놓쳤을까.
감정과 직감은 나에게 가장 먼저 도착하는 덜 가공된 감각이다. 간혹 직감이 계산보다 잘 들어맞는 이유는 직감이 미래로부터 역산되어 도착한 신호여서가 아닐까?
5차원 공간 속, 수많은 갈래들 중 하나가 지금 이곳에 감정의 형태로 먼저 도착하는 것이다.
만약 더 높은 차원의 시선에서 감정과 직감을 수식처럼 해석할 수 있다면, 사랑이나 직감은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식으로 미래를 가리키는 수학이겠다.
『인터스텔라』 는 내 안에 막연히 떠다니던 생각에 차원을 부여해 줬다.
만과 에드먼즈, 두 행성 중 인류의 미래가 걸린 선택 앞에서 최종 해답은 논리나 데이터가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던 그 결정이 결국 옳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들을 너무 쉽게 비논리적이라 치부해 온 것은 아닐까 되묻게 한다.
과학적 계산만으로는 전체에 다다를 수 없고, 진실은 때로 우리가 못 보는 다른 차원을 통해 도달된다는 것.
단순히 우연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순간들은 정말로 우연이기만 했을까?
마침 그곳에 있는 것들이 무작위였다고 믿기엔 세상은 너무 정교하다.
인간이 파악하지 못한 조건들을 비워둔다면, 보이지 않는 존재가 우리의 서사에 미세한 수정을 더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 존재가 미래의 나인지, 혹은 더 높은 차원의 창조주인지, 아니면 우주 그 자체인지는 알 수 없다.
논리로는 포착되지 않고, 다만 감각적으로 감지될 뿐이다.
무엇을 믿고 있는가?
본질은 지금까지의 당연함이 깨지는 순간에 있다.
그동안 진리처럼 믿어온 구조가 전부가 아님을 의심할 때, 그 앞에서 내가 작아지는 걸 느낀다면 그만큼 내 차원은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은 갈수록 날카롭고 즉각적으로 변해간다.
실제의 나보다, 타인의 타임라인 속 ‘존재물’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면 불안은 증폭된다.
그래서 신념, 가치관, 확신, 정의, 고정관념 같은 단어들을 무기 삼아 세상을 베어내고, 즉시 판단하고 곧바로 쳐낼 수 있는 힘에서 위안과 통제감을 얻는다.
그 결과, 모난 감각들만 도드라진 세상엔 혐오와 분열이 수포처럼 번졌다.
내가 사는 이곳은 거대한 누군가의 릴스 같고, 인간은 그 안의 개미 같다. 누군가의 손가락 아래, 맥락 없는 속도로 흘러가는.
인간은 개미나 물고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딘가에서는 스스로를 인지하지도 못하는 지적 생명체, 단 하나의 환경 안에 갇혀 살아가는 존재로 보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왜,
쉽게 단언하는 걸까?
0.00000000.1의 가능성을 0이라 말하지 않는 여지를 붙들 수 있다면 개방은 시작된다.
'그럴 것이다'는 그 안일한 확신을 의심하는 한 번의 머뭇거림이 차원을 넘어서는 도약이 된다. 그 도약은 이런 질문들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그게 진짜일까?
이건 불가능해— 과연 정말로 그럴까?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 누구의 시선에서?
나 자신이 어디에 경계선을 그어두고, 그 안에 나를 가두고 있는지 자주 묻게 된다. 납작한 시선으로 세계를 축소하며 가능성을 지워온 건 아닐까.
겉보기엔 납득되지 않는 구조도 위에서 내려다보면 정교한 궤도를 따라 흐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그 위를 보지 못한 채, 가능성을 감지하고도 몇 걸음 앞에서 포기하거나, 알고 보면 별거 아닌 것에 주저앉는다. 그렇지 않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인간은 놀랍도록 단순한 방식으로 가능성에 닿는다.
단 한 사람이 옆에서 “너의 삶은 찬란하다”라고 이야기해 줄 때, 그 믿음 하나로 스스로 상상하지 못한 가능성을 이뤄내는 존재다.
그런 인간에게 ‘물고기가 육지를 그리는 순간’은 언제일까?
질문 부스러기 # 12
가장 최근, 이상하게 설명할 수 없었던 순간이 있다면그것은 미래의 어떤 가능성에서 흘러나온 신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