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의 선물상자를 열 것인가

감지하지 못한 우주의 패러다임들 04.

by 슴순
“세상의 모든 건 49대 51이야.”


어린 시절, 상자를 여는 순간만큼 신나던 때는 없었다.

그 안엔 온전히 나만을 위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고, 상자가 열리는 찰나는 세상과 내가 순수하게 연결된 시간이었다.

크리스마스 날, 기대가 핀 손가락으로 서툴게 상자를 매만지다 보면 눈송이를 가까이서 보는 듯한 환한 놀람이 저절로 따라왔다.


어른이 된다는 건, 신나게 상자를 여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마음보다 상자 이면의 계산을 먼저 감지한다. 안에 담긴 물건이 거래의 규칙 없이 오로지 나만을 위한 경우는 드물다.

무엇이 들었는지 예상하지 못하는 아이처럼 놀라는 일이 적어지고, 때로는 부담이나 책임이 양껏 담긴 상자를 받는다.

모두 열고 난 뒤에는 라벨을 제거하고 고이 접어서 분리수거함에 넣어야 하는 뒤처리가 남는다.


순수함이 머물던 자리는 자라면서 프레임이 하나둘씩 대신한다. 세상을 해석할 프레임이 없는 순수한 시선이 있을 때만 만물은 놀라운 관찰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아이는 늘 궁금한 게 많다. 버스는 왜 빨리 달리는지, 간판에는 왜 그런 글씨가 쓰여 있는지.

그런 어린 시절에도 누구에게나 프레임이 생기는 첫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관측자 효과?



초등학교 과학 시간에는 강낭콩 키우기를 했다.

반 아이들 모두가 각자의 갈색 화분에 씨앗을 심고 가만히 지켜봤다. 그 시절 학교에 가는 이유는 강낭콩에 마음을 주고 정성을 다해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기 위함이 전부였을 것이다.

“내가 물을 주니까 자라. 엄청 조심스럽게 다뤄야 해.”

그때 처음으로 나도 무언가를 돌볼 수 있다는 작고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다. 아주 작은 생명이 눈앞에서 자라나는 과정은 세세히 관찰할수록 경이로웠다.


어느덧 강낭콩에 열매가 맺힐 무렵, 내 강낭콩은 선생님 손에 불려 나갔다.

선생님은 가장 높고 풍성하게 자란 것, 그리고 가장 짧고 소소하게 자란 강낭콩을 두고 성장의 예시를 보기 쉽게 설명했다.

불려간 내 강낭콩은 반 아이들의 강낭콩 중, 가장 짧게 자란 강낭콩. 풍성한 강낭콩은 집에서 매일 식물 영양제를 챙겨 오던 친구의 것이었다.


풍성한 강낭콩 옆에 바짝 붙어 있는 내 강낭콩을 바라보며 묵묵히 설명을 듣고 있자니, 데일 듯 뜨거운 마음이 일렁였다.

한 번도 작게 보인 적 없던 강낭콩이었는데, 말 한마디에 줄기가 숭덩숭덩 잘려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내 눈에도 작아 보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고 그게 가장 슬펐다.

아직 자랄 가능성과 기다림이 포개진 시선도 서열 앞에서는 ‘실패’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다.

그날이 타인의 프레임은 결코 녹록지 않음을 경험한 첫 순간일 것이다.


교실에서는 울음을 꾹 머금고 있다가 집에 가서 하염없이 쏟아냈다. 미끄럼틀에서 떨어졌을 때도, 없는 아빠를 있는 척할 때도 운 적 없었는데 말이다.

아직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거 보면 그날은 그게 그렇게 서러웠던 모양이다.

몇 시간을 울다가 말 한마디를 듣고 눈물이 뚝 그쳤다.


“세상의 모든 건 49대 51이야.”


내 강낭콩은 키는 작지만 줄기가 유독 두꺼워서, 키 큰 강낭콩보다 오래 살 거라고. 선생님 손에 들려 반 앞에 나갔다는 건, 불려 가지 않은 다른 강낭콩들보다 무대에 선 기회를 얻은 거라고.


우는 아이를 다독이는 엄마의 기지였다.

마음은 돌처럼 단단하지 않아서 단 하나의 시선만으로도 보드라워진다. 생각이 바뀌자 울음도 금세 그쳤다.

마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내 강낭콩은 정말로 마지막까지 남아 놀랍도록 오래 살았다.



어른이 되어가면서는 강낭콩이 아니라 나 자신이 직접적으로 비교당하는 일은 많아지고, 아이처럼 울 수 있는 날은 적어진다.

옆사람과 끝없이 비교되는 날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순간도 많다.

비극 속에 오래 머물다 보면 표정을 잃고, 시간 감각도 무뎌진다. 그럴 때마다 다시 사람의 형태로 돌아가 살아내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했다.


“이게 왜 나에게 일어난 걸까? “보다는

“이 안에서 나는 누구로 남을 수 있을까?”


인간에게 순도 100% 비극이기만 한 비극은 없다.

떨어졌기 때문에 가볼 수 있는 곳이 있고 다쳐서야 얻는 배움이 있다.

모든 비극은 결국 한 줄의 서사를 남겼다.

당장 좋은 결과도 나중에 어떤 결과가 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모든 건 50대 50이었고, 내가 1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49대 51이 되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것은 단순히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한 위로가 아니었다.

훗날 알게 된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양자역학은 그렇게 말한다.

현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되는 것’이라고.

관측되기 전까지 슈뢰딩거의 상자 속 고양이는 살아 있음과 죽어 있음이 포개어진 중첩 상태에 머무른다.

이 역설적인 예시는 관측한 결과가 원래부터 있지 않고 ‘관측’ 행위로 인해 결정된 것임을 보여준다.


세상에 고립된 절대적 실체는 없다. 모든 존재는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관계에서는 학생이 되고 또 다른 관계에서는 선생이 되듯, 우주의 모든 이름과 성질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 순간 맺고 있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세상은 언제나 한 끗 차이로 마음이 기울 수 있는 곳이다.

완전한 흑백, 정답과 오답이 나에게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느 쪽을 응시하느냐에 따라 열리는 확정되지 않은 세계다.

어떤 선택, 어떤 관계, 어떤 관찰을 스스로에게 하느냐에 따라서 수많은 가능성은 단 하나로 수렴한다.

그러니 내 강낭콩을 실패처럼 바라보는 그 순간, 그때가 강낭콩을 실패로 결정짓는 시점이었다. 이전까지는 가능성일 뿐이었던 것이, 실패라고 여긴 시선 하나가 그것을 현실로 만든 것이다.


세상은 불확실성 속에서 확률의 상태로 머문다. 나의 시선은 그중 하나를 실제로 굳힌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줄 것인지, 무엇을 버릴 것인지를 과감히 솎아내는 일이다.



슈뢰딩거의 선물상자



매일 불확실성과 가능성이 공존하는 상자 앞에 선다.

열기 전엔 내 세계에 아무 영향도 없지만 여는 순간 모든 게 달라질 수도, 아무 일도 없을 수도 있는.


어린 시절엔 기대로 지금은 1만큼의 의미를 찾아,

슈뢰딩거의 선물상자를 열 듯이 산다.



질문 부스러기 # 13


당신의 시선은 오늘 무엇을 존재하게 만들었나요?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