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전부 결정된 거라면

인간을 이루는 무형의 작용들 01.

by 슴순
4차원 공간에서는 우리 삶이 거대한 액자래.
과거 – 현재 – 미래의 시공간이 모두 담긴.
4차원을 보지 못하는 우리는 그 거대한 그림을
단지 ‘시간’이라는 선을 따라 지나가는 것뿐이야
평면도형을 옆에서 보면 선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 삶은 이미 그려진
시공간 전체의 단면일지도 몰라.


이 글을 보게 된 건 미리 결정된 일일까?


내 삶이 이미 하나의 스크립트로 정해져 있다면 힘이 빠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질까?

삶이 ‘결정론’이라는 논의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하지만 그 치열한 논의 속에서 결정론은 종종 운명론과 같은 개념으로 오해되곤 한다. 두 개념은 겉보기엔 비슷해 보여도 미묘하게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결정론 vs 운명론


결정론은 원인과 결과를 얘기한다. 모든 일에는 그 시작이 있고, 시작은 반드시 어떤 결과를 남긴다는 것.

지금의 나는 그동안의 모든 원인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일 것이다.

내가 내리는 선택, 감정, 방향성조차도 내 경험이 섞인 흐름 안에 있다. 선택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 마저도 결국은 원인 속에서 흘러나온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 세상이 결정론이라고 생각해서 “결말은 이미 다 정해졌으니, 난 아무것도 안 할래.”라고 한다면 결정론은 고개를 젓는다. 결정론이 말하는 건 무력함이 아니기 때문에 내 멈춤도, 움직임도 이미 인과 속에 새겨진 결정이 돼 버린다.


운명론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한다. 무슨 일이든 어차피 그렇게 된다는, 어떤 원인을 만들어도 절대 바뀌지 않는 운명을 말한다.

전체 그림을 바꾸는 건, 당연히 불가능한 일. 우리의 선택은 그저 초월적 존재가 써놓은 한 줄의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결말은 이미 다 정해진 것이니 아무것도 안 해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결정론이든, 운명론이든 인간은 아무리 생각해도 전체 그림을 볼 수 없다. 내 삶이 정해진 구조라

한들, 우리는 당장의 미지의 결과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는 ‘피투성(被投性)’으로 우주에 태어났다.

설령 세상이 오로지 내 자유만 있는 곳이라 해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많을까?



세상은 본성과 그 관성의 전부일까?



태어난 장소, 유전자, 집안 분위기 이 모든 것은 나를

구성하는 것들이지만 나는 그것들을 선택한 적이 없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는 것 위에 서서 선택해야만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도 어쩌면 환경이라는 구조가 만든 결과물일지 모른다.

이 질문을 궁금해하는 이유는 정체성에 관심이 많았고, 의미를 추구하며 세상에 아직 설명되지 않는 것들에 끌리는 지적 호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은 환경과 성장, 교육과 경험이 얽힌 초기 조건의 연쇄처럼 보인다. 유전과 환경은

철학의 뿌리를 만들고, 생각과 선택은 내 본성과 그

관성이라는 궤도 위에서 설명할 수 있다.

창의성은 내 궤도를 약간 비틀어 회전하는 방식, 반항은 반항하도록 설계된 원인의 출력.

우리는 그 정해진 궤도 안에서 각자 출발점이 다른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오르고 있다.

여기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이건 인간의 부조리야.


인간은 질문하고 세상은 침묵한다.

이때 할 수 있는 건, 포기하거나, 반항하며 계속 살아가거나. 후자는 바위가 굴러 떨어질 걸 알면서도, 다시 꼭대기로 밀어 올리길 반복하는 시지프의 삶이다.

기어이 끝까지 올리면 맨 처음으로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영원히 해내야 하는 삶은— 억울하고 공허하다.


그럼에도 내가 포기하지 않는 시지프의 삶을 택했다면, 우선 그 땅이 인과만으로 전부 설명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사는 자연은 아주 예민해서 초기의

미세한 0.01mm의 입력 차이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미래가 나타난다. 나비의 날개 짓 한 번이 지구 반대편에서 태풍을 부르듯, 자연은 단순한 질서가 아니라 카오스의 성질 위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당장 내일 날씨조차예측하기 어렵다.

자연의 미래를 바꾸는 것이 0.01mm의 물리적 차이로 가능하다면, 자연 위에 서 있는 인간의 미래를 바꾸는 것은 0.1초 정도의 무엇일까?



삶에 자각이라는 0.1초의 변수가 생기면?



질문은 행동을 바꾸고, 행동은 인간관계와 상황을 바꾼다. 그 작은 점은 마침내 시공간의 결로 흘러 사건 전체를 바꿔놓는 시초가 된다.

인간은 자신의 관성을 자각할 수 있다.

이미 그려진 별자리에서 별들 사이를 어떻게 잇고 해석할지를 선택할 능력을 가졌다. 삶이 내 손 밖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흘러가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의 의식은 그 자체를 인식하고 질문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놨다.

자각은 그 굴레를 깨뜨릴 첫 번째 변수다. 보는 행위가 대상을 바꿔놓는 관측자 효과처럼 말이다.


인생이 결정된 대로 흘러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생명력을 남긴다.

내 노력이 미래를 결정짓는 원인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여지가, 선택에 무거운 의미를 싣는다.

원인이 결과를 낳는다는 것은 시간이 직선적으로 흐른다는 전제 위의 이야기지만, 시간이 죽은 구조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적 구조 속에서 얽혀있는 ‘민감한 연결망’이라면


오늘 글을 본 것,

내가 이 질문을 던진 것,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를 주고 있는 것은

인생의 전체 그림을 바꾸는 카오스가 된다.

이걸 ’의식하는 시지프’만이 구조 밖을 볼 수 있다.



질문 부스러기 # 6


왜 자각은 단 한 번만으로 반복을 낯설게 만들까요?

‘나’는 얼마만큼의 본성(유전자), 환경(관성), 자각으로 구성되어 있나요?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