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탕그림 - 불로뉴항의 달빛, 에두아르 마네
*이번 편은, '태양계'에 이어 발행할 '달 이야기'편의 결어(結語) 부분을 사전 정리하여 미리 게재한 것입니다.
‘교교(皎皎)하다’라는 형용사가 있다. ‘달이 썩 맑고 밝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말은 어감과 뉘앙스에서 사전적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 감성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달의 아름다움과 사방에 비치는 달빛의 은은함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멋들어지게 표현하고 있다. ‘교교한 달빛’이라는 표현은, 깊은 밤 달빛이 흩뿌려 주는 은백(銀白)의 향연을 그냥 한마디에 담아내고 있다.
보름달이 환하게 뜬 밤, 그 교교한 달빛에 물든 밤의 정취는 옛 시인의 영혼마저 잠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고려의 시인 이조년*은 하얀 배꽃이 만발한 어느 봄밤, 세상으로 쏟아지는 달빛에 취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노라고 노래했다. 우리의 옛 시인은 교교하게 비치는 달빛의 서정에 밤잠을 설쳐가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고백하듯 노래했던 것이다.
[*이조년(李兆年, 1269~1343, 고려시대 문신이자 시조시인)은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에서 달이 뜬 봄밤의 정취를 노래했다.]
요즘의 우리는 달을 잊어버렸다. 너무나도 바쁜 밤의 일상과 휘황찬란한 조명에 묻혀, 달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일상의 편리함과 물질적 풍요로움의 대가로 받은 팍팍해진 삶과 도시의 삭막함 때문이다. 옛사람들이 잠까지 설쳐가며 누리고 감상하던 달빛의 교교함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낯선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이제 우리도 삶의 여유를 조금은 가져 보자. 팍팍한 삶 속에서나마 한 번씩은 자신을 되돌아보고, 또 한 번씩은 주위를 살펴볼 수 있을 정도의 여유는 가져 보자. 돌이켜보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우리네 삶이 고단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수렵과 채집으로 생명을 영위하던 원시사회부터 첨단 IT기술로 무장한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생존을 위한 삶의 서사가 치열하지 않았던 때는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근대사회 이전의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살아가야 했다. 현대인들이 향유하고 있는 안전과 질서와 존중의 가치는 조금도 누리지 못한 채, 목숨을 건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했을 뿐이다. ‘생존경쟁’이라는 냉혹한 삶의 멍에는 현대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옛사람들은 삶과 죽음의 기로(岐路)에 선 위태로운 나날들을 이어가면서도 삶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교교한 달빛을 벗 삼아 밤새 흥에 취해 가면서 말이다. 더 먼 옛날, 중국의 이태백이라는 사람은 강물에 뜬 달을 건지려 물속으로 뛰어드는 낭만 어린 객기를 부리기도 했다. 이제 우리도 조금은 여유를 가져 보자. 한 번씩 밤하늘을 바라보며 달빛에 취해보기도 하고 ‘반달배’를 타고 서쪽 나라로 여행을 떠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