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참을 수 없는 것들2

by 맑음

코끝에서 피가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허벅지 윗부분은 이미 피로 흥건히 젖었고, 더 이상 번질 곳도 없이

핏방울이 그위에

또 그위에 똑똑 떨어지고있다.

이번엔 웃옷도 지키지 못했다.

왈칵 쏟아진 코피가 앞섶을 타고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엄마가 걸레를 들고 와서는 내 코를 막아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엄마는 늘 그렇게 했다.

나는 그게 싫었다.

시큼한 걸레 냄새가 나고,

뜨끈하고, 불쾌한 느낌의 핏물이 목구멍으로 흘러들어

입 안 가득 찝지름한 피맛이 느껴지면

기분은 말 그대로 시궁창 같았다.


후남이와 베게를 가지고 놀다가 작은 창하나에 금이 갔다.

내가 열살, 후남이가 일곱살 쯤이였다.

장난감 하나 없는 집에서, 유일한 놀잇감은 베게 였다.

베게 위에 마주보고 서서 서로 밀치고, 피하는 놀이를 하다

내가 밀자, 후남이가 균형을 잃으며 창문에 부딪혔다.

은숙이 언니가 감춰 보겠다고 한지를 오려 붙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씨벌년들…”


아직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나를 노려본다.

걸레로 코피를 닦으며, 아빠를 바라보자,

“저년 눈깔봐라”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 특유의 살기 어린 눈빛에 심장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아빠의 눈엔 항상 살기가 서려 있었다.

쌍꺼풀 없이 째진 눈, 갈색같기도 하고, 어둡기도한 눈동자,

때때로 사시처럼 흔들리는 시선,

높은 매부리코와 얇은 입술은, 그를 더 매정하고, 야비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특히 나를 볼 때면, ‘눈을 쑤셔버려야겠다’는 말을 자주했다.

딸들 중에서도, 내가 아빠 눈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들 했다.

그는 그게 싫었나보다.


나도 내 눈이 가장 싫었다.

그와 닮았다는 그 말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폭력도 두렵지만, 폭언은 더 견디기 힘들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입에 담기에도 힘든 말로 모욕을 당해서 그런지

여자로 태어난 것도, 그 사람을 닮았다는 것도

죽을 만큼 싫었다.


그가 자행하던 여러 벌 중 가장 끔찍했던 건,

팬티 한 장만 입혀 골목에 세우는 벌이었다.

어두운 밤 언니와 함께 팬티만 입고 쫒겨났던 밤,

초등학교 3학년, 언니는 4학년 이였다.

집 앞 골목길 가로등 아래에 있으면 눈에 띄고,

가로등 밖에 있으면 너무 무서웠다.

같은 반 아이라도 보면 어쩌나 싶어, 가로등 에서 한발치 물러서

쪼그려 앉았던 기억이 난다.


언니는 중학생이 된 뒤에도, 봉긋해진 가슴을 팔로 가린 채

어두운 골목길에서 벌을 서야 했다.


우리는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던 걸까.


내가 기억하는건 그의 분노에는 예고가 없었다는 것이다.

시간과 장소도 가리지 않았으며,

무엇을 잘못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이유들로.


세상이 자신에게 준 모멸과 결핍,

억눌린 자존심 같은 것 들을

가장 저열하고 비참한 말로 바꿔 고스란이

어린 자식들에게 끝도없이 쏟아붓곤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숨소리마저 조심해야 했고, 잘 웃지도 못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언제 폭풍이 몰아칠지 몰랐으니.

그렇게 매일, 아빠의 기분이 날씨가 되었고,

우리는 골목길에 서있는 비닐 천막 같았다.


나는 가난보다 그런 것 들이 더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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