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아이들

by 맑음


시어머니는 순이의 첫아이 은숙을 아주 어릴 때부터 유독 예뻐했다.

점방에 가도, 시장에 가도 손을 꼭 붙잡고 다니며

"우리 손녀 좀 봐라’ 하고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피부는 희고 고왔으며, 이목구비도 오목조목 조화로웠다.

초등학교에 들어서며, 눈에 띄게 키가 자라더니,

시어머니의 많은 손주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아버지의 큰 키와 순이의 고운얼굴을

둘 다 물려받은 덕이였다.


눈빛은 총명했고, 말귀도 척척 알아들어

할머니가 무엇이 필요한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챘다.

때가되면 척 하니 커피를 타 들고 오고,

누워 있는 시어머니 곁에서 조용히

팔과 다리를 주물러 주기도 했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은숙이만 안채에서 지내게 했었다.


공부도 곧잘 해서 여상에 진학하더니,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어릴땐 순이를 닮은듯 했지만,

점점 자라며 남편과 순이 중간쯤 어디로 향하더니

평소에는 시원스런 눈매에 여유있는 표정이,

화가날땐 아비의 눈빛으로 변했다.




둘째는 세 딸 중 유일하게 외꺼풀 눈을 가졌고,

날렵한 콧과 작은 입, 얼굴형은 시댁의 여자들과 비슷했다.

키는 순이를 닮아 가장 작았고, 몸집도 마른 편이였다


진영은 짜증이 많았는데 정작 감정은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순이가 호박잎을 다듬거나 고구마순 껍질을 벗기듯

오래 앉아 해야 하는 일들을 할 때는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같이 했다. 티 내지 않고, 묵묵히.


순이가 남편 몰래 공장에 다니던 시절,

점심시간에 집에 들르면

작은 밥상 위에 밥과 국을 미리 차려놓고

기다리던 아이도 진영이였다.




셋째는 순이를 가장 많이 닮았다.


초승달 같은 눈썹에, 크게 쌍꺼풀이 진 눈, 긴 속눈썹,

자그마한 코에는 동그란 콧구멍.

토끼 이빨처럼 귀여운 앞니에, 큼직한 입까지.

셋째가 웃으면 방이 한 톤 밝아지는 것 같았다.

장난꾸러기지만 분위기를 빠르게 읽었고,

애교도 많아서 남편이 세 딸 중 가장 예뻐하던 아이였다.


항렬에 맞춰 ‘은서’라는 예쁜 이름을 지었지만,

시어머니는 다음엔 아들을 낳아야 한단는 뜻으로

‘후남’이라는 이름 으로 부르라 했다.


언니들이 학교에 가고, 순이가 남편 몰래 일하러 나가면

다섯 살이 된 후남이는 집에 혼자 있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아침마다 둘째를

두 팔로 부둥켜안고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학교 안 가면 안 돼?” 하며

큰 눈에서 눈물방울을 또르르 흘리곤 했다.


순이는 결국 집 근처 불교유치원에 보내기로 했다.

원비가 들긴 했지만, 형편을 아는 교무님이 도와 주셨다.


며칠 후 저녁, 저녁을 먹기위해 상에 둘어 앉았을 때

후남이가 작고 귀여운 입을 쭉 오므리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나무아비..관세으음살”이라고 읊조렸다.


식구들은 그 모습에 박장대소를 했다.

후남이는 더욱 신이 나서

다시 집중한 얼굴로 ‘나무아비’를 반복했고,

아이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큭큭’댔다.


그런 후남이가 조금 더 자라

가족 안에서 맡은 역할은 자연스레 정해졌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오는 밤이면,

후남이는 아무리 졸려도 아빠 옆에 앉아

어깨도 주무르고, 그가 하는 말에 대꾸를 하고, 맞장구를 쳤다.

불벼락이 떨어지기 전에, 그의 기분이 풀려

오늘 저녁만큼은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가길 바랬으리라.


아이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가족 안의 공기가 무거워지면

누군가는 그걸 걷어내야 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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