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은 그대에게
내가 정말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는 "그럼 뭐 해?"다.
나는 '집순이'다. 집 안에서 할 일을 정해두고 바쁘게 움직이는 집순이가 있는가 하면, 나는 집에서도 숨쉬기 말고는 그다지 별일을 하지 않는 정말 지독한 집순이다. 남편은 나에게 집 밖으로 나가면 머리 위에 체력 게이지가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것이 눈으로 보인다고 할 정도로 집이 편하다. 만나는 사람마다 집에서 뭐 하냐고 많이들 묻지만, 진짜로 하는 일이 없이 그저 충전 중인 보조배터리처럼 깜빡거릴 뿐이다. 누군가는 요즘 일 안 하면 바보라고, 알바라도 하라고 한다.
"꼭 뭐가 돼야 해?"
나를 걱정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못된 청개구리 심보가 튀어나온다. 자꾸 뭘 하라는걸까. 사람이 꼭 뭐가 돼야 해? 남들이 보기에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도, 내 맡은 바 할 일은 하면서 내 분수를 알고 내 생활에 만족하면 그것도 썩 괜찮은 삶 아닌가. 어느 날은 웃고 어느 날은 울기도 하면서 꼭 뭐가 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
최근까지도 하던 생각을 그 마음을 조금 달리 먹게 된 것은 얼마 전 딸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딸이 아빠에게 조용히 속삭이기를 엄마가 없으면, 나는 혼자서 밥도 먹을 수 없고 어린이집도 못 가고, 아빠 출근하면 나는 혼자인데 어떡하냐고. 그날따라 많이 지쳤었을까. 아무 의미도 없을 그 말이, 아니 오히려 엄마가 없으면 안 된다는 그 말이 왜 그렇게 서운하게 들리는지. 밥 챙겨주고 어린이집 가고 그런 건 내가 아니라도 누구나 해 줄 수 있는 건데, 할머니 할아버지도 해 줄 수 있고,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도 할 수 있는 일인데. 나의 가치가 그뿐인가. 그 밤을 지새우도록 그 말을 곱씹고 또 곱씹고 땅을 파고 들어갔다. 별것도 아니었을 그 말이 내 마음을 왜 그리 아프게 할퀴는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 밤 내가 낸 결론은 "내가 돼야겠다."였다. 다른 어느 것도 아닌 '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누군가의 배우자, 누군가의 엄마로 산 타성에 젖어 나는 나를 너무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그것이 나를 좀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단단하다면 별 것도 아닌 그 말이 나를 할퀴지 못했을 텐데. 며칠 전 예능 프로에서 한 트로트 가수의 어머님이 나오셔서 인터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어머님은 국악 가수가 꿈이었던 어렸을 적 이야기를 하시며, 크리스마스 선물을 떠올리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셨다. 하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은 저렇게 반짝이고 아름답구나! 문득 내가 뭘 좋아했는지, 뭘 하고 싶었는지, 무얼 떠올릴 때 저렇게 반짝반짝했는지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결심하게 된 것이다. 잊고 있던 '나'를 찾아야겠다. 누군가의 배우자, 누군가의 엄마로서의 삶도 나의 일부지만, 앞의 수식어 다 떼고도 남은 '나'. 다 떼고 남은 그 모습이 초라하고 볼품없더라도 상관없으니 그걸 찾아야겠다.
요즘 '헤맨 만큼 내 땅이다.'라는 말을 자주 되뇌고 있다. 처음에 들었을 때에도 오 좋은 말이네 하며, 마치 옛날 컴퓨터의 땅따먹기 2D 게임을 떠올리듯 돌아다니면서 땅을 점점 넓혀나가는 이미지를 상상했었다. 근데 요즘은 그 이미지가 그 이상으로 확장되었다. 인생이란 건 앞뒤만 있는 1차원 세계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기도 뒤쳐지기도, 하늘로 솟기도 하고 땅으로 꺼지기도 하는, 어느 날은 길을 잃고 옆으로 샜다가 또 돌아오기도 하는 복잡다면한 것이 아닐까. 막말로 관뚜껑 덮일 때까지 맞는 길인지 틀린 길인지 어떻게 알겠어. 앞인 줄 알고 경주마처럼 달리던 그 길이 사실은 잘못 들어선 길일수도 있고, 땅으로 한없이 곤두박질치는 것만 같았던 길이 하늘로 솟구치는 길일지도 모르지. 지도가 없는 이 인생 속에서 나는 지금은 어디쯤 서 있는 걸까.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걸까. 지금 시작한 이 글쓰기는 흩어져있던 나의 정보를 모으고 목표를 수정하는 나의 인생 좌표 조정이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또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찾는 이 조정 과정을 지나고 나면 조금 더 나아진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길을 잃은 그대에게, 그대 길은 잃어도 '나'는 잃지 마.
깨지고 흔들리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다시 나아갈 수 있으려면 스스로를 잃어버리면 안 되지.
힘들면 잠깐 앉았다 가더라도, 어디서고 다시 엉덩이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