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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마 Jan 03. 2023

단어 둘: 가면(persona)


가면(persona): 가면을 뜻하는 희랍어로 개인이 사회적 요구들에 대한 반응으로서 밖으로 내놓는 공적 얼굴을 뜻함



대학 시절에는 강의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려고 부지런히 돌아다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친구가 많았었다고 얘기하는 건 아니고, 혼자가 될까 무서운 나머지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아는 체하고 인사하려던 친구였죠. 이때가 '가면'이라는 것을 처음 쓰게 된 날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모두 각자의 가면이 있습니다. 과거에서부터 가면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고, 그 첫걸음은 매우 사소한 순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모두가 다른 상황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한 번쯤은 가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쭈글쭈글한 마음을 숨기고 싶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해 가면을 썼던 것 같습니다. 낡고 해져버린 신발의 밑창과 같은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필요한 나에게 스스로를 마주할 용기를 내야 하는 것도 불편했습니다.



인생의 답안지를 알고 있고 있었다면 더 나았을까. 인생의 오답을 빨간펜으로 쓱 지울 수 있었더라면 좀 더 달라진 모습으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매일 밤마다 하게 됩니다. 세상에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어서. 크고 번듯한 무언가가 되지 못한 내가 부끄러워서, 숨고 싶고, 잘못한 게 있어서 그런지 차곡차곡 가면을 쌓아가게 됩니다.


내가 아직 어린 건지. 어떤 용기가 아직 없는 건지. 지금 이 순간을 무사히 넘어가는 것만이 중요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잠을 깨고, 이 날 하루하루를 그저 조용히 보내는 것이 목표인 내게, 가면을 쓰는 일은 의외로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라 부지런함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깊숙한 내면의 감정을 들키기 싫어서, 약점을 잡힐까 싶어서, 너무나 많은 이유로 꾸며진 말들을 횡설수설하게 됩니다. 몇 개의 신발을 장만하고는 스타일에 따라 바꿔 신는 듯한 기분. 너덜너덜해진 밑창과 함께 낡은 신발 한 켤레만 들고 어울리지도 않는 말들로 나를 꾸며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 때에는 왠지 온몸이 굳어버리는 듯, 패배감에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때때로 상황에 따른 노련함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극복하기 어려운 일이 많으니 상황에 맞게 타협하는 게 중요하다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보다 다른 사람이 어떤 말을 원하는지 생각해 보라고. 그 노련함들을 눈대중으로 가늠하고 내 그릇에 담아내다 넘칠 때가 있습니다. 여유롭게 척척 쌓아가려고는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금세 엉망이 되어 망가져버린 그릇은 어떻게 해야 할지. 바닥에 깨진 조각들을 줍고, 치워가면서 제 그릇의 크기를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소화할 수 있는 '사회성'이라는 것은 다르고, 그 양을 가늠하는 것도 생각보다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내 그릇의 크기를 착각할 때도 있지만 '이 것밖에 안되나'라는 생각에 내가 가늠한 이 크기를 인정하기 싫은 마음도 있었네요.



별 것 아닌 말도 어설프게 흉내 내다 망칠 때도 많아, 이젠 어떤 일이든지 괜찮은 척할 때가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 된 것 같습니다. 인생의 엇박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식욕과 식사량, 마음과 행동의 간극에서 무사히 하루가 끝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묵힌 감정들을 비우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일순간 상한 감정을 쏟아내기 싫어 스스로 '괜찮다'라는 말로 다독이는 하루. 오래되어 상한 음식, 낡고 해진 신발의 밑창과도 같은 자신(약점)을 어쩌지 못해 고민하는 날.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던 케케묵은 것들이 마음에 쓰레기가 되어 쌓인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가끔은 쌓여왔던 감정을 마주하고 비워내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쓰레기는 바로 버려야 다음 날에 미련을 두지 않게 되니까. 그래서 일상에서의 한 순간순간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곤 하죠. 언제나 마음이 모자람이나 넘침이 없이 조금이나마 홀가분하게 살 수 있길 바라니까.


가면을 쓴다면,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양을 가늠하고, 그 양껏 즐길 수 있어야 마음의 탈이 없지 않을까. 마음의 무게라곤 한 줌밖에 없는 내가, 어느 감정이든 하나하나 감당하기엔 어려워 매일 밤 부지런히 케케묵은 신발 밑창을 닦고 마음의 쓰레기 통을 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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