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을 사유하다는 것

앙도시토즈와 에그조시토즈의 변무를 통한 조화로움에 관하여

by 엉클디

세상은 쉼 없이 숨쉰다.

대지는 저 깊은 뿌리로부터 기운을 들이마시고, 하늘은 무한한 광휘를 내뿜는다. 들숨과 날숨, 숨결의 리듬. 이것은 단지 생물학적 과정이 아니다. 삶 전체의 진폭이며, 우주가 우리를 통해 들고나는 춤이다.


여기서 우리가 묻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물음이 있다.

“만물이 숨을 쉰다는 이 진실이, 과연 우리의 공간을 어떻게 바꾸는가?”


이 물음은 어느 날 문득, 세포의 가장 작은 움직임 속에서 출현한다. ’앙도시토즈(endocytose)’와 ‘에그조시토즈(exocytose)’—들어오고 나가는 세포의 활동. 학술 용어는 낯설지만, 이 리듬은 익숙하다. 이는 마치 우리의 들숨과 날숨, 바다의 밀물과 썰물, 계절의 윤회처럼 순환한다. 공간 또한 그러하다. 텅 빈 공간은 순간순간 채워지고, 다시 비워진다. 이 채움과 비움의 반복이 곧 우주의 숨결이며, 그 공간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공간디자인은 단순한 배치의 문제가 아니다. 형태를 채워넣는 행위는 오히려 하나의 파동(oscillation)—즉 리듬의 현현(顯現)이다. 파동이란 무엇인가? 물리학적 개념으로는 에너지의 전달 양상이며, 철학적으론 존재의 흔들림이다. 생명은 늘 떨리고 흔들리며, 그 떨림이 곧 ‘살아있음’의 증표다.


예술가는 이 떨림 위에 서 있다.

“하늘을 갖고 논다”는 말은 단지 시적인 수사가 아니다. 이는 스스로를 비움으로써—텅 빈 사람이 됨으로써—자연의 질서와 호흡을 같이한다는 의미다. 예술가는 병풍 같은 하늘과 땅을 무대로 삼아, 북을 치고 춤을 춘다. 북소리 하나가 단순한 리듬이 아닌, 공간 전체를 진동시키는 ‘파동’이 되는 순간. 이때 공간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다. 무대다. 살아 있는 현장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교의 고전, 『역경(易經)』의 “계사전(繫辭傳)”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하늘과 땅은 서로 짝이 되어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

이 말은 우주의 창조 원리이자, 모든 디자인의 근간이 된다. 하늘과 땅이 마주하고, 그 사이에 인간이 서서 ‘격물치지(格物致知)’—사물을 깊이 탐구하고 앎에 이른다. 여기서 ‘격물(格物)’은 단지 관찰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에 이르는 행위다. 공간디자인에서의 소재, 구조, 배치 또한 바로 이 ‘격물’의 행위로 볼 수 있다.


공간은 물건을 채워넣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리듬을 짓는 일이다.

이것은 단순한 미감(美感)의 문제가 아니다. 진실에 다가서는 방법이며, 결국 ‘선(善)함’과도 연결된다. 여기서의 ‘선함’은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무위자연(無爲自然)—곧 인위가 개입하지 않은 자연의 본성을 뜻한다. 그 본성에 가장 가까운 자리는 바로 ‘텅 빈 사람’이다. 욕망을 비우고, 생각을 멈추며, 자연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상태. 이 상태에서야말로 공간은 진실로 ‘살아 있는 장소(place)’가 된다.


‘무위(無爲)’는 하지 않음이 아니라, 억지로 하지 않음이다.

비워진 상태에서 솟아오르는 창조적 에너지를 맞이하는 자세, 이것이 진정한 디자인의 출발점이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곳에서, 신비로운 가능성이 움튼다. ‘변무(變無)’—끊임없이 변하는 무한한 없음. 이는 곧, 진정한 생성의 현장이다.


디자인이란, 공간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가 아니다.

공간의 파동을 감각하고, 삶의 리듬을 오롯이 담아내며, 사유가 흐르는 길을 여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하나의 조율자(orchestrator)이다. 빛과 공기, 소리와 그림자, 형태와 허공. 이 모든 것들이 북소리에 맞춰 춤을 출 때, 공간은 캔버스가 아니라 연주 무대가 된다. 살아 있는 연기자들의 춤사위가, 우리 존재의 깊은 진동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디자인은 학문이기도 하고, 수행이기도 하다.

질문을 품고, 물음을 포개며, 끊임없이 사유한다.

“공간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그 안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

이 질문은 단지 공간계획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에 대한 탐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실험해야 한다.

리듬을 감각하고, 파동을 들으며, 북소리에 맞춰 허공 속을 걸어야 한다.

그 여정의 끝은 항상 ‘선-함’에 다다른다.

왜냐하면, 모든 숨결의 최종 도착지는 ‘조화’이기 때문이다.


홍익대 유진형 교수의 담론 가운데 이 글이 잉태되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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