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만물의 척도인가, 세계의 무늬인가?

프로타고라스에서 사용자 중심 디자인까지, 인간 중심 사유의 여정에 대하여

by 엉클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 선언인가, 질문인가?


한 시대를 꿰뚫는 문장은 반드시 하나의 선언이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질문이어야 하지 않을까?

프로타고라스의 그 유명한 문장,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Man is the Measure of All Things)”는 단지 인간의 위상에 대한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근원적 전환을 촉발한 고대의 파열음이었다.

만물이란 무엇이고, 척도란 무엇이며, 인간이란 또 무엇인가?


소피스트들은 “진리”보다는 “경험”에 주목했다. 그것은 “앎”이란 결국 어느 누구의 입장에서도 동일하게 보장된 보편이 아니라, 주어진 맥락과 감각에 따라 구성되는 상대적 질서라는 고백이었다.

이런 태도는 고대의 지식체계에 균열을 내었고, 플라톤은 그것을 참을 수 없어 했다.

그는 『테아이테토스(Theaetetus)』에서 프로타고라스를 비판한다. “만약 모든 진리가 개인의 감각에 의존한다면, 너와 나 사이에 어떤 대화도 불가능해지지 않겠느냐?”라는 반론.

그런데, 바로 그 지점이 중요하지 않을까?

진리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과, 누가 그것을 말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 말이다.


결국, 프로타고라스는 단순히 인간을 중심에 놓자는 게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가 곧 세계의 형상이 된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만든 것이다.

이는 단지 주체 중심적 선언이 아니라, 인식과 존재의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전제로 한다.


만물의 척도로서의 인간은, 세계를 측정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세계 속에 잠겨 있는 감각의 존재이기도 하다.



경험의 시대로: 인간 중심 사유의 근대적 전환


세월은 흐르고 문명은 바뀌었다. 기계가 움직이고 자본이 팽창하는 시대, 인간은 다시금 중심에 선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이제 인간은 세계를 해석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조작하고 설계하는 존재로 자리 잡는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기계적 효율”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측정 가능한 행동”을 기준으로 정의된다.

그렇게 ‘척도’는 더 이상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경제적 함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냉랭한 세계에도 한 줄기 질문은 남아 있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디자인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응답하듯 20세기 후반, 도널드 노먼(Don Norman)은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이라는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그는 《일상 속의 디자인(The Design of Everyday Things)》에서 인간의 실수는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라고 말한다.

디자인은 결국 인간의 직관, 기억, 움직임, 감정을 깊이 고려해야 하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 중심의 시작이라는 메시지였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금 프로타고라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말은, 이제 다시 살아난다. 하지만 그 척도는 수치화된 인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감각’과 ‘맥락 속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다시 말해, 인간 중심적 사유는 ‘인간이 세계를 정의한다’는 오만한 명제가 아니라, ‘인간의 삶이 곧 세계의 맥락이라는 체험의 진실’이 되는 것이다.



존재의 중심, 혹은 세계의 접힘: 하이데거의 전환


여기서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사유를 경유해보자. 그는 인간을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라 규정했다. 이는 곧 인간이 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를 인간이 “있음으로써” 성립시킨다는 말이기도 하다. 세계는 단지 인간 바깥에 놓인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 양식에 의해 지속적으로 접히고 펼쳐지는 장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도구는 단지 쓰임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손길을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 존재다. 망치는 단지 못을 박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에 관계를 맺는 방식의 한 형태이다. 따라서 디자인이란, 곧 존재론적 실천이다. 인간이 어떻게 세계를 경험하고, 그 경험을 통해 어떤 감각의 구조를 형성하느냐에 따라, 세계는 다른 형상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프로타고라스의 말은 다시 뒤집힌다. 인간은 ‘세계의 척도’가 아니라, ‘세계의 무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세계 위를 흐르며, 감각의 잔물결을 남긴다. 그리고 그 무늬는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흔적이다.



디지털 시대의 인간성: 최적화의 역설과 감각의 재구성


오늘날 우리는 또 다른 전환기에 서 있다. 인공지능(AI), 데이터 기반 알고리즘, 자동화된 일상. 이 새로운 환경은 인간을 중심에 두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역설적이다. 우리는 점점 더 ’개인화’된 서비스를 누리지만, 그것은 사실상 ‘예측 가능한 인간’이라는 전제를 전제로 한다.


이때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말은, 다시금 경고처럼 들려온다. 그 말이 이제는 “기계가 인간을 척도로 삼는 시대”를 향한 비판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칫 인간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표준화된 데이터로 환원하는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사용자 중심 사유는 이제 다른 차원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필요를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경험이란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되묻는 일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곧 인간이라는 존재를 ‘타자와 함께 구성된 생명적 리듬’으로 이해하려는 열린 태도로 이어진다.



인간 중심을 넘어서: 공감의 사유, 공존의 디자인


이제 묻자. 인간 중심적 사유는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그것은 ‘사람을 위한 기술’이나 ‘편리한 인터페이스’를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감각의 복수성(plurality), 삶의 다양성(diversity), 그리고 존재들의 상호성(inter-being)을 향해야 한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아니다. 인간은 그저, 세계 속에서 무늬를 이루는 하나의 결일 뿐이다.


그 결은 다른 결과 얽히고, 부딪히고, 다시 태어난다. 디자인은 그 접힘과 펼침의 언어다. 사용자 중심이란, 인간의 주체성을 복원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주체성의 경계가 타자의 숨결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그려지고 있다는 진실을 수용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제 프로타고라스의 말은 이렇게 다시 써야 하지 않을까?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그러나 그 척도는 단 하나의 눈금이 아니라, 무수한 경험과 감각, 기억과 관계가 교차하는 살아 있는 그물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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