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자유로운 존재에 대한 옹호
어느 날, 무심코 펼쳐진 책 한 구절이 가슴에 맺혔다.
“나는 뇌가 아니다.”
그 문장은 마치 낯선 별의 언어처럼 다가왔다. 처음엔 이해하려 애썼고, 그다음엔 그저 가만히 품었다. 마치 오래된 우물 속의 물결이 천천히 안쪽에서부터 밀려오듯, 그 말은 내 안에서 아주 오랜 시간 울렸다.
우리는 매일, 뇌로 살아간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후회하고, 또 기대한다. 그 모든 과정은 뇌의 작용이라 했다. 요즘은 감정조차 신경전달물질의 일종이라 한다.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우리를 사랑하게 만들고, 질투하게 만들며, 불안을 키우는 화학 물질들. 그 모든 이름들이 우리를 이해한다고 믿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종종, 숨을 멈춘다.
정말, 그것이 전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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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군가의 체온에 울었던 적이 있다.
한겨울에 고개 숙인 나무를 보고 눈물 흘린 적이 있다.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그저 그 순간의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뇌의 작용만은 아니었음을, 나는 몸으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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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의 그 문장은, 단호하지만 슬프다.
나는 뇌가 아니다.
그 말은 뇌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삶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지금껏 우리가 살아낸 고통과 침묵과 사랑이 너무 거대하고, 너무 아득하다는 것을
그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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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마음’이라는 단어는 종종 물처럼 다가온다.
모양이 없고, 고정되지 않고, 담는 그릇에 따라 흘러가고,
때로는 증발하고, 때로는 얼어붙는 것.
장자가 말한 좌망(坐忘), 즉 자기를 잊는 마음이란, 그런 마음이 아닐까.
‘나’조차 허물고 흐르는, 텅 비어 있으나 깊은,
그런 공간 같은 것.
불교는 ‘무심’을 말한다.
모든 번뇌와 생각을 지우고 남은 투명한 자리.
그곳엔 뇌의 회로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뇌를 넘어선 어떤 생의 고요가 있다.
어쩌면 그것은—우리가 인간으로서 끝내 다 닿지 못하는 곳,
그러나 순간적으로 스치고 가는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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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속에서, 우리는 매일 무수한 이미지와 목소리에 떠밀린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생각들, 느끼지 않아도 되는 감정들이
우리 뇌를 끊임없이 두드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에서 우리는 공허해진다.
정보는 많아지는데, 침묵은 사라지고, 고요는 흩어지고.
그때, “나는 뇌가 아니다”라는 말이 속삭임처럼 들린다.
나는 그저 계산하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기다릴 줄 알고, 침묵할 줄 알고, 고통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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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동양철학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 말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우주와 호흡을 맞추며 스스로 흐름이 되는 존재라고.
수양이란, 스스로를 다스리는 일이 아니라,
자기라는 테두리를 허물고 더 큰 질서 속으로 녹아드는 일이라고.
가만히 있는 것, 비워내는 것, 잊는 것, 그 모든 행위가
삶의 가장 깊은 자리에 닿는 길이 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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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묻는다.
정말로 나는 뇌인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내가 다시는 걷지 못할 거리를 떠올릴 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을 때—
그때의 나는, 뇌인가? 아니면, 더 크고 더 아득한
‘존재의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빛’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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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은 인간의 자율성을 말한다.
나는 그것을 ‘기억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상처를 기억하고, 부드러움을 기억하고,
잊히는 것들을 오래 품고 살아가는 것.
그 기억이 쌓여 삶이 되고, 시가 되고,
때로는 한 사람을 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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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을 오늘도 다시 읊조린다.
나는 뇌가 아니다.
나는,
비 오는 날 길가에 핀 들꽃을 보며 멈춰 서는 사람이다.
나는,
다시는 오지 않을 누군가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이다.
나는,
누군가의 고요한 눈빛 앞에서 울음을 삼키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나는, 뇌가 아니다.
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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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닿는 그 어딘가에서
당신 역시 당신의 내면에서 같은 말을 속삭이고 있다면
그건 뇌의 작용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당신이 인간이라는 증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