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포던스디자인으로 덜어냄의 공간 미학으로 접근하기
어느 지역의 지하철 환승역에서 갈아탈 때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참을 서성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지긋지긋한 도시의 삶......"
사방에 널린 안내판들. 1번 출구, 2번 출구, 화장실,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친절하다 못해 과잉 친절한 표지들이 오히려 나를 더 헷갈리게 만들었다. 마치 인생에서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깨달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덜어내는 용기였다는 것을.
요즘 지하철역은 참 친절해졌다. 어디든 안내판이 있고, 점자도 있고, 다국어 표시도 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친절할수록 더 헷갈린다.
이게 바로 '인지 과부하'라는 거다. 뇌과학자들이 말하길, 우리 뇌는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오면 오히려 판단력이 떨어진다.
마치 수십 개의 반찬이 차려진 밥상 앞에서 뭘 먹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것과 같다. 차라리 김치찌개 하나가 확실할 때가 있지 않나.
그런데 가끔 신기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안내판을 보지 않고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몸이 알려줄 때 말이다.
바닥의 촉감이 바뀌거나, 조명이 밝아지거나,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달라질 때. 이런 걸 '어포던스'라고 한다는데, 쉽게 말하면 '공간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신호'다.
마치 숲속에서 길을 찾을 때 나무의 결이나 이끼의 방향을 보고 방향을 잡는 것처럼. 우리 조상들이 그랬듯이, 몸의 감각으로 길을 찾는 것이다.
좋은 디자인이란 설명이 필요 없는 디자인이다. 마치 좋은 스승이 말로 가르치지 않고 등을 보여주는 것처럼.
일본의 어떤 지하철역은 안내판이 거의 없다. 대신 바닥의 색깔이 조금씩 바뀌고, 벽의 질감이 달라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길을 헤매지 않는다. 공간 자체가 길잡이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덜어냄의 미학'이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면 정말 중요한 것이 보인다. 마치 조각가가 돌덩어리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어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생각해보니 지하철 환승역은 우리 인생과 닮았다. 수많은 갈래길이 있고, 어디로 가야 할지 선택해야 하고,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한다.
그런데 중요한 건 더 많은 정보나 안내판이 아니라, 내 몸의 감각을 믿는 것이다. 어떤 길이 편안한지, 어떤 방향이 자연스러운지 몸이 안다.
삶도 마찬가지다. 너무 많은 조언, 너무 많은 정보에 휘둘리지 말고, 정말 중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덜어내자. 그러면 길이 보인다.
덜어내기의 진짜 목적은 여백을 만드는 것이다. 여백이 있어야 자유가 있다. 빽빽하게 채워진 공간에서는 숨쉬기도 힘들다.
지하철역도 마찬가지다. 안내판과 광고판으로 빽빽한 공간보다, 여유롭고 한눈에 들어오는 공간이 훨씬 편하다. 그런 공간에서 사람들은 더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우리 삶도 그렇다. 스케줄로 빽빽한 일상보다, 여유로운 시간이 있는 삶이 더 풍요롭다. 그 여백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좋은 공간이란 몸이 기억하는 공간이다. 머리로 외우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공간 말이다.
그런 공간에서는 안내판이 없어도 길을 찾을 수 있다. 마치 집에서 화장실을 찾을 때 불을 켜지 않아도 찾아가는 것처럼.
지하철 환승역이 그런 공간이 되면 좋겠다. 복잡한 전쟁터가 아니라, 몸이 편안하게 기억하는 공간으로. 그런 공간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덜어냄의 미학, 그것은 결국 삶의 지혜다.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 무엇을 남길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오늘도 선택의 기로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