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월 말 또는 5월 초
이 무렵, 일도 하고 싶고 문화생활도 즐기고 싶은 욕구가 커져 가던 시기였다. 꿈은 이 상황에 대해 무의식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잘 보여준다.
남편과 남편친구는 바닷가에 있고 나는 바다에 면한 도로에 서 있다. 남편과 친구는 서로 감정이 격해져 둘이 한 판 붙어보자며 물속으로 사라진다.
바다에 이미 들어가 있는 다른 남편 친구도 한 명 있다. 나는 걱정이 되어 그에게 둘을 좀 말려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그는 둘이 싸우는데 말리면 본인도 위험해져 싫다고 한다.
한참이 지나도 남편과 친구가 물속에서 나오지 않자, 상황이 어떤지만 알려달라고 다시 부탁한다. 그 부탁도 들어주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지난다. 나는 걱정이 커지고 조마조마하며 어쩔 줄 몰라한다.
한참 후 남편친구가 물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승리의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손을 흔든다. 들어갈 때와 달리 물속에서 얼굴을 내밀었을 때 머리와 물 밖으로 나와있는 상체 모두 하얗게 변해 있었다. 남편은 나오지 않는다.
사각 모서리, 시멘트와 바다가 만나는 곳에 무언가 있는 느낌이 든다. 손을 넣어 건진다. 남편 반바지이다. 난 더 불길한 느낌이 든다.
꿈에서 나와 반대되는 성은 나의 아니무스, 즉 나의 남성적 측면이다.
두 사람은 육지에서 티격태격하다 제대로 한 판 붙기 위해 바닷속으로 뛰어든다. 육지는 자아(ego), 의식, 언어, 질서가 있는 세계이다. 반면 바다는 무의식, 원초적 힘, 무질서의 공간이다. 육지에서 싸운다면 서로 논리를 내세우며 옳고 그름을 따졌을 것이다. 이 둘의 싸움은 논리의 싸움이 아니라 감정의 싸움이다. 그래서 바닷속으로 뛰어들며, 또한 의식의 공간에 있는 나의 통제를 벗어나게 된다. 어떻게 진행되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꿈이 무척 의도적으로 배치한 장면이다.
꿈속에 두 아니무스가 대립하는 장면은 지금 내가 현실에서 겪고 있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바라보는 남편은 권위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아이들과 관련된 이야기에서는 소통이 되지 않는다.
나 또한 아이들 앞에서는 그런 모습들을 보인다. 이런 남편에 대해 나는 기대를 접기로 한다. 대신 나 한 몸을 돌볼 수 있는 경제적 독립을 위해 시도를 해본다.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도 부정적인 남성성을 내려놓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남편은 내가 지니고 있는 아니무스가 투사된 것이다. 경제적 독립을 향한 나의 새로운 시도와 그동안 해보지 않던 경험의 도전은 남편의 친구로 등장한다. 남편과 그 친구는 한 판 붙을 수밖에 없다.
나는 이 둘의 싸움이 무척 두렵다. 기존 방식대로 머물자니 갑갑하고, 앞으로 나아가자니 막막하다.
처음부터 물속에 있었던 남편 친구. 싸움을 말려달라는 부탁을 거절한다. 본인도 위험해지기 때문에 말릴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육지에 있는 나의 또 다른 나, 무의식의 바다에 있는 '나'이다. 그렇기에 그 위험은 곧 내 위험을 뜻한다. 말리면 안 되는 싸움이다. 상황만 봐 달라는 부탁도 거절한다. 봐준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견뎌야 하는 몫이다.
이미 바닷속에 들어가 있던 남편 친구는(무의식의 나) 무심한 듯한 구경꾼 같아 무척 섭섭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있음으로 해서 나(의식의 나)는 불안을 말할 사람이 있었고, 견딜 수 있었고, 내가 물속으로 뛰어들려고 했다면 아마 막아섰을 것이다. 나를 보호해 주는 느낌이다.
승리의 흰 깃발을 흔들듯이 온통 흰색으로 변해 나타난 남편 친구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손을 흔든다. 마치 내가 반겨주기라도 할 것처럼.
속이 보이지 않는 출렁이는 물결을 보며, 팔딱팔딱 뛰는 심장, 앞이 안개 낀 듯 뿌옇게 변한다. 내가 간절히 원했고, 부정적인 아니무스를 잘 보내기를 바랬건만 나는 새로운 승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
경제적 독립도, 기대 접기도 분명 나의 성장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반발과 분노가 먼저였다. 남편과의 단절. 이런 승리는 내가 원했던 게 아니다. 그래서 난 꿈에서 그 웃음에 반응하지 못했고, 상대가 흔드는 손은 공허한 손짓이다.
나는 남편의 반바지를 들어 올릴 때, 남편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안다. 가슴이 찢어진다. 부정적 아니무스를 증오심으로 보내는 것은 다가 올 새로운 아니무스를 받아들이는데 방해가 된다. 융이 말했듯, 그림자는 증오가 아니라 통합되어야 한다. 분노로 베어낸 부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깊은 곳에 억압될 뿐이다.
따듯하게 이별을 하지 못하고 결투로 끝내버린 상황에서 반바지를 건져 올린다. 몸이 상징하는 남성적 에너지는 끝났지만, 그 에너지가 남긴 삶의 태도나 방식을 물속에서 끄집어낸다. 애도를 잘하기 위한 유물이 필요하다.
아무리 싫었던 관계라도 익숙했던 패턴과 이별은 힘들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상황도 새로운 것이면 낯설기 마련이다.
분노에서 출발한 이별이다. 옛것은 완전히 나를 떠나지 않았고, 승리는 내 것으로 통합하지 못한 상태이다. 서툴고 불안정한 길 위에 있다.
떠나보내지 못한 파편, 건져 올린 반바지를 든 채 다음 여정의 길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