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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경 Oct 26. 2022

이토록 순수하고도 명징한 기다림

갔다, 거기로 : 너와 함께 가서 더 좋았다   # 11


그 언덕에 앉아서 노을을 기다렸다.

그저 노을만을 기다렸다.

어른이 된 후 이런 기다림은... 처음이었다.


기다림이 없었다면 사는 재미가 무얼까, 하고 생각해 본 적 있다.

살게 하는 힘.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어쩐지 난 그게 꼭 기다림 같다. 기다리는 희망, 그런 것.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는 어서 나와 내 품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림.

아이가 통통한 배를 바닥에 대고 쭉쭉 밀면서 온 집안을 기어 다닐 때는 너 어서 일어나 걷기를 기다림.

데굴데굴 구르며 우는 아이를 기어이 어린이집에 떼어 놓고 돌아서 나올 때는 얼른 커다오, 하고 기다림.

수험생 아이의 시커먼 얼굴을 볼 때는 빨리 입시가 끝나기를 기다림.

엄마가 된 후에는 줄곧 아이를 기준점에 세워 두고서 기다렸다.

그러느라 오직 나를 위한 삶, 그런 것을 생각하거나

그것을 위해 기다리는 일 같은 것들이 불가능했지, 싶다.




이 여행을 시작할 때 나의 아이는 취업이 되기를 기다리는 준비생이었고,

나는 하루 빨리 걔가 원하는 직업 속에 정착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엄마였다.

우리 둘의 기다림은 아주 흔하고 계산적이며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그런 그림이었다.




등짝이 서늘해지는 숙소의 골목을 쭉 걸어나가 역 앞으로 간 아침은 하늘이 블루였다.

새털 구름 몇 개가 오락가락하는 청명 블루.


“우리 아침 뭐 먹어?”


“포르투에서의 첫 아침은 에그타르트여야 합니다. 여기는 그게 유명하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에그타르트는 디저트인 거 아냐?”


“엄마의 아침은 원래 커피 아닌가?”


“그렇긴 하지.”


“커피에 에그타르트면 배가 터진다고 하실 겁니다.”




찐득하게 내려진 풍미 좋은 커피와 달걀찜의 식감처럼 보들 폭신한 에그타르트.

걔의 말대로 내 몫의 아침식사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입안이 행복해지게 맛있었고.

포르투가 에그타르트 잘하네. 찐이네.

더욱이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아침 볕 아래 앉아서 먹었더니 정신까지 충만해진 기분이 되었다.

역시 사람은 햇볕을 많이 먹으면서 살아야 된다! 하고 인정.




“너는 오늘 나를 어디로 데려갈 계획이야?”


“언덕.”


“언덕?”


“포르투에 오면 언덕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게 정통 코스니까.”





포르투는 절벽 같은 도시. 기함하고 쓰러질 각도의 가파른 언덕길이 툭하면 등장하기 때문에

언덕으로 갈 거라는 걔의 말이 별로 신선하지도 않았다. 조금만 걸어도 하암, 하암,

한숨이 나오는 그런 언덕투성이기 때문에.




시내를 설렁설렁 돌아다니다가 푸르스름한 4시 반? 5시?

걔가 나를 트램이 막 지나다니는 동루이스 다리를 지나 언덕으로까지 끌고 올라갔다.

모루공원. 그래, 모루공원이었다.


“와! 강이다. 너무 이쁜 강!”


언덕 꼭대기의 거기로 다다르자 사람들이 마치 영화 보러 온 것처럼 강을 바라보며 모여앉아 있었다.

다들 맥주 한 잔씩 옆구리에 끼고서. 나도 맥주를 차고 그들 사이에 앉았다.



“해 지는 거는 슬픈데.”


내가 말했다. 그러자 걔는 말했다.


“해 지는 거는 이쁘지요. 내일이면 또 해가 뜰 건데 뭐가 슬픕니까요.”


래.  말이 맞다.”


둘이서 말 따먹기를 하면서 3시간 넘게 앉아 있었다. 가을 바람이 좀 차서 오들오들 떨기도 하면서

굳이 기다렸다. 해가 지기를. 겨우 그것을. 밥이나 빵도 아니고, 화장품도 아니고,

사는 데 전혀 득이 되지도 않는 그것을!

기다림.

결코 순수할 수가 없는 어른이 된 이후로는 단지 해가 지는 것 따위를 보기 위해

그렇게나 막막하게 한참을 기다려 본 것이 처음이었지, 싶다.




“하! 아쉽다. 날이 흐려서 진짜 이쁜 석양이 안 나왔습니다. 내일 다시 와야 해요.”


“내일 또 3시간을 이러자고?”


“싫으십니까, 어머님?”


“아니, 내일은 두꺼운 옷 입고 올래. 너무 추웠어.”


꿀꺽 해가 넘어가는 드라마틱한 풍경은 흐린 날씨 탓에 놓쳤지만 그래도 좋은 기다림이었다.

마음에 좀 여백이 생긴 것도 같았고.





석양을 다시 보러 가자고, 해가 서랍 속으로 들어가듯 강물 속으로 쑤욱 들어가는 걸 기어이 보자고

이튿날, 아이는 팔순 노모처럼 낑낑 걷는 나를 데리고 거기로 갔다.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들, 개미떼처럼 모여앉은 사람들. 나는 좀 의아해서 아이에게 물었다.


“해가 지는 걸 보는 게 이렇게까지 중요한 문제니?”


“뭐... 그렇진 않겠지만 마음이 천진한 사람들은 해 뜨고 해 지는 게 감동인가 보더라구.”


아이의 말을 듣는데 문득, 나도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천진한 사람, 천진하게 맑은 어른.


구름진 날의 해질녘과는 빛과 색이 달랐다. 하늘 맑은 날은 해가 지는 것도 마치,

통장에 돈 들어가듯 분명하게 찍히더라.


“근데 엄마, 오늘 이걸 봤으니까 포르투에서 볼 건 다 본 거야.”


아이의 잘난 척하는 설명을 들으며 천천히 그 언덕을 돌아내려오던 길.



“근데 엄마, 그거 알어?”


“뭐를 알아야 하지?”


“한강에도 이거 있거든. 이렇게 빨갛게 해지는 거. 그런데 볼 틈이 없는 거지. 엄마가 그 한강을.”


“그래, 그렇구나. 그랬었지.”


“엄마가 이렇게 비싼 돈 내고 여기 온 거는... 하늘 쳐다볼 시간을 가지는 거. 아마 이걸 걸!”



그래, 그래! 그랬다.

오렌지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와아!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아마 그랬을 것 같았다.


- 다음 회에 계속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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