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유럽과 성공한 동아시아

훨씬 더 깊고 강력하게 작동한 유교 문명의 공산주의

by 김욱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류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했다. 이 급진적인 이념은 이후 동유럽과 동아시아라는 두 개의 주요 지역으로 확산되었지만, 흥미롭게도 공산주의는 두 지역에서 전혀 다른 운명을 맞았다.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뿌리내린 방식과 그 생명력의 차이는, 오늘날 세계 질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동유럽의 공산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배경으로 이식된 측면이 강했다. 나치 독일을 몰아낸 소련의 붉은 군대는 동유럽 각국에 그대로 주둔하며 자국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지에 세워진 공산 정권들은 모스크바의 지지를 받는 소수의 현지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었고, 그 권력의 기반은 자국민의 지지보다는 소련의 탱크와 정치적 후원에 있었다. 이처럼 외부의 힘에 의해 인위적으로 수립된 체제는 시작부터 근본적인 취약성을 안고 있었다.


결국 억압된 민심은 1956년 헝가리 혁명, 1968년 '프라하의 봄', 1980년대 폴란드 자유노조 운동과 같은 거대한 저항으로 터져 나왔다. 비록 이 봉기들은 소련의 군사력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었지만, 동유럽인들의 마음속에 공산주의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깊이 새겨 넣었다. 마침내 1989년, 소련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동유럽 전역의 공산 정권은 마치 도미노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고, 그 본산지인 소련마저 1991년 해체되며 유럽에서 공산주의 실험은 막을 내렸다.


반면, 동아시아의 공산주의는 훨씬 더 자생적이고 전투적인 과정을 통해 권력을 쟁취했다. 중국의 공산당은 1921년 창당 이후 수십 년간의 대장정과 두 차례의 국공내전을 거쳐, 스스로의 힘으로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베트남은 더욱 치열했다. 그들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본, 프랑스,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대국들과 무려 30년간 전쟁을 치른 끝에 통일을 이룩했다. 북한 역시 해방 직후 소련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 이전부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 무장 세력이 국가 건설의 핵심 주체였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공산주의는 외부의 주입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맞선 끈질긴 민족 해방 투쟁과 내부의 격렬한 사회 혁명 속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탄생 배경의 차이는 냉전 종식 이후 두 지역의 운명을 극명하게 갈라놓았다. 유럽의 공산주의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반면, 동아시아의 공산 국가들은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중국과 베트남은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는 유지하면서도 과감한 개혁·개방을 통해 시장경제를 받아들였고, 이를 통해 전례 없는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특히 중국은 이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 국가로 부상하며, 경제, 외교, 기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 질서를 재편하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선언했던 자본주의의 최종 승리, 즉 '역사의 종언'은 적어도 동아시아에서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어째서 공산주의는 그것을 잉태한 서구에서 실패하고, 이질적인 문명인 동아시아에서 이토록 강력한 성공을 거두었는가? 산업혁명과 계급투쟁이라는 유럽의 역사적 맥락에서 태어난 이념이, 어째서 수천 년간 유교적 농경 사회를 유지해 온 동아시아에서 더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공산주의가 동아시아에 도착했을 때, 이 지역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유럽의 기독교 문명은 식민지 확장을 통해 자신들의 힘을 외부로 투사했지만, 문명의 중심부 자체가 붕괴되는 경험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공산주의는 기존 질서에 대한 하나의 '급진적 대안'이자 내부의 '도전'이었다.


하지만 19세기 말 동아시아 유교 문명은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서 그야말로 총체적으로 붕괴하고 있었다. 영국과의 아편전쟁, 그리고 그 결과로 맺어진 난징조약과 베이징 조약 등 연이은 충격은 단순히 군사적 패배를 넘어, 수천 년간 세계의 중심이라 믿어왔던 문명적 자부심과 세계관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경험이었다. 하늘의 아들(天子)이라 여겼던 황제는 무력했고, 성인의 가르침이라 믿었던 유교적 질서는 더 이상 국가를 지켜주지 못했다. 이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거대한 사상적 공백과 정신적 공황을 안겨주었다. 기존의 모든 것이 실패한 상황에서, 그들은 국가를 구원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울 강력한 대체 이념을 필사적으로 찾아야만 했다.


바로 이 거대한 문명적 공백 속으로 공산주의가 들어왔다. 유교가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정치 제도, 사회 규범, 교육, 윤리 등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총체적 시스템'이었던 것처럼, 공산주의 역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모두 아우르는 '총체적 이념'이었다. 즉, 공산주의는 동아시아에서 단순히 새로운 정치 이념 중 하나로 수용된 것이 아니라, 붕괴된 유교 문명의 빈자리에 들어와 새로운 세계관과 사회 시스템 전체를 재건하는 '대체 문명'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이것이 공산주의가 유럽에서보다 동아시아에서 훨씬 더 깊고 강력하게 작동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다.



한국 문명 아홉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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