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문명은 왜 공산화를 택했을까?

공산혁명은 유교 문명의 자기 변혁

by 김욱

일본이 서구 문명의 충격에 발 빠르게 혁신의 길로 들어선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아시아의 다른 유교 문명권 국가들의 변화 과정은 험난하고 고통스러웠다. 일본의 유교가 메이지 유신이라는 사회 개혁의 동력으로 작용했던 반면, 한국, 중국, 베트남에서는 유교가 오히려 기득권의 견고한 방패로 작용하며 개혁을 가로막았다. 이들 국가에서 유교는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왕조와 지배 질서를 유지하는 이념적 기둥이었다. 유교 경전의 지식을 통해 관료가 되고, 그를 통해 부와 권력을 독점해 온 사대부 지배계층에게 근본적인 개혁은 곧 자신들의 존재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였다. 이처럼 강력한 유교적 구체제를 외부의 충격만으로 극복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을 넘어서는 데는 보다 깊은 사상적 전환과 훨씬 더 강력하고 지속적인 내부적 동력이 필요했다.


중국은 아편전쟁의 패배 이후 1860년대부터 '양무운동(洋務運動)'이라는 이름으로 유교 질서 내에서의 개혁을 시도했다. '중국의 몸에 서양의 기술을 접목한다‘는 중체서용(中體西用) 구호 아래, 유교적 정신과 제도는 유지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과 군사제도를 도입해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다. 서양식 군수 공장을 세우고, 신식 학교를 설립하고, 젊은 인재들을 유학 보내는 노력이 이어졌다. 하지만 서구 문명의 핵심인 민주주의, 법치, 개인의 자유와 같은 가치는 배제한 채 껍데기만 빌려오려는 시도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한계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의 참패로 처참하게 증명되었다.


양무운동의 실패가 명백해지자, 캉유웨이와 량치차오 같은 젊은 개혁가들은 1898년 광서제의 지지 아래 더욱 근본적인 '변법자강운동(變法自疆運動)'을 추진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입헌군주제 도입, 의회 설치 등 광범위한 정치·사회적 변혁을 시도했지만,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의 '무술정변' 쿠데타로 불과 103일 만에 좌절되었다. 개혁의 희망이 꺼져가던 바로 다음 해, 이번에는 민중들 사이에서 '부청멸양(扶淸滅洋)', 즉 '청나라를 도와 서양 오랑캐를 무찌르자'는 구호 아래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제국주의에 대한 이들의 분노는 비과학적인 믿음과 무분별한 폭력으로 이어졌고, 결국 서구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연이은 개혁의 실패는 청 왕조가 더 이상 국가를 이끌 능력이 없음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19세기 말 조선의 상황도 중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884년,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힘을 빌려 일으킨 갑신정변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채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단 3일 만에 허무하게 끝났다. 10년 뒤인 1894년에는 관리들의 수탈에 맞서 수십만 명의 농민이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켰다. 한때 전주성을 점령하며 기세를 떨쳤으나, 이 역시 외세인 일본군의 무력 개입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엘리트 주도의 위로부터의 개혁과 민중 주도의 아래로부터의 혁명 모두 기득권과 외세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오랜 실패와 좌절의 흐름은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으로 마침내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쑨원의 삼민주의 사상에 고취된 혁명가들이 들고일어나, 2천 년 이상 지속된 황제 지배 체제를 종식시키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탄생시켰다. 비록 신해혁명은 이후 군벌의 난립으로 혼란을 겪으며 미완의 혁명으로 남았지만, 낡은 왕조 시대를 끝내고 근대 국민 국가로의 전환을 알린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혁명적 흐름 속에서, 유교 문명권 전체를 뒤흔드는 새로운 사상이 강력한 대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공산주의였다. 낡은 유교 질서에 절망하고 서구식 개혁의 한계를 목격한 지식인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몇 가지 거부하기 힘든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그것은 역사의 발전을 설명하는 '과학적' 이론처럼 보였다. 둘째,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서구 열강의 침략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민족 해방 투쟁에 강력한 정당성을 부여해주었다. 셋째, 유교가 그랬던 것처럼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모두 아우르는 '총체적인 세계관'을 제공하며, 낡은 세계를 대체할 새로운 세계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 새로운 사상의 거대한 물결은 1919년 한반도에서 시작된 3·1 운동을 계기로 폭발적인 힘을 얻는다. 학생과 민중이 주체가 되어 식민 통치에 저항한 이 거대한 독립운동은, 두 달 뒤 중국의 5·4 운동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 5·4 운동은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민족 운동인 동시에, "공자를 타도하자(打倒孔家店)"는 구호가 등장할 만큼 유교 전통과의 완전한 단절을 외친 사상 혁명이기도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유교 문명의 공산주의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5·4 운동을 계기로 마르크스주의가 급속히 퍼져나갔고, 2년 뒤인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에도 영향을 미쳐 1925년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


이미 19세기 말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베트남에서도 변화의 바람은 거셌다. 청년 호치민은 민족 해방의 길을 찾아 유럽을 떠돌다 공산주의를 접했고, 이를 베트남 독립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인식했다. 그는 1930년 베트남 공산당을 창립하며, 끈질긴 민족주의와 강력한 공산주의 조직론을 결합한 독자적인 혁명 노선을 구축했다.


이후 동아시아는 냉전의 격랑 속에서 거대한 공산주의 혁명의 무대가 되었다. 중국에서는 두 차례의 국공내전 끝에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은 공산당이 대륙 전체를 차지했고, 베트남은 기나긴 독립 전쟁 끝에 프랑스와 미국을 차례로 몰아내고 공산주의 통일을 이루었다. 한반도는 비극적인 분단의 결과 북쪽에 공산주의 국가가 들어섰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찌감치 이 흐름에서 벗어났고, 남한은 미국의 개입으로 공산화를 피할 수 있었지만, 유교 문명권의 세 나라는 공산주의 혁명의 길을 택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유교 문명권의 공산화는 단순한 서구 이념의 수입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십 년간 이어진 내부 개혁의 실패와 외세 침략이라는 고통 속에서, 낡은 유교 질서를 극복하고 새로운 근대 국가를 건설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특히 마오쩌둥이 도시 노동자가 아닌 '농민'을 혁명의 주체로 삼아 성공한 것이나, 호치민이 공산주의를 '민족 해방'의 도구로 재해석한 것처럼, 이들은 공산주의라는 외래사상을 자신들의 고유한 역사적 경험과 언어로 재창조하는 혁신의 과정을 거쳤다. 이는 유교 문명이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며 새로운 미래를 열고자 했던, 가장 격렬하고 거대한 자기 변혁의 시도였다.



한국 문명 여덟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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