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동력이 된 일본 유교
지난 장에서 우리는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 문명의 압도적인 힘 앞에 놓인 유교 문명권의 위기와 그 대응을 살펴보았다. 아편전쟁의 충격적인 패배는 유교 문명권 전체에 거대한 질문을 던졌다. 유교 문명은 스스로의 전통적인 시스템을 어떻게 혁신하여 근대화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이 절체절명의 질문에 가장 먼저 자신만의 해답을 내놓으며 새로운 시대의 돌파구를 연 것은 바로 일본이었다.
흔히 유교 문명권으로 한국, 중국, 베트남, 일본 네 나라를 꼽지만, 이 중에서도 일본의 역사는 독특한 궤적을 그려왔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수백 년간 유지했던 다른 세 나라와 달리,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 이래 약 700년간 분권적인 봉건 제도를 유지했다. 일본은 유학으로 선발된 문신 관료 대신 세습 무사 계급인 사무라이가 지배층을 이룬 점, 현재까지 천황제가 존속한다는 점, 그리고 고유 신앙인 신토가 정신적 기반을 이룬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언뜻 보면 유교 문명이라 부르기 어려울 만큼 이질적인 요소가 많다. 과연 일본을 유교 문명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는 일본 근대화의 상징적 인물, 요시다 쇼인에게서 찾을 수 있다. 요시다 쇼인은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주로 영웅시되는 인물이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가장 존경한 인물로도 유명한 그의 본질은, 다름 아닌 열렬한 유학자였다. 그는 쇼카손주쿠(松下村塾)라는 작은 사숙을 열어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그 명단에는 일본 최초의 총리이자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기도 다카요시,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메이지 유신의 설계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쇼인은 유교의 핵심 가치인 '충(忠)'을 막부가 아닌 천황에게 바쳐야 한다고 가르치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과격한 행동주의를 주창했다. 그의 사상은 유교가 어떻게 혁명의 무기로 변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사례다.
물론 이러한 사실만으로 일본 전체를 유교 문명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본 근대사를 움직인 동력의 중심에 유교가 자리하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일본은 7세기 견당사를 통해 중국 문물을 활발히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유교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불교가 융성했던 일본 사회에서 유교는 지배 사상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일본에서 유교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17세기 에도 막부 시대, 조선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주자학이 통치 이념으로 채택되면서부터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중대한 변화의 계기가 임진왜란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의 성리학자 강항은, 적국의 포로라는 어려운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의 높은 학문에 감복한 일본 지식인들에게 주자학의 정수를 전파했다.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후지와라 세이카는 강항에게 직접 가르침을 청했다. 그리고 그의 수제자인 하야시 라잔은 스승의 학문을 이어받아, 주자학을 도쿠가와 막부의 공식 이념으로 확고히 정착시켰다. 라잔은 주자학의 핵심 가치인 충(忠)과 예(禮)를 통해 막부 중심의 공고한 신분 질서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에도 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일본 사회 전반으로 깊숙이 확산되었다. 막부는 쇼헤이자카 학문소(昌平坂学問所)를 설립해 유학 교육을 총괄했고, 전국 250여 개의 번(藩)에서도 번교(藩校)를 세워 사무라이 자제들에게 유학을 가르쳤다. 또한, 수많은 사숙(私塾)이 문을 열어 신분의 벽을 넘어 폭넓은 계층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러한 광범위한 교육의 결과, 당시 일본의 문해율은 50%에 육박했다. 이는 당시 유럽 평균인 30%를 훌쩍 뛰어넘는 것은 물론, 가장 교육 수준이 높았던 영국이나 독일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처럼 비옥한 지적 토양은 19세기 서구 열강의 거센 도전에 맞서 일본이 신속하고 강력한 사회 변혁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일본 유교의 정점은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메이지 유신에서 폭발했다. 메이지 유신은 표면적으로 서구화를 지향하는 듯 보였지만, 그 내용을 깊이 파고들면 유교적 가치에 기반한 사회 혁명이었다. 에도 시대의 유학 교육을 통해 지성과 비판 의식을 함양한 하급 사무라이와 지식인들이 혁명의 중심 동력이었으며, 그들이 내세운 정신적 토대는 천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忠), 부모에 대한 효(孝),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예(禮)와 같은 유교 이념이었다. 특히 1890년에 발표된 '교육칙어'는 충효와 같은 유교 덕목을 모든 국민이 암송하도록 강요하며, 유교 이념을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를 만드는 핵심 도구로 활용했다. 가장 늦게 유교화되었던 일본이, 유교적 가치를 사회 변혁의 엔진으로 삼아 일대 혁명을 이룩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다른 유교 국가들은 일본처럼 유교 이념을 사회 개혁의 동력으로 활용하지 못했을까? 그 답은 일본의 강점이 다른 나라들의 약점과 맞닿아 있다는 역설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 중국, 베트남은 일본보다 훨씬 오랫동안 공고한 유교적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바로 그 강력한 전통이 변화에 저항하는 족쇄가 되었다. 이들 국가에서 유교는 국가의 '운영체제(OS)' 그 자체였고, 기득권 관료층은 이 시스템을 유지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지켜왔다. 근본적인 개혁은 기득권층의 권력 기반인 운영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유교에 대한 보수적인 해석을 고수하며 변화에 저항했다.
반면, 일본에서 유교는 국가의 '운영체제'라기보다는 '응용 프로그램'에 가까웠다. 분권적인 번 체제와 무사 계급이라는 특성상, 유교는 사회 전체를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했다. 특히 막부의 권위를 견제하는 상징적 존재인 천황이 있었기에, 막부는 유교 이념을 독점할 수 없었다. 개혁 세력은 '충(忠)'의 대상을 천황으로 돌린 유교 논리로 막부를 타도하고, 유신 이후에는 같은 논리로 천황 중심의 새 질서를 구축했다. 이처럼 유교는 혁명의 무기이자 동시에 질서의 기반이 되는 역설적 역할을 한 것이다. 일본에서 유교는 특정 기득권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었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해석과 혁신적인 활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다른 유교 국가와 달리 일본이 유교를 통해 혁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전통의 딜레마'를 비껴갈 수 있었던 독특한 역사적 조건 덕분이었다. 일본의 사례는 하나의 사상이 그것이 놓인 사회적 맥락에 따라 어떻게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유교는 일본에서 혁명의 동력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지역에서 단지 낡은 과거의 유산으로만 머무른 것은 아니었다. 비록 그 방식은 달랐을지라도, 이후 한국과 중국, 베트남에서도 유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역동성을 발휘하며 사회 변혁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이제 시선을 돌려, 유교가 깊이 뿌리내렸던 이들 국가들이 각자 어떤 방식으로 근대화의 도전에 응하고 자신들만의 길을 개척해 나갔는지 살펴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