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휩쓸었던 중국의 시누아리즈와 일본의 자포니즘
유럽과 동아시아는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양쪽 끝에 자리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인류 역사의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실체가 불분명한 ‘미지의 세계’로 인식했다. 1~2세기경 비단길을 통해 이루어진 간접적인 교류로 서로의 존재를 어렴풋이 인지하기 시작했지만, 상상조차 하기 힘든 물리적 거리와 견고한 정치·문화적 장벽은 두 문명의 본격적인 만남을 오랫동안 가로막았다.
박물학자 플리니우스는 로마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판하며, ‘세레스(Seres)’라 불리는 동방의 먼 나라에서 생산되는 비단을 언급했다. 안개처럼 부드럽고 값비싼 이 직물은 로마에 신비로움과 부유함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 먼 나라는 물론 중국이다. 같은 시기 중국의 『후한서』에는 ‘대진국’이라는 이름으로 로마 제국이 묘사된다. 백성들의 신장이 크고 정직하며,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궁전을 장식하고 사치품을 즐기는 부유한 나라로 그려진다. 실제로 2세기경 한나라에 대진국 사절이 도착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그들이 가져온 교역 물품과 이동 경로를 볼 때, 이들은 로마 황제의 공식 사절이라기보다는 길 위에서 이익을 좇던 중개 상인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초기의 만남은 현실보다는 상상과 신화가 뒤섞인 안개 속의 풍경과 같았다.
두 문명이 보다 명확한 실체로 서로를 마주하게 된 것은 13세기, 세계사적 대격변을 몰고 온 몽골 제국의 등장 덕분이었다. 칭기즈칸과 그의 후예들이 유라시아 대륙을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묶자, 수만 킬로미터에 달하던 실크로드는 비교적 안전한 하나의 길이 되었다. 바로 이 길을 따라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는 원나라의 수도에 당도할 수 있었고, 무려 17년간 그곳에 머물며 중국 황제를 섬겼다. 유럽으로 돌아온 그는 구술을 통해 『동방견문록』이라는 책을 남겼다. 황금으로 지붕을 덮은 궁전, 수많은 배가 오가는 거대한 운하, 그리고 종이로 만든 돈이 통용되는 체계적인 사회. 그의 이야기는 유럽인들에게 동방이 더 이상 신화 속의 땅이 아닌, 실재하는 풍요와 질서의 문명임을 각인시켰다. 이 책은 훗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포함한 수많은 탐험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대항해시대를 여는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본격적인 문명 간의 접촉은 16세기, 포르투갈 선단이 동아시아의 바다에 닻을 내리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무역 거점을 확보하며 동아시아 곳곳에 영향을 미쳤고, 이들의 배에는 상인뿐만 아니라 새로운 영혼을 구원하려는 뜨거운 열망을 품은 예수회 선교사들도 함께 타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유럽의 과학과 기술, 사상을 동아시아에 전달하는 중개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마테오 리치와 같은 예수회 선교사들은 정교한 전략을 구사했다. 그들은 무작정 복음을 전파하는 대신, 유학자의 복장을 하고 유교 경전을 익히며 중국의 지식인 사회에 접근했다. 그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당대 유럽의 최신 과학 기술이었다. 천문학, 수학, 지도 제작술, 그리고 스스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시계(자명종)는 명나라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중에서도 천문학과 역법 계산 능력은 황제의 권위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에게 정확한 달력을 반포하는 것은 통치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핵심적인 의례였기 때문이다. 서양 과학의 우수성을 통해 신임을 얻은 선교사들은 마침내 황실의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었고, 동시에 유교 사상과 중국의 정치 제도, 예술을 상세히 기록하여 유럽에 소개했다.
유럽의 지식인 사회는 이 새로운 지식에 열광했다. 특히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격신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성과 도덕을 통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공자의 사상에서 합리적 윤리의 이상적인 모델을 발견했다. 볼테르는 세습 귀족이 아닌 과거 시험을 통해 관료를 선발하는 중국의 시스템을 예로 들며 프랑스의 낡은 신분 제도를 비판했다. 이처럼 유교는 기독교 중심의 유럽적 가치관을 상대화하고, 종교를 넘어선 보편 윤리의 가능성을 탐색하게 하는 중요한 지적 자극이 되었다. 이러한 동경은 귀족 사회의 문화 전반으로 퍼져나가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는 독특한 예술 양식을 낳았다. 도자기, 가구, 회화, 정원에 이르기까지, 유럽인들이 상상한 중국의 이국적인 아름다움이 18세기 예술계를 휩쓸었다.
그러나 두 문명의 우호적이었던 교류는 ‘전례 논쟁’이라는 격렬한 종교적 충돌로 인해 큰 위기를 맞는다. 예수회는 중국의 전통 의례인 조상 숭배와 공자 숭배를 종교적 행위가 아닌, 사회적 효와 존경을 표하는 문화적 관습으로 간주하여 허용해야 한다는 ‘적응주의’ 노선을 택했다. 하지만 경쟁 관계에 있던 도미니크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이를 명백한 우상숭배라며 교황청에 문제를 제기했다. 수십 년에 걸친 논쟁 끝에, 결국 교황청은 예수회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조상 숭배를 금지하는 교황의 칙령은 중국 문명의 근간을 부정하는 행위로 비쳤고, 이는 강희제의 엄청난 분노를 샀다. 결국 모든 선교사들은 추방되었고, 100년 넘게 쌓아온 교류의 탑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일본 역시 일찍부터 서양 문명과 조우하였다. 이 시기를 '남만(南蠻) 무역 시대'라고 하는데, 1543년 포르투갈 상인들이 탄 배가 규슈 남쪽의 다네가시마에 표착하면서 그 막이 올랐다. 이때 전해진 화승총은 일본 전국시대의 전쟁 양상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이 신무기의 잠재력을 가장 먼저 간파한 사람이다. 그는 나가시노 전투(1575)에서 조총 부대를 활용한 혁신적인 전술로 당대 최강의 다케다 기마군단을 격파하며 통일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상인들의 배가 실어온 것은 비단 총뿐만이 아니었다. 1549년,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하비에르가 가고시마에 상륙하여 처음으로 크리스트교의 씨앗을 뿌렸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무역의 이권을 연결고리 삼아 규슈 지역의 다이묘(영주)들을 개종시키는 데 성공했고, 한때 신자 수가 수십만 명에 이를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이러한 교류는 무기나 종교뿐만 아니라 음식(카스텔라, 덴푸라의 어원), 미술(남만화), 천문학, 의학 등 다방면에 걸쳐 일본 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17세기 초, 기독교 세력이 결집한 ‘시마바라의 난’을 겪으며 일본의 막부는 기독교의 폭발적인 영향력에 큰 위협을 느끼게 된다. 결국 막부는 기독교 포교를 전면 금지하고 포르투갈인들을 추방하며 쇄국 정책의 빗장을 걸어 잠갔다. 이후 오직 네덜란드 상인들에게만 나가사키의 작은 인공섬 데지마에서의 제한적인 교류가 허용되었다. 바로 이 작은 창을 통해 유입된 서양 학문이 일본의 근대를 준비하는 ‘난학(蘭學)’의 불씨를 지폈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네덜란드어를 배워 서양의 의학, 천문학, 물리학 서적을 탐독했고, 특히 인체 해부학 지식은 전통 의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계기를 마련했다. 쇄국의 시대 속에서 꾸준히 축적된 난학의 지식은 19세기 일본이 서구 열강의 도전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빠른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다.
일본도 유럽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명나라의 멸망으로 한때 중국의 도자기 수출길이 막히자, 유럽은 그 대체재로 일본의 도자기에 눈을 돌렸다. 일본 도자기는 유럽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때,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포장하는 종이로 사용된 일본의 포장지에 그려진 풍속화 ‘우키요에’도 유럽 화가들의 눈에 띄게 된다. 이전까지 서양 미술에서 본 적 없는 과감한 구도, 강렬한 색채, 그리고 귀족이나 성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우키요에는 클로드 모네와 빈센트 반 고흐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엄청난 시각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는 ‘자포니즘’이라는 문화 열풍으로 이어졌고, 서양 미술이 수백 년간 이어온 사실주의와 고전주의의 전통에서 벗어나 근대 미술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영감을 제공했다.
이처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때로는 우호적으로 때로는 적대적으로, 두 문명은 서로에게 깊은 충격과 자극을 주며 점진적으로 관계의 밀도를 높여갔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영국의 군함이 발포한 아편전쟁의 포성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이제 두 문명의 관계는 문화적 호기심이나 종교적 접촉을 넘어, 제국주의적 침략과 저항, 근대와 전통의 격렬한 충돌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