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문명 서사를 찾아라(서론)

문명적 자기혐오에 빠진 한국

by 김욱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 역사학자 프레더릭 잭슨 터너는 《미국 역사에서 프런티어의 중요성》이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미국의 정체성이 단순히 유럽에서 이식된 것이 아니라, 광활한 서부를 개척하는 프런티어 경험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유럽의 제도와 관습에서 벗어나 거친 자연을 직접 마주한 경험은, 미국인에게 강인한 개인주의와 실용주의, 낙관주의, 민주적 평등의식이라는 고유한 국민성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터너의 '프런티어 테제'는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인들은 이 논제를 통해 자신들의 국가 정체성을 뒷받침하는 문명 서사를 비로소 자각하고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주장은 정치, 교육, 문화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며, 미국인의 자아 이미지와 국가 정체성의 핵심 틀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900년, 미국에서 또 하나의 문명 서사가 등장했다. 일본의 지식인 니토베 이나조가 영어로 써서 출판한 『부시도 : 일본의 혼』(Bushido : The Soul of Japan)란 책이다. 이 책은 미국은 물론 서유럽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며 서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미국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책을 극찬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읽어보라며 수십권을 나눠주기도 했다.


니토베는 부시도(武士道)를 단지 전쟁의 기술이나 가혹한 규율이 아니라 사무라이의 정신적·도덕적 기반임을 강조했다. 무사도를 충(忠), 의(義), 용(勇)과 같은 고결한 덕목들로 구성된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삶의 방식으로 제시했다. 서양의 기사도와 비교하면서, 무사도가 결코 열등한 문화가 아니라 서구와 대등한 수준의 문명적 가치 체계임을 강조했다.


이 책은 일본을 바라보던 서구의 시각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부시도를 통해 일본은 명예와 도덕, 규율을 중시하는 문명국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이렇게 서구에서 먼저 인정받은 '부시도'는 1908년 일본에 역수입되어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국민적 정체성을 갈망하던 당시 일본은 이를 국민 도덕을 함양하는 핵심 텍스트로 적극 활용했다. 이 책의 저자인 니토베 이나조는 훗날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4년부터 2004년까지 20년간 일본의 5000엔 지폐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터너의 프런티어 테제와 니토베의 부시도는 단지 한 학자의 주장이나 개인의 사상에 그치지 않았다. 이 두 문명 서사는 19세기 후반, 세계 무대에 급부상하던 두 신흥 강국—미국과 일본—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문명적 위상을 세계에 천명하기 위해 선택한 국가적 서사 전략이었다. 두 나라는 이를 통해 대외적으로는 문명국으로서의 위상을 알리고, 내부적으로는 국민적 통합과 자긍심을 이끌어냈다.


두 나라의 사례는 현재 한국에게 강한 시사점을 준다. 오늘날 한국은 그 시기의 미국이나 일본 못지않게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국가다. 산업화 이후 이룬 눈부신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성취, 그리고 한류로 대표되는 문화적 영향력까지 더해져, 한국은 이제 세계 무대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세계적 위상을 떠받칠 만한 문명적 자의식과 서사는 아직 부재하다. 우리가 누구이며, 인류에게 어떤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문명인가에 대한 설명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한국도 문명서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일본과 미국의 전철을 그대로 밟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부시도』는 일본 제국주의의 군사적 팽창과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악용되었다. 미국의 개척자 서사는 원주민 학살과 군사적 팽창을 정당화 했다. 서구와 일본의 문명 서사들은 고귀한 이상을 내세우면서도, 그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타자'를 억압하고 희생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중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만들어갈 문명 서사는 미국과 일본의 모델을 넘어서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 '강함'을 증명하는 서사가 아니라 '성숙함'을 보여주는 서사여야 한다. 상대를 정복하는 능력이 아니라 타자를 끌어안는 포용력, 세상을 지배하는 기술이 아니라 아픔을 공감하고 치유하는 지혜,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문명 서사다.


세계가 보내는 뜨거운 찬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독자적인 문명 서사를 세우기는커녕 아직도 '서구의 장학생'이라는 초라한 자화상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그 근원적인 이유는 우리가 우리 문명의 뿌리를 이루는 두 개의 거대한 기둥—유교와 조선—을 스스로 혐오하기 때문이다. 조선은 가난하고 무능했으며 당파싸움에 허송세월하다 외세에 의해 무너진 왕조로 폄하되고, 유교는 역동성을 상실한 채 사농공상의 낡은 질서를 강요한 고리타분한 사상으로 치부된다. 우리는 유교와 조선을 ‘정체’, ‘수구’, ‘비합리’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곧 근대화이자 진보라 여겨왔다. 그 결과, 우리 스스로 문명 서사의 뿌리를 잘라낸 것이다.


따라서 한국 문명의 올바른 서사를 구축하기 위해 먼저 이루어져야 할 작업은 우리 내면 깊숙이 각인된 문명적 자기혐오를 걷어내는 일이다. 우리가 우리 문명의 자존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지금 이뤄내고 있는 어떤 찬란한 성과도 결국 타인의 해석 체계 안에 포획될 것이다. '미국의 도움', '서구 모델의 성공적 수용' 등으로 번역된 외부 서사는 한국의 주체적 경험과 문명적 축적을 단순한 수혜와 모방으로 환원시켜버린다. 한류를 우리가 스스로 잘 믿지 못하고, 때로는 자학적 시선으로 냉소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구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과의 나열이 아니라, 그것을 엮어내는 문명 서사다. 서사로 엮어내지 못하는 성취는 그저 파편적인 사건으로 기억될 뿐,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문명적 동력이나 자산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그 문명 서사를 탐색하고 세우려는 시도다.


우리는 왜 그토록 '빨리빨리'를 외치며 속도에 집착할까?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에 가까운 완벽주의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식당에서 처음 보는 분에게 스스럼없이 '이모', '삼촌'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계산대 앞에서 서로 자기가 내겠다며 아름다운 실랑이를 벌이는 풍경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유독 한국 드라마에는 평범한 소시민이 주인공인 '비영웅 서사'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공연장에서 팬들은 왜 약속이나 한 듯 '떼창'으로 하나가 될까? 한국의 팬덤은 왜 유독 스타의 도덕성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할까?


유교와 조선에 덧씌워진 편견의 먼지를 걷어내면, 그 안에 깃든 문명적 사유의 토대가 드러나고, 그 중심에 놓인 핵심 키워드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후에 익숙했던 일상적 풍경들도 더 이상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문명적 서사로 읽히기 시작한다. 그 서사를 통해 우리는 한국 문명의 고유한 결을 이해하게 되고, 지금까지 이룬 성취들 역시 오랜 축적의 결과였음을 새롭게 자각하게 된다. 이제, 우리 스스로를 다시 바라보는 이 흥미롭고 뜻깊은 여정을 시작해보자. 이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한국 문명, 그리고 우리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한국 문명 첫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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