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문명은 동에서 서로 이동했나

문명 이동의 핵심 동력은 바다

by 김욱

약 1만 2천 년 전, 지구를 뒤덮었던 기나긴 빙하가 서서히 북쪽으로 물러나면서 인류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차가운 대지가 녹고 온화한 기후가 찾아오자, 지구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한 녹음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수만 년 동안 채집과 수렵에 의존하며 떠돌았던 인류는 비로소 한곳에 뿌리내릴 가능성을 발견했다. 바로 이 시기, 현재의 이라크에서부터 시리아, 레바논을 거쳐 이집트 시나이 반도에 이르는 드넓은 호(弧) 모양의 땅,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문명의 서곡이 울려 퍼졌다. 인류는 이곳에서 야생의 밀과 보리, 렌즈콩과 같은 식물들을 심고 가꾸는 법을 터득했다. 이어서 들판을 뛰어다니던 야생 염소, 양, 소는 인간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귀중한 단백질과 노동력을 제공하는 가축이 되었다. 왜 하필 이곳이었을까? 작물화와 가축화에 적합한 생물종의 원산지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행운이었다.


이러한 농업 기술의 발전은 수천 년에 걸쳐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잉여 생산물이 생겨나자 모든 사람이 식량 생산에 매달릴 필요가 없어졌고, 기술자, 성직자, 군인과 같은 다양한 직업이 등장했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마을은 도시로 성장했고, 마침내 기원전 4500년경,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동쪽 끝,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만나는 비옥한 삼각주, 메소포타미아에서 수메르 문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메르인들은 우르, 우루크와 같은 인류 최초의 도시들을 건설하고 그 주위에 거대한 성벽을 쌓았다. 그리고 ‘쐐기문자’를 발명했다. 갈대 줄기 끝을 뾰족하게 다듬어 젖은 점토판에 꾹꾹 눌러쓴 이 기호들은 단순한 거래 기록을 넘어, 복잡한 법률 체계를 만들고, 방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행정 시스템을 구축하며, 신과 영웅의 이야기를 담은 문학을 탄생시키는 문명의 운영체제(Operating System)가 되었다. 문자의 발명은 지식의 축적과 전승을 가능하게 했고, 시공간을 초월한 소통의 길을 열었다. 수메르인들은 또한 바퀴를 발명하여 무거운 짐을 손쉽게 옮기고 교역을 촉진했으며, 60진법을 사용하여 시간을 1분, 1시간 단위로 측정하고 원을 360도로 나누는 등 현대까지 이어지는 수학적, 천문학적 기틀을 마련했다. 지금은 많은 부분 사막으로 변해버렸지만, 고대의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이 실어다 주는 영양분으로 매우 풍요로운 땅이었다. 하지만 사방이 탁 트인 개방적인 지형은 외부의 침입에 취약했다. 아카드, 아시리아, 고바빌로니아, 신바빌로니아 등 수많은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다채롭고 역동적인 층위를 만들어나갔다.


한편, 메소포타미아와 멀지 않은 곳, 나일강 유역에서는 이집트가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집트의 나일강은 매년 어김없이 찾아오는 규칙적인 범람으로 대지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축복의 원천이었다. 이 예측 가능한 풍요 속에서 이집트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살아있는 신 파라오를 정점으로 한 신정일치 사회는 그들의 절대적인 권력과 영생에 대한 믿음을 거대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같은 불멸의 건축물로 증명해 보였다. 이집트 문명의 핵심은 ‘지속성과 통일성’이었다. 동서로는 닿을 수 없는 사막, 남쪽으로는 거친 폭포, 북쪽으로는 거대한 바다로 둘러싸인 폐쇄적인 지형 덕분에 메소포타미아처럼 끊임없는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리지 않았다. 그 결과 이집트는 수천 년간 외부의 방해 없이 내세에 대한 깊은 신앙을 바탕으로 한 독특하고 안정적인 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다. 나일강의 범람 시기를 정확히 예측하려는 노력은 천문학과 역법의 발전을 이끌었고, 영혼이 돌아올 육신을 보존하기 위해 미라를 만드는 복잡한 과정은 인체의 구조에 대한 이해와 외과적 의학 기술의 발전을 촉진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탄생한 이 두 문명은 후대 문명을 위한 거대한 초석을 놓았다. 그들이 개발한 농업 기술, 관계 시스템, 도시 계획, 법률 체계, 종교적 사상은 이후 등장할 모든 문명에 풍부한 자양분을 제공하며 서양과 중동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선진 문물은 해상 교역을 통해 에게해(그리스 터키 사이)로 흘러들었다. 그 첫 번째 수혜자는 크레타섬의 미노아 문명이었다. 강력한 해상력을 바탕으로 번영한 미노아인들은 성벽 없는 크노소스 궁전으로 대표되는 화려하고 평화로운 문화를 꽃피웠다. 기원전 1600년경부터는 그리스 본토에서 호전적인 미케네 문명이 부상했다. 미케네인들은 미노아 문명을 계승하면서도, 거대한 돌로 쌓아 올린 성채와 순금으로 만든 황금 마스크에서 드러나듯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들이 점토판에 남긴 선형문자 B는 훗날 초기 그리스어로 해독되어,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과 같은 전설들이 단순한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증명했다. 미노스와 미케네로 대표되는 이 에게 문명은 동방의 선진 문명을 서방 세계로 전달하는 중요한 매개자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기술과 신화를 받아들여 자신들만의 독특한 색채로 재해석했고, 이는 훗날 그리스 문명이 탄생할 수 있는 풍부한 문화적 토양이 되었다. 훗날 그리스 신화의 다채로운 서사적 상상력과 고전기 그리스 예술의 미감, 건축 기술의 기원은 바로 이 에게 문명에 깊이 빚지고 있다.


문명의 빛은 이제 더 넓은 세계, 지중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확산의 중심에는 레반트 지역, 지금의 레바논 해안을 중심으로 도시국가 연합체를 이루었던 페니키아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위대한 정복자나 거대한 제국의 건설자는 아니었지만, 뛰어난 항해술과 상업적 감각을 바탕으로 지중해 전역을 누비는 기술과 문자의 전파자였다. 페니키아 상인들의 배에는 값비싼 자수정 옷감과 백향목뿐만 아니라, 인류의 지성사를 바꿀 위대한 발명품이 실려 있었다. 바로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에서 영감을 얻어 훨씬 단순하고 효율적으로 개량한 ‘알파벳’이었다. 수백, 수천 개의 복잡한 기호를 외워야 했던 기존 문자와 달리, 단 몇십 개의 기호 조합만으로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알파벳은 지식의 문턱을 극적으로 낮추었다. 이 혁신적인 문자 체계는 지중해 무역망을 타고 그리스에 전해져 오늘날 모든 서양 문자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었다. 페니키아인들은 이오니아 해안의 도시국가들, 그리스 본토,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이르기까지 지중해 전역에 물자와 사상을 실어 나르며 흩어져 있던 문명들을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로 연결했다. 그들은 고유의 제국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바다 위에 보이지 않는 상업 제국을 건설하며 서구 상업 문명의 씨앗을 뿌렸다.


문명의 용광로는 이제 아나톨리아 반도(현대의 터키) 서부 해안의 이오니아 지방으로 옮겨갔다. 밀레토스, 에페소스, 사모스와 같은 이오니아의 번성하는 항구도시들에서 기원전 6세기경, 인류 정신사의 가장 위대한 전환 중 하나가 시작되었다. ‘자연 현상과 세계의 본질을 신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하려는’ 철학적 사유의 등장이었다. 이오니아는 지리적으로 메소포타미아의 발달된 천문학과 수학, 이집트의 기하학, 페니키아의 실용적인 문자, 그리고 에게 문명의 풍부한 상상력이 모두 모여 융합되는 지성의 산실이었다. 이곳에서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선언하며 신화적 세계관에 처음으로 균열을 냈고, 아낙시만드로스는 추상적인 원리인 ‘로고스(Logos)’가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라고 주장했다. 이는 모든 현상을 신들의 변덕으로 설명하던 시대와의 결별이자,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자연철학의 출발점이었다. 흔히 그리스 문명을 고립된 섬에서 피어난 기적처럼 여기지만, 그 찬란한 성취는 사실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로, 페니키아에서 에게해로, 그리고 이오니아로 이어진 수천 년간의 문명 교류와 지적 유산이 집대성된 결과물이었다. 이 토양 위에서 그리스 문명은 인류 정신사의 위대한 도약을 이루었다. 아테네에서는 폴리스(도시국가)를 중심으로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주의라는 놀라운 정치 실험이 이루어졌고,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철학의 계보는 이후 2500년간 서양 사상의 모든 논의가 시작되는 원천이 되었다. 조각과 건축에서는 인간의 육체를 이상적인 비례와 균형의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며 서양 미학의 영원한 기준을 제시했다. 훗날 로마에 의해 유럽 전역으로 이식되고, 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르네상스 시대에 화려하게 재발견된 고전 그리스는 명실상부한 서구 문명의 출발지였다.


한편, 그리스의 동쪽에서는 또 다른 거대한 힘이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하고 있었다. 이란의 파르스 지역에서 출발한 페르시아는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소아시아, 인도 일부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영역을 통일하며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 제국을 건설했다. 페르시아의 위대함은 단지 영토의 넓이에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정복지의 종교, 문화, 관습을 억압하지 않고 존중하는 전례 없는 관용 정책을 펼쳤으며, ‘사트라프’라 불리는 지방 총독을 파견하고 ‘왕의 길’이라는 도로망을 구축하여 광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완성했다. 페르시아의 이러한 통치 방식은 이후 등장하는 수많은 대제국의 모델이 되었다. 특히 페르시아의 관용 정책은 유대교의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바빌론을 정복한 키루스 대왕이 그곳에 포로로 끌려와 있던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귀향과 성전 재건을 허락한 것이다. 이 ‘바빌론 유수’ 시기를 거치며 유대교는 고난 속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정립하고 부족 신앙의 단계를 넘어, 선과 악의 대립, 최후의 심판과 구원자 사상을 지닌 고도로 발전된 유일신 종교로 거듭나게 된다. 여기에는 당시 페르시아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컸다. 절대적인 선의 신과 악의 신이 대결하며, 인간은 윤리적 선택을 통해 최후의 심판을 받는다는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는 유대교에 깊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이 유대교는 훗날 서구 세계에서는 기독교로,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이슬람으로 이어져 오늘날 세계 양대 문명의 도덕적, 윤리적 뼈대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스 문명이 남긴 위대한 정신적 유산을 실질적인 힘으로 통합하고 서구 세계 전역으로 확산시킨 주역은 로마였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철학과 예술을 깊이 숭배하고 모방하면서도, 그것을 자신들의 강점과 결합하여 새로운 차원의 문명을 창조했다. 법률, 토목 공학, 행정 시스템, 그리고 군사 조직 분야에서 로마가 남긴 업적은 독보적이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제국 전역을 거미줄처럼 연결한 도로망과 도시의 위생을 책임진 상수도 시설은 로마의 경이로운 공학 기술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체계적으로 집대성된 로마법은 사유재산권의 보장, 계약의 자유 등 근대 법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원칙들을 확립하여 서양 법률 체계의 영원한 모델이 되었다. 잘 조직된 로마 군단은 지중해 세계에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라는 전례 없는 장기적 평화와 안정을 가져왔다. 로마는 마치 그리스라는 위대한 소프트웨어를 로마라는 강력하고 안정적인 하드웨어에 탑재하여 지중해 세계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문명권으로 묶어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문명은 이제 메소포타미아의 강가에서 출발하여, 로마인들이 ‘우리의 바다(Mare Nostrum)’라고 불렀던 지중해 전체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고 5세기경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유럽은 기나긴 혼란과 침체에 빠져들었다. 고대의 지식과 기술은 대부분 잊혔고, 유럽은 소위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바로 이때, 7세기 아라비아 반도의 메마른 사막에서 발흥한 이슬람 문명이 경이로운 속도로 성장하며 스페인에서부터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슬람 문명의 가장 위대한 강점이자 인류사에 대한 기여는 ‘보존과 융합을 통한 재창조’에 있었다. 유럽이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과 과학 저작들을 대부분 잃어버리고 오직 신학에만 몰두해 있을 때,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을 비롯하여 카이로, 코르도바의 이슬람 학자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작들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체계적으로 연구하며 그 지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 그들은 단순히 지식을 보존하는 사서 역할에 그치지 않았다. 인도로부터 ‘0’의 개념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편리한 숫자 체계를 받아들여 ‘아라비아 숫자’를 완성했고, 이를 바탕으로 현대 컴퓨터 과학의 기초가 된 ‘알고리즘’과 방정식을 다루는 ‘대수학(Algebra)’을 창안했다. 의학 분야에서는 이븐 시나가 고대부터 당대까지의 모든 의학 지식을 집대성한 『의학 정전』을 저술하여 수백 년간 동서양 의학계의 교과서가 되었고, 철학자 이븐 루시드가 남긴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는 훗날 유럽의 스콜라 철학이 부활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천문학, 화학, 광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당시 이슬람 세계는 유럽을 압도하는 지식의 중심지였다. 이슬람의 지배는 유럽에게 분명한 위협이었지만, 역설적으로는 잠들어 있던 유럽의 지성을 깨우는 자명종 역할도 수행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안달루스와 시칠리아 섬, 그리고 십자군 전쟁과 같은 격렬한 충돌의 장을 통해, 이슬람 세계가 보존하고 발전시킨 고대 그리스의 지혜와 그들 스스로 이룩한 발전된 과학 기술이 유럽으로 역수입되기 시작했다. 문명의 축이 이슬람이라는 거대한 용광로를 거치며 한층 더 풍부해진 후, 다시 서쪽으로 전파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14세기에 이르러 지중해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을 중심으로 르네상스, 즉 ‘재생’과 ‘부활’을 의미하는 위대한 문화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이슬람 세계를 통해 역수입된 고전 지식과 1453년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수많은 그리스 학자들이 고대 문헌들을 들고 유럽으로 망명해 온 사건에 의해 촉발되었다. 신 중심의 중세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성과 존엄성, 잠재적 가치를 재발견한 인문주의는 예술과 과학, 정치 모든 분야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같은 천재들은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인체의 신비와 세계의 법칙을 탐구했고,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 인쇄술은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던 지식을 대중에게 전파하여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기폭제가 되었다. 바로 이 시기,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이라는 사건은 문명의 중심축을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막대한 양의 금과 은, 새로운 작물들이 신대륙과 아시아로부터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이는 상업 혁명과 절대왕정의 성립을 뒷받침하는 경제적 토대가 되었다. 유럽은 이제 세계의 다른 모든 지역들을 압도하는 부와 힘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대항해시대를 통해 얻은 막대한 부와 자신감은 서구 문명의 내적인 힘을 폭발시키는 에너지원이 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에 걸친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는 서구 문명의 질적인 도약을 이끌었다.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통해 천체의 움직임을 수학적으로 설명해내자, 인간의 이성으로 우주의 모든 비밀을 파헤칠 수 있다는 무한한 신뢰가 사회 전반에 퍼졌다. 존 로크, 볼테르, 루소와 같은 계몽사상가들은 자유, 평등, 인권, 주권재민과 같은 혁명적인 개념들을 제시하며 낡은 신분제 사회의 기반을 흔들었고, 이는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이러한 지적, 사상적 혁명을 압도적인 물질적 힘으로 전환시켰다. 제임스 와트가 개량한 증기기관은 인간과 동물의 근력을 뛰어넘는 폭발적인 생산성을 가져왔고, 공장제 기계 공업과 자본주의 체제를 확립시켰다. 증기기관차와 증기선은 지리적 장벽을 무너뜨렸고, 산업혁명으로 무장한 유럽 열강들은 값싼 공산품을 팔 시장과 원료 공급지를 찾아 전 세계로 뻗어나가며 제국주의 시대의 막을 열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물론, 한때 문명의 중심지였던 중동과 인도마저 그들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문명의 축은 이제 명백히 런던, 파리, 베를린과 같은 서유럽의 수도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끔찍한 세계대전은 스스로의 힘에 도취했던 유럽을 폐허로 만들었다. 유럽이 스스로의 야만에 의해 자멸하는 동안, 대서양 건너편의 미국이 새로운 문명의 중심축으로 떠올랐다.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채, 양쪽 진영에 막대한 군수물자를 공급하며 엄청난 산업 생산력과 군사력을 보유하게 된 미국은 20세기 중반부터 오늘날까지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패권 국가가 되었다. 문명의 중심축은 지난 1만 년 동안 메소포타미아의 강가에서 뉴욕의 마천루까지, 약 1만 킬로미터를 서쪽으로 이동한 셈이다.


정말로 문명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이동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동’이라는 말은 현상의 본질을 가리는 부적절한 비유일지도 모른다. 문명은 그 자체로 움직일 이유가 없다. 문명은 확산하고 경쟁할 뿐이다. 한 지역에서 혁신적인 문명이 발생하면, 그 영향력은 물결처럼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이 과정에서 여러 문명이 서로 경쟁하고 충돌하며, 그 결과 더 효율적이고 강력한 시스템을 갖춘 문명이 우위에 서게 된다. 그러면 다시 그 문명을 중심으로 새로운 확산과 경쟁의 파동이 시작된다. 지난 수천 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유독 서쪽에서 등장한 문명이 이러한 경쟁에서 승리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결과 마치 문명의 중심축이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서쪽, 특히 유럽의 문명은 더 강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기후와 지리에서 찾을 수 있다. 중동 지역이 건조한 아열대 기후로 사막이 넓게 펼쳐진 반면, 서유럽은 따뜻한 북대서양 해류의 영향으로 겨울은 온화하고 여름은 서늘한 온대 해양성 기후의 혜택을 받았다. 비가 특정 계절에 집중되지 않고 연중 고르게 내려 안정적인 농업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인구 부양력과 사회 안정성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경쟁력을 만든 진정한 핵심은 바로 바다였다. 유럽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 사이에 깊숙이 파고든 지중해라는 거대한 내해(內海)를 가졌다. 지중해는 해안선이 복잡하고 그리스의 에게해처럼 수많은 섬이 흩어져 있어 초기 항해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섬들은 폭풍우를 피할 수 있는 자연적인 방파제이자, 식량과 물을 보충하고 물품을 교역할 수 있는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 잔잔한 내해의 특성은 원시적인 돛단배로도 비교적 안전한 항해를 가능하게 했고, 이는 고대 그리스, 로마, 페니키아와 같은 해상 문명이 번성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런데 만약 유럽에 지중해만 있었다면 문명의 중심축은 그곳에만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유럽은 북쪽에 또 하나의 깊숙한 내해, 북해와 발트해를 가지고 있었다. 중세 시대 한자동맹은 이 바다를 중심으로 강력한 해상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스칸디나비아의 목재와 청어, 러시아의 모피, 폴란드의 곡물을 거래하며 북유럽의 경제를 통합했다. 문명의 축을 서구로 끌어당긴 것은 바로 이처럼 아래위로 깊게 파고든 두 개의 거대한 내해였다. 문명의 서진(西進)은 유럽에서 멈추지 않았다.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조선 기술과 항해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대서양은 더 이상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아닌 거대한 내해가 되었다.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던 대서양은 미국에도 유럽의 발전된 문명을 빠르게 확산시키는 통로가 되었다.


20세기, 문명의 중심축이 마침내 미국으로 옮겨간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미국은 유럽이 가졌던 경쟁력에 더해 그들이 갖지 못한 결정적인 것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다. 바로 태평양이다. 동쪽으로는 유럽과 연결된 대서양, 서쪽으로는 아시아와 연결된 태평양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바다를 양옆에 거느리고, 온화한 기후와 광활하고 비옥한 대륙을 가진 미국의 지리적 이점은 압도적이다. 대서양만 있고 동쪽은 거대한 육지로 막혀 있는 유럽이 양대양 국가인 미국을 감당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고 유럽이 이를 억울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지중해와 대서양을 발판으로 세계의 중심이 되었을 때, 한때 문명의 요람이었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의 후예들에게 유럽은 바로 지금의 미국처럼 지리적으로 압도적 이점을 가진 부러운 존재였을 테니까 말이다.


서구 문명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결론은 명확하다. 문명의 흥망과 성쇠 뒤에는 특정 민족의 내재적 우월성이 아닌, '지리'라는 거대한 무대장치가 결정적인 주인공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유럽이 지중해와 대서양이라는 열린 바다를 통해 교류하고 경쟁하며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조건이었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가 논의할 한국 문명 역시, 이 '지리적 조건'이 주 무대가 될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서구 문명의 지리적 이점을 부러워하며 우리에게서 비슷한 것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반도의 지리에 기반한 여러 조건이 어떻게 서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한국 문명을 빚어냈는지를 탐색하는 것이다. 유럽이 여러 문명권이 각축하는 드넓은 바다를 통해 팽창의 역사를 썼다면, 한반도는 당대 세계 최강의 문명(중국)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그 거대한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때로는 저항하며, 종국에는 그것을 우리만의 방식으로 소화해 내는 고유의 생존법과 정체성을 구축했다.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연결되고 융합되는 오늘날의 환경은, 과거 서구의 팽창 모델과는 또 다른 차원의 지혜를 요구하고 있다. 밖으로 경계를 넓히는 대신 안으로 파고들어 관계의 밀도를 높이고, 다양한 요소들을 조화시켜 하나의 세계를 완성해내는 지혜말이다. 거센 외부의 파고 속에서도 흩어지지 않고 수천 년간 고유한 문명을 다져온 한반도의 응축적 경험 속에 그 실마리가 있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한반도라는 조건이 우리에게 새겨준 이 고유한 문화적 자산이 지금 시대에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들여다보려 한다.



한국 문명 스물세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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