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문명
앞 장에서 우리는 서구 문명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유산을 이어받고, 이슬람 문명의 지식을 흡수하며, 어떻게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다시금 전 세계로 그 영향력을 전파해 나갔는지 그 장대한 여정을 살펴보았다. 이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하나의 거대한 무대이자 역동적인 동력이 있었으니, 바로 '바다'였다. 서구 문명의 핵심을 단 하나의 단어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단연 '해양문명'일 것이다. 바다는 서구인들에게 단순한 지리적 배경을 넘어, 그들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빚어낸 거대한 용광로였다. 바다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서구 문명 역시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양문명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단순히 해안선을 끼고 있다는 지리적 조건만으로는 해양문명이 성립되지 않는다. 바다가 문명에 결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상업'을 동반하며, 나아가 인간의 정신에 '확장성'과 '개방성'을 각인시키기 때문이다. 수평선 너머의 미지의 세계는 언제나 위험과 기회를 동시에 품고 있었고, 이는 서구인들에게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도전 정신과 모험심을 불어넣었다. 바다를 매개로 한 교역은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촉진하고, 새로운 정보와 이질적인 사상의 유입을 가능케 하는 문명의 대동맥이었다. 서구는 역사 내내 바로 이 해양 교역의 이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며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고대 페니키아와 그리스 시대부터 지중해는 여러 문명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역할을 했다. 로마인들은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라 부르며 제국의 혈관으로 삼았다. 이후 중세에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같은 해상 공화국들이 동방 무역을 독점하며 부와 문화를 꽃피웠고, 대항해시대에 이르러 서구의 활동 무대는 대서양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넘어 아메리카와 인도양, 태평양으로 거침없이 확장되었다. 이처럼 서구 문명은 바다를 통해 세계와 연결하고,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며 끊임없이 팽창하는 외향적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반면, 한반도의 상황은 이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 외딴 반도에 자리한 한국에게 바다는 기회의 공간이기보다 넘기 힘든 장벽에 가까웠다. 동해는 평균 수심이 1,700미터에 달할 만큼 깊고 파도가 거칠었으며, 서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거대한 조수간만의 차와 복잡한 해안선으로 인해 안정적인 장거리 항해를 어렵게 만들었다. 남쪽으로 광활하게 열린 태평양은 너무도 거대하고 험난한 미지의 공간이었다. 물론 장보고와 같은 위대한 해상 인물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흐름이 되지는 못했다. 고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명에게 바다는 교류의 통로가 아닌, 세상의 끝을 알리는 '무의미한 공간'에 가까웠다.
동시에 대륙과의 연결도 순탄치 않았다. 북쪽의 만주 접경 지역은 험준한 개마고원과 낭림산맥이 가로막고 있었고, 혹독한 기후와 변화무쌍한 유목 민족과의 정치적, 군사적 갈등은 안정적인 육상 교역로의 발달을 저해했다. 이러한 복합적인 고립의 조건 속에서 한국 문명은 외부 세계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성장하는 외향적 모델이 아닌, 주어진 환경 내에서 조화와 안정을 추구하며 깊이를 더해가는 내향적 모델을 발전시켰다. 그 귀결은 자급자족에 기반한 '농업 문명'으로의 깊은 정착이었다.
문명의 경제 기반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사회를 이끄는 주도 세력이 결정되고, 이들이 어떤 인간상을 가치 있게 여기느냐에 따라 문명의 방향성이 정해진다.
상업 문명인 서구에서는 상업 활동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인 계층이 점차 사회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했다. 봉건 질서가 굳건했던 중세 유럽에서 상인들은 도시라는 자치 공간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힘을 키웠다. 그들은 길드를 조직하여 생산과 유통을 통제했고, 은행업과 보험업을 발전시키며 자본의 논리를 사회에 확산시켰다. 국왕들은 봉건 영주들의 힘을 누르기 위해 상인 계층과 손을 잡았고, 그들에게 다양한 특권을 부여하며 성장을 도왔다. 이들은 훗날 '부르주아지'로 발전하며 단순히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와 문화의 주체로 당당히 부상한다. 그들의 가치관, 즉 합리성, 실용주의, 계약 정신, 그리고 개인의 이익 추구가 사회 전체의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서구는 바다를 기반으로 한 상인들이 사회를 주도하며 역동적이고 물질주의적인 문명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농업 문명인 한국에서 상인은 결코 주도적 세력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엄격한 신분 질서 속에서 상인은 가장 낮은 계층으로 분류되었다. 전근대 한국 문명을 주도한 것은 토지를 소유하고 지식을 독점한 '양반'들이었다. 양반의 힘의 원천은 단지 토지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유교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측정하는 '과거' 제도를 독점한 데 있었다. 과거 시험은 실용적인 기술이나 상업적 능력이 아닌, 오로지 성리학적 교양과 도덕적 수양의 깊이를 묻는 시험이었다. 이 제도는 상업적 마인드를 가진 인재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도덕과 명분을 중시하는 학자 관료들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조선 시대를 풍미한 사림 세력은 이익(利)보다 의리(義)를 숭상했으며,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쌓는 것을 천시하는 경향이 극심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과 동쪽 끝, 지리적으로 양극단에 위치한 두 지역은 이처럼 문명의 주도 세력과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관에서도 극단적인 차이를 보였다. 서구가 상업 문명의 극단에 서 있다면, 한국은 동아시아 내에서도 가장 비상업적인 문명 중 하나였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제기된다. 송나라 시기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도시 상업이 이루어진 나라였고, 이후 19세기 아편전쟁으로 무너질 때까지 세계의 공장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그토록 거대한 상업이 이루어진 중국에서는 왜 서구와 같은 '부르주아' 상업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을까?
그 해답은 '국가'의 역할에 있다. 거대하고 통일된 제국이었던 중국은 광대한 영토 내의 자원 불균형을 민간의 상업 활동에 의존하기보다, 대운하 건설과 같은 국가가 직접 개입하는 강력한 재분배 시스템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중국의 황제들에게 거대한 부를 쌓은 상인은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파트너라기보다는, 언제든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잠재적 위협 세력이었다. 따라서 국가는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소금과 철의 전매제도를 시행하는 한편, 필요시 그들의 재산을 언제든 몰수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반면 수많은 왕국과 공국, 자유도시로 분열되어 있던 유럽은, 국가 단위의 자급자족이 불가능했기에 생존을 위해서라도 상인의 손을 빌려야만 했다. 각 지역의 영주나 국왕들은 세수를 확보하고 영지를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경쟁적으로 상인들을 유치하고 특권을 부여했다. 이러한 '경쟁하는 권력'의 환경 속에서 서구의 상인 계층은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보장받으며 독자적인 힘을 키울 수 있었다. 만약 한 군주가 과도한 세금을 물리거나 재산을 빼앗으려 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더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는 이웃 나라로 거점을 옮기면 그만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분열 상태가 역설적으로 서구 상인들에게는 성장의 토양이 되어준 것이다.
그렇다면 상인이 주도하는 문명과 농업을 중시하는 세력이 주도하는 문명은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까? 이 대비를 통해 한국문명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차이는 '이동성'과 '정주성'이다. 상업은 본질적으로 교역을 위해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지만, 농업은 토지에 생존을 의존하므로 한곳에 정착하여 살아야 한다. 이 단순한 차이가 사회 전체의 소통 방식과 관계 맺는 법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들었다.
이동이 잦은 사회에서는 낯선 사람들과의 교류가 일상이며, 필요에 따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해체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반면, 한곳에 오래 머무는 사회에서는 소수의 익숙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평생 지속되며, 관계망은 매우 동질적이고 안정적인 형태를 띤다. 이러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오랜 시간 동안 방대한 양의 암묵적인 맥락을 공유하게 된다.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은 이러한 차이를 '고맥락(High-context)'과 '저맥락(Low-contex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고맥락 사회인 한국에서는 소통의 핵심이 언어 자체보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맥락, 즉 문화, 관계, 몸짓, 분위기 등 비언어적 요소에 있다. 소통은 간접적이고 간결하며, 상대방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는 능력, 즉 '눈치'가 최고의 소통 능력으로 여겨진다. 대화의 목적은 단순히 정보를 정확히 전달하는 것보다 관계를 해치지 않고 조화롭게 유지하는 데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속담처럼,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통하는 문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직장 상사에게 "몸이 좀 안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몸 상태를 보고하는 것을 넘어 "오늘 조퇴를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맥락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상사는 그 맥락을 읽어주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진다.
반면 저맥락 사회인 서구는 이동성이 높고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 공유된 맥락을 가정할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소통이 명시적이고, 직접적이며, 상세해야 한다. "To be clear, let me spell it out for you(명확히 하기 위해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라는 표현이 흔히 쓰이는 것처럼, 모든 것을 언어로 명확히 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가 나의 숨은 의도를 읽어줄 것이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불만, 요구, 감정도 직접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나는 모르는 일"이라며 맥락을 읽으려는 노력 자체를 회피하기도 한다.
특히 한국은 농업 중에서도 상호의존성이 극도로 강한 벼농사를 지었다. 물을 함께 관리하고, 모내기와 추수를 함께해야 하는 벼농사 공동체에서 이탈하는 것은 곧 생존의 위기를 의미한다. 새로운 관계를 탐색하고 만드는 비용이 막대하기에,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관계를 평생 성공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공동체의 조화, 위계질서, 그리고 '눈치'와 같이 복잡한 사회적 탐색 도구가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 차이는 신뢰를 창출하는 메커니즘에서도 근본적인 차이를 낳는다. 높은 이동성 사회인 서구에서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신뢰는 개인의 인격이나 관계의 깊이가 아닌 '계약'에 의존한다. 법과 제도로 보장되는 명문화된 약속이 낯선 사람들 사이의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계약은 감정이 배제된 이성적 판단의 산물이며, 그 이행 여부는 개인의 양심이 아닌 시스템의 강제력에 의해 담보된다.
반면, 정주형 사회인 한국에서 신뢰는 기존에 깊게 형성된 '관계'에 기반한다. 계약 의존적인 서구에서 사람들 사이에 주로 '거래'가 이루어진다면, 관계에 기반한 한국에서는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서구의 거래가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명시적이고 즉각적인 등가교환이라면, 한국의 선물은 '사람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장기적이고 묵시적인 호혜성의 교환이다. 상업이 미미했던 조선 시대에 선물은 중요한 경제 활동이기도 했다. 선물을 통해 서로 부족한 자원을 교환했고, 노동력을 교환하는 '품앗이'나 상호부조 금융인 '계' 역시 선물 경제의 대표적인 사례다. '계'는 단순히 돈을 모으는 금융 시스템을 넘어, 구성원 간의 경조사를 함께 챙기고 어려움을 돕는 강력한 사회적 안전망 역할을 했다.
정주성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선물'은 단순히 물건을 주는 행위를 넘어, "우리의 관계는 여전히 굳건하다"고 확인하고 강화하는 상징적 행위다. 경조사 때 주고받는 부조금(경조사비)은 이러한 선물 경제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것은 슬픔이나 기쁨을 나눈다는 정서적 의미와 더불어, 내가 미래에 비슷한 일을 겪었을 때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는 일종의 '관계 보험'의 성격을 띤다. 그에 대한 보답은 즉각적일 필요가 없다. 이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상대방이 기꺼이 도와줄 것이라는 장기적인 신뢰의 표현이다. 그래서 서구에서 "선물은 자유로운 호의"지만, 한국에서 "선물은 관계 유지를 위한 의무"가 되기도 한다.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가 멈추면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지며, 때로는 "배신"이나 "실례"로 간주되기도 한다. 오늘날에도 식당 계산대 앞에서 서로 밥값을 내겠다며 실랑이를 벌이는 풍경은, 바로 이 선물 문화가 여전히 우리 삶에 깊이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농업 문명과 상업 문명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윤리관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농업 문명의 윤리는 내면화된다. 농업은 본질적으로 자연과의 상호작용이며,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결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없다. 자연의 리듬에 순응하고, 꾸준하고 성실한 태도로 협력해야만 결실을 얻을 수 있다. 특히 동아시아의 벼농사는 공동의 수로 관리, 모내기, 제방 쌓기 등 공동 작업이 필수적이었다. 공동체 속에서의 "게으름"이나 "이기심"은 개인의 실패를 넘어 공동체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였다. 이러한 과정은 구성원들에게 자연과 공동체의 질서를 존중하는 태도, 즉 윤리를 자연스럽게 내면으로 체화시켰다. 윤리가 내면에 자리 잡으면 외부의 강제적인 통제가 필요 없으므로, 법이나 계약 같은 제도적 감시보다는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과 수양이 최고의 가치로 강조된다.
이러한 태도는 동양 철학의 핵심 사상과 깊이 연결된다. 도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농부의 삶과 같고, 유교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은 인간 사회의 윤리가 곧 자연의 원리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특히 조선 시대를 지배한 성리학은 우주의 근본 원리(理)가 인간의 본성(性)에 그대로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자기 마음을 닦는 수양은 곧 우주의 원리를 체득하는 길과 동일시되었다. 하늘은 의지를 가진 인격신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 그 자체였고, 인간 내면에 자리한 '도(道)'를 스스로 단련하고 따르는 것이 중요했다.
반면 상업 문명의 윤리는 외주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상업은 본질적으로 우연, 기회, 모험의 요소가 강하며, 협력보다는 경쟁이 중심이 된다. 특히 전근대 유럽에서 상업은 해적 행위나 식민지 수탈과 그 경계가 모호했다. 상업적 성공은 종종 윤리적 태도보다 능력과 힘, 기민함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일회적이고 경쟁적인 관계 속에서는 윤리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어렵다.
따라서 윤리의 최종적인 담보물을 인간 외부에서 찾을 필요가 생긴다. 서구 문명은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을 제약할 외부의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 즉 '인격신'을 설정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이는 윤리의 '외주화(Outsourcing)'라 할 수 있다. 신은 선과 악을 판결하고 복과 벌을 내리는 외재적 감시자이며, 윤리는 신의 계시에 따라 규정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원죄를 지닌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내면의 수양보다는 외재적인 법과 신의 심판이라는 제재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핵심 장치가 되는 것이다.
물론 서구에도 'conscience'라는 내재된 윤리 개념이 있다. 한국어로는 '양심'으로 번역되지만, 두 개념은 이름만 같을 뿐 그 기능과 작동 방식이 다르다.
동아시아의 양심(良心)은 맹자가 말했듯,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타고난 선한 마음'이자 '선의 근원'이다.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등 선의 씨앗(四端)이 모든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고 보았다. 이 양심은 본래 맑은 거울과 같지만, 이기적인 욕심이라는 먼지로 인해 흐려질 수 있기에 지속적인 수양을 통해 그 빛을 다시 닦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양하라'는 말은 바로 이 본래의 선한 양심을 회복하라는 의미다. 따라서 한국에서 "양심도 없냐?"라는 말은 "너는 인간의 기본 조건조차 갖추지 못했다"는 존재론적 비난에 가깝다.
반면 서구의 conscience는 선한 본성 그 자체라기보다, 죄를 지은 후에 그 잘못을 자각하고 판단하는 '죄의 감지기'에 가깝다. 기독교의 원죄 사상에 따르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의 경향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Conscience는 이 죄의 경향성이 행동으로 나타났을 때, 즉 신의 법을 어겼을 때 영혼에 울리는 경고음과 같다. 죄를 짓기 전 예방하는 기능보다, 죄를 지은 후에 작동하여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회개하도록 이끄는 기능이 더 강조된다. '회개하라'는 말은 이미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신에게 용서를 구하며, 올바른 길로 돌아오라는 의미다. 따라서 서구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너의 도덕적 판단 기능이 왜 작동하지 않았는가?"라는 기능적 질책에 가깝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도덕이 자기 수양과 내면의 정화, 즉 남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는 '수치심의 윤리'에 가깝다면, 서구의 도덕은 법적 책임과 죄의 고백, 즉 신 앞에서 느끼는 '죄책감의 윤리'에 가깝다. 이 차이는 문명 전반의 윤리 구조, 교육, 법 체계, 심지어 대중문화의 서사 구조까지 다르게 만든다. 한국 드라마의 주인공은 종종 자신의 본래 선한 마음을 회복하는 구원의 서사를 보여주는 반면, 서구 드라마의 주인공은 죄를 저지르고 그 대가를 치르는 속죄의 서사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윤리를 내면화하고 수양을 강조한 동아시아는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관심사를 '인간의 문제'에 집중시켰고, '신의 문제'는 개인의 영역에 맡겨두었다. 한국의 역사 속에서 유일신 개념은 희박했으며, 샤머니즘의 수많은 신, 불교의 부처, 도교의 신선, 조상신 등 다양한 신들이 공존했다. 종교 교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끔찍한 전쟁을 벌인 역사도 없다. 사회의 에너지는 '어떻게 하면 인간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하고 조화롭게 살 것인가'에 집중되었다. 조선 시대 내내 벌어졌던 치열한 당쟁은 결국 '인간의 윤리를 정치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의 싸움이었다. 현종 시기 왕실의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졌던 예송논쟁(禮訟論爭)은, 인간관계의 의례(禮)가 얼마나 중요한 공동체의 문제였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반대로 윤리를 외주화하고 회개를 강조한 서구는 공동체의 관심사를 '신의 문제'에 집중시켰고, '인간의 문제'는 개인의 책임으로 돌렸다. 서구 문명의 역사는 '어떤 신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라는 '공유된 믿음'을 확립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유일하고 보편적인 신은 유일하고 보편적인 진리를 전제하기에, '올바른 믿음'은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고 수호해야 할 절대 과제였다. 이를 위해 아리우스파 논쟁과 같은 수많은 종교회의가 열렸고, 이슬람으로부터 성지를 되찾기 위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으며, 종교개혁은 유럽을 100년이 넘는 끔찍한 종교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신의 문제는 그야말로 모두가 함께 피를 흘리며 해결해야 할 공동의 문제였다. 신 앞에 선 인간은 오롯이 '개인'이며, 구원과 현실의 삶 역시 각자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깊었다.
윤리관의 차이만이 아니다. 문명을 형성한 삶의 방식 차이는 더 깊은 곳, 즉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무의식적인 인식의 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리처드 니스벳 교수와 마스다 타카히코가 진행한 유명한 '물고기 영상 실험(2001)'은 이러한 인지 방식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연구팀이 동양과 서양의 참가자들에게 화려한 중심 물고기가 헤엄치고, 배경에는 수초가 흔들리고 작은 게들이 움직이는 수중 영상을 보여주고 묘사하게 하자, 서양 참가자들은 대부분 '화려한 중심 물고기'라는 대상의 속성에 집중했다. 반면, 동양 참가자들은 '연못 같은 곳'이라는 전체적인 배경과 맥락을 먼저 설명하며 "물고기가 수초 앞을 지나갔다"는 식으로 관계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후에 진행된 재인식 실험이었다. 연구팀은 참가자들에게 이전에 봤던 물고기와 새로운 물고기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물고기를 영상에서 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핵심은 이때 일부 물고기들은 원래 영상과 똑같은 배경과 함께, 다른 물고기들은 전혀 새로운 배경과 함께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배경이 바뀌거나 아예 없어지더라도 서양 참가자들이 정답을 맞히는 비율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들은 물고기라는 '대상'을 배경으로부터 분리하여 독립된 개체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양 참가자들의 정답률은 현저히 떨어졌다. 그들에게 물고기는 '수초와 바위가 있는 특정 연못의 물고기'였기 때문에, 배경이라는 맥락이 사라지자 대상에 대한 기억도 함께 희미해진 것이다.
이는 서양인들이 대상을 배경과 분리하여 그 속성을 분석하고 범주화하는 '분석적(Analytic)'으로 인식하는 반면, 동양인들은 대상을 항상 배경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종합적'으로 인식함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처럼 대상을 독립된 실체로 보고 그 본질을 규명하려는 서구 철학과, 세상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도가(道家)나 화엄(華嚴) 사상과 같은 동양 철학의 차이가 사람들의 기본적인 지각 방식에까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서구 문명과의 비교를 통해 한국 문명의 핵심적인 특징들을 다각도로 조명해 보았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은 수천 년간 한 지역에 정주하며 노동 집약적인 벼농사를 지어온 극단적인 '농업·정주 문명'이다. 상업이 미미하여 '선물 경제'를 통해 관계를 기반으로 자원을 교환했다. 자연 및 공동체와의 조화를 위해 윤리를 '내면화'했고, 절대신의 필요성이 적었다. 낮은 이동성으로 인해 구성원 간에 수많은 맥락을 공유하는 '고맥락 사회'이며, 이로 인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 역시 개별 대상보다는 관계를 중시하는 '종합적 사고'를 보인다.
이 모든 특성을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 단어를 꼽으라면, 그것은 바로 '관계'일 것이다. 오래 정주하며 농사를 지으니 이웃과의 '관계' 밀도가 높아졌다. '관계'를 통해 선물 경제를 이루었다. 자연과 공동체와의 '관계'를 중시하여 윤리를 내면화했다. 깊은 '관계' 속에서 수많은 맥락을 공유하게 되었고, 사물을 볼 때조차 '관계'를 중심으로 지각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한국 문명은 '관계문명'이라 명명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특성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중국, 일본 등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도 상당 부분 공유하는 것이다. '관계'라는 키워드가 한국 문명만을 특정할 수 있느냐는 반문은 타당하다.
하지만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과연 관계의 논리가 가장 깊숙이 뿌리내려 사회 전반을 지배하게 된 문명은 어디일까? 중국은 거대한 제국이었다. 일본은 무사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더욱 고립되어 이동성이 제한적이었고, 역사적으로 상인 계층의 성장이 가장 미미했으며, 사회의 운영 원리로서 유교의 관계 윤리를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라는 변수다. 한국은 한반도라는 특정 공간에서, 매우 동질적인 사람들이, 대단히 안정적으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함께 부대끼며 살아왔다. 이는 동아시아 내에서도 한국이 가장 정주적인 사회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관계'라는 특성은 다른 어느 곳보다 강하게 발현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잘 만들어진 항아리 속에서 오랜 시간 숙성되며 깊은 맛을 내는 장(醬)처럼 말이다. 한국 문명은 잘 숙성된 '발효 문명'의 맛과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