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우리는 조선에 살고있다

2장을 마치며

by 김욱

2장을 통해 한국 문명의 가장 깊은 뿌리, 바로 '조선'이라는 거대한 문명적 유산을 탐험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보여주는 유례없는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달성한 저력, 그러면서도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경직된 위계질서와 과도한 경쟁의 그림자. 이러한 빛과 그림자는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수백 년에 걸쳐 이 땅에 축적된 조선 문명의 유산이 현대 사회 속에서 발현된 결과다.


조선의 유산을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관료 문명'이라 할 수 있다. 조선에서 관료는 단순히 국가 행정을 담당하는 직업군을 넘어, 사회의 이상이자 모든 이가 지향하는 목표였으며, 그들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은 사회 전체의 규범으로 작동했다. 다른 문명에서 관료가 '국가의 손발'에 머물렀다면, 조선에서 관료는 가히 '국가의 두뇌'이자 '척추'였다. 바로 이 강력한 관료 문명의 전통이, 오늘날 우리가 이룩한 놀라운 성취와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과 사회적 습성의 근원이다.


우리가 흔히 치열한 경쟁 사회의 산물로만 여겼던 '빨리빨리' 문화와 '완벽주의 강박'이 그렇다. 조선의 관료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국왕의 명령을 얼마나 신속하고 차질 없이 수행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한 업무 처리를 넘어, 자신의 충성심과 유능함을 증명하는 역동적인 퍼포먼스였다. 또한, 뚜렷한 성과를 계량하기 어려운 행정 업무 속에서 관료들은 '형식의 완벽함'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고 싶어했다. 사소한 흠결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우리가 겪는 강박적인 완벽주의의 뿌리다. 한국이 조선의 관료 문화를 이어받은 것은 조선의 관료들이 이질적 계급이나 민족이 아닌데다 동질적이면서도 광범위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의 관료제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우리의 행동을 규정하고 있다.


관료 문명의 유산은 어떻게 현대 한국의 눈부신 성취, 즉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조선이 남긴 또 다른 유산, '공론(公論)'의 전통과 마주하게 된다. 조선은 왕조차도 함부로 거스를 수 없는 '공론'의 힘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당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언론의 나라'였다.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으로 구성된 언론삼사는 국왕의 잘못을 비판하고 정책의 부당함을 지적했으며, 재야의 유생들은 상소를 통해 국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여 '역사의 심판'을 준비했던 사관의 존재는 권력자를 끊임없이 긴장시켰다.


이처럼 권력을 비판하고 공적 담론을 형성하는 강력한 공론의 전통은, 해방 이후 한국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결정적인 토양이 되었다. 서구의 많은 학자들이 한국의 권위주의적 전통과 부족한 시민 경험을 이유로 민주주의의 정착에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지만, 그들은 한국 사회 내부에 이미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에너지, 즉 살아있는 공론의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독재 정권이 의회와 언론이라는 공식적인 제도를 억압하고 통제했을 때, 한국 사회는 대학의 대자보와 재야의 성명서, 그리고 마침내 '광장'이라는 거대한 비공식적 공론장을 열어 그에 맞섰다.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촛불집회에 이르기까지,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바로 이 공론의 힘이 제도의 실패를 극복하고 역사를 전진시켜 온 과정이었다.


이러한 공론의 장에 참여할 수 있었던 '정치적 주체'가 광범위하게 형성된 배경에는, 조선 후기의 독특한 '계급 지향' 현상이 자리하고 있다. 서구가 계급투쟁을 통해 신분 질서를 해체하던 시기, 조선에서는 오히려 전 국민이 '양반 되기'를 열망하며 양반 계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비생산적인 명예 경쟁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유교적 교양과 정치의식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유교적 이상은 더 이상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니라, 국가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는 시민의식의 자양분이 되었다. 3·1운동과 같은 거대한 민족적 저항이 가능했던 것도, 그리고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 노동계급이나 부르주아가 아닌 '학생'이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조선의 독특한 유산, 즉 교양을 갖춘 정치 주체가 되고자 했던 광범위한 사회적 열망 덕분이었다.


조선 문명은 '종교적 유연성'이라는 또 다른 중요한 유산도 남겼다. 유교는 강력한 통치 이념이었지만, 기독교처럼 유일신을 내세우는 배타적인 종교는 아니었다. 이러한 유연성은 조선 왕조의 붕괴와 함께 유교의 정치적 권위가 약화되었을 때, 한국 사회가 새로운 사상, 특히 기독교를 급속도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종교적 공백'을 만들어냈다. 서구의 식민 지배를 통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기독교가 인구의 30%에 육박하는 주요 종교로 자리 잡은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이렇게 뿌리내린 기독교는 근대 교육과 의료의 통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정신적, 조직적 거점이 되어 한국 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조선이라는 거대한 문명적 토대 위에 서 있다. 우리가 이룬 민주주의의 성취는 조선이 물려준 강력한 '공론'의 전통과 '정치적 주체'로 성장한 대중의 힘 덕분이었다. 눈부신 경제 발전의 기저에는 국가적 목표를 향해 무섭게 돌진할 수 있었던 조선의 '관료적 조직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를 가능하게 한 사회적 역동성은, 유교 문명 특유의 '종교적 유연성'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유교는 이 땅의 질서를 다스리는 강력한 통치 이념이었지만, 개인의 내세나 구원과 같은 초월적 영역에 대해서는 문을 열어두어 불교나 도교 같은 다른 사상과 공존하는 다원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유연한 구조 덕분에, 우리 사회는 훗날 기독교와 같은 새로운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발전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었다.


물론 조선의 유산이 남긴 그림자도 있다. 경직된 위계질서, 과도한 완벽주의, 형식과 명분을 중시하는 문화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빛과 그림자가 바로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문명적 DNA라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조선의 유산은 단순히 과거의 박물관에 갇힌 유물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의 삶과 사회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그 힘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한국 문명의 진정한 저력을 깨닫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길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2부를 마무리 짓고 3부로 넘어가보자. 왜 한국의 식당 아주머니는 처음 본 손님을 '이모'나 '삼촌'이라 부르고, 선배는 당연하다는 듯 후배의 밥값을 내는 걸까? 왜 K팝 콘서트의 팬들은 약속이나 한 듯 노래를 따라 부르고(떼창), 아이돌의 작은 실수에 마치 연인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분노할까? 왜 한국의 드라마는 세상을 구하는 영웅보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열광할까?


3부에서는 이 모든 현상을 관통하는 한국 문명의 가장 깊은 비밀, 바로 '관계문명'과 '여성문명'이라는 핵심 코드를 본격적으로 탐구한다. 서구의 '계약'과 대비되는 한국의 '선물' 경제, '영웅 서사'와 다른 '관계 회복'의 드라마, 그리고 남성적인 '셰프'의 요리가 아닌 여성적인 '손맛'의 지혜가 어떻게 오늘날 한국의 독창적인 힘이 되었는지를 파헤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밥상에서부터 세계를 뒤흔드는 K-콘텐츠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 모든 곳에 숨어있는 문명의 비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국 문명 스물두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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