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선교사에 가장 특별한 나라 한국

조선의 유산 종교적 유연성

by 김욱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집전한 한국순교복자 103위 시성식이 거행된 것이다. 이 시성식은 가톨릭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시성 인원만 해도 가톨릭 역사상 최대였고,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닌 타국에서 열린 것 또한 전례 없는 일이었다. 왜 이런 전무후무한 사건이 한국에서 벌어졌을까? 이는 한국 가톨릭 역사의 특수성과 관련이 있다.


시성된 103위 성인 중 외국인 파견 선교사를 제외한 한국인 순교자는 93명에 달한다. 이는 전 세계 가톨릭 성인의 약 10%에 육박하는 수치로, 한국 천주교 역사가 불과 200여 년 남짓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경이롭다. 일반적으로 서구 이외 지역에서의 가톨릭 전파는 식민 지배 과정과 연동되거나, 서구 선교사들의 일방적인 선교 활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과정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이 순교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지만, 선교 대상 국가의 현지인들이 대규모로 순교하여 성인 반열에 오르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한국에서의 천주교 수용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자발성'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103위 시성식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784년, 여러분들의 조상들은 자신들 중 한 사람을 북경으로 보내 세례를 받았습니다"라고 언급하며 한국 천주교회의 독특한 시작을 강조했다. 이 언급 속 인물은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이승훈이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나 교황청의 존재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직 학문적 탐구를 통해 스스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세례를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움직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교황 비오 6세는 "동방의 끝에서 기적이 일어났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교황청의 입장에서 이는 실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조선에서 천주교는 처음부터 종교가 아닌 '서학(西學)'이라는 학문으로 시작되었다. 17세기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을 통해 서양의 학문과 문물이 소개되었고,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단순한 지적 호기심을 넘어 신앙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천주교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토론하며 공부하다 종교적 귀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처럼 자생적으로 형성된 신앙 공동체는 외부로부터 성직자를 파견 받기 어려웠기에, 신자들 스스로 주교와 신부를 선출하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는 임시적인 형태로 신앙생활을 이어가기도 했다. 이후 조선 신자들의 요청에 의해 북경 교구의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밀입국하여 본격적인 전교 활동을 시작하면서 교세가 점차 확장되었다.


그러나 유교적 질서가 사회 전반을 강력하게 지배하던 조선에서,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에서 전래된 이질적인 종교가 뿌리내리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천주교가 조선인들만의 신앙의 힘만으로 정착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이후 약 100여 년간 조선의 천주교는 극심한 박해의 시기를 겪게 돈다.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 등 네 차례의 대규모 박해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탄압으로 많은 신자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이처럼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한국 천주교의 특별한 역사는 로마 교황청의 깊은 관심을 받았다. 이러한 관심은 현대사로도 이어졌다. 1947년 바티칸 시국은 신생 대한민국 정부를 유엔보다 먼저 합법 국가로 승인한 최초의 국가 중 하나였다. 1984년 교황이 직접 방한하여 집전한 103위 시성식 역시 이러한 지속적인 관심과 존중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구한말 개항기를 맞아 유럽과 미국에서 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밟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들 선교사들은 복음 전파와 더불어 교육 사업에 지대한 공을 들였다.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이화학당(현 이화여자대학교), 배재학당, 숭실학교 등 수많은 근대 교육기관들이 이 시기에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어, 한국 사회의 근대화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개신교는 서구의 선진 문물을 접할 수 있는 통로로 인식되었다. 새로운 지식과 사상에 목말라 있던 많은 조선인들이 교회로 몰려들면서 교세는 급격히 확장되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빠르게 늘어나는 신자들의 수에 대해 한편으로는 의구심을 품었다. 많은 이들이 순수한 신앙적 동기보다는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 정치적 혹은 현실적인 기대를 안고 교회를 찾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등 국가는 존망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기독교를 믿으면 혹시 구원의 길이 열리지 않을까" 혹은 "교회가 이 위기에서 어떤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교회를 찾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이들을 피상적인 신자가 아닌, 진정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다. 당시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는 강력한 영적 각성을 추구하는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고, 선교사들은 이러한 부흥의 불길이 조선 땅에서도 타오르기를 열망했다.


이러한 열망과 노력의 결실이 바로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개인의 죄를 통회하고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을 강조하며 한국 교회에 강력한 영적 활력을 불어넣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을 기점으로 한국 개신교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1905년 약 5만 명이었던 신자 수는 불과 4년 뒤인 1909년에는 20만 명으로 급증했다. 특히 평양 지역의 성장은 놀라웠다. 전통적으로 평양은 조선의 정치 중심지였던 한양과 달리 상대적으로 중앙 권력의 영향력이 덜하고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유교적 이념으로 강력하게 무장된 양반 계층이 지배하던 삼남 지방과는 달리, 서울 이북 지역, 특히 평양은 새로운 사상과 종교에 대해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토양 위에서 개신교는 빠르게 확산되었고, 평양은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이렇게 성장한 개신교는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에 민족의 독립을 위한 항일 운동의 핵심 동력이 되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개신교 신자였으며, 항일 비밀결사 105인 사건으로 체포된 독립운동가 105명 중 92명 또한 개신교인이었다. 3.1 운동 과정에서 체포된 이들 중 기독교인의 비율은 17.6%(약 3천여 명)에 달할 정도로, 개신교는 민족의 수난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했다.


개신교의 이러한 사회적 동력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민주화 투쟁의 역사에서도 빛을 발했다. 1969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개신교계를 대표하여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1974년 발족된 NCCK 인권위원회는 1970년대와 1980년대 민주화 투쟁의 중요한 조직적 거점 중 하나로 기능하며, 고문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인권 침해 사례를 국내외에 알리며, 국가 폭력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기독교 정신에 기반한 NGO들의 활동 또한 두드러졌다. YMCA는 시민사회의 정치 교육, 노동자 계몽, 지역사회 개발 운동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YWCA는 여성 인권 신장, 소비자 운동, 반핵 및 평화 운동 등에서 선구적인 족적을 남겼다.


군사독재 정권의 서슬 퍼런 감시와 탄압 속에서 교회는 민주화 운동가들에게는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자, 억압받는 이들에게는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수많은 민주화 선언과 기자회견이 교회에서 이루어졌으며,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탄압받던 시민들과 학생들은 독재정권의 폭력을 피해 교회에 몸을 숨기기도 했다. 이처럼 개신교는 한국 사회가 권위주의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풍부한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했다.


한편, 일제 강점기에는 상대적으로 저항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천주교 역시, 해방 이후 독재정권 하에서는 정부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며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한국 천주교의 이러한 변화와 저항 정신이 두드러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한국 천주교의 최고 지도자였던 김수환 추기경이 독재정권에 맞서는 일에 앞장섰던 영향이 컸다. 1971년 12월 24일 성탄 전야, 전국으로 생방송되던 미사 강론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까?"라며 박정희 정권의 영구 집권 의도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그야말로 '돌직구'를 날렸다. 이 발언으로 인해 성탄 미사 생중계가 즉각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1974년에는 원주교구장이었던 지학순 주교가 "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발표하여 징역 15년형을 선고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되었는데, 이 사제단은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깊은 발자취를 남기게 된다. 특히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명동성당은 시위대 학생과 노동자들의 마지막 보루였다. 경찰 병력이 성당 진입을 시도하자, 김수환 추기경은 "제가 하는 말을 정부 당국에 전해주십시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찾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라는 단호한 발언으로 독재정권의 폭력적인 진압을 막아섰다. 이 일화는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처럼 독재정권의 엄혹했던 시기, 천주교와 개신교는 억압받고 소외된 이들의 든든한 피난처였으며, 불의에 항거하는 도덕적 저항의 중심지였고, 짓밟힌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정의의 메아리였다. 한국 현대사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헌신과 기여를 제외하고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온전히 서술하기 어려울 정도다.


한국의 천주교와 개신교가 보여준 자생적 수용과 급격한 성장은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비서구권 국가에서 기독교가 주요 종교로 자리 잡은 사례는 대부분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 지배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이러한 식민 지배를 통한 강제적 이식이 아닌, 자발적 수용과 선교를 통해 인구의 약 30%가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 포함) 신자가 된, 거의 유일무이한 사례다. 식민지 시대가 종식된 1950년대 이후의 기독교 성장세를 비교해도 한국의 사례는 독보적이다. 일본, 대만, 태국, 말레이시아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기독교가 소수 종교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성장이 정체된 반면, 한국에서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과연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냈을까?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그 근저에는 유교 문명 특유의 '종교적 유연성'이 자리하고 있다. 유교는 그 자체로 강력한 생활 규범이자 통치 이념이었지만, 핵심적인 유교적 가치와 질서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타 종교나 사상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중국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은 '전례 논쟁'이 발생하기 이전까지는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비교적 자유롭게 선교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조선에서 천주교가 극심한 박해를 받았던 것도, 조상 제사를 우상 숭배로 규정하고 금지한 로마 교황청의 결정이 조선 사회의 근간이었던 유교적 전통과 정면으로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허들은 조선 왕조의 멸망과 함께 유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점차 낮아지기 시작했다.


정치 이념과 깊숙이 결부되어 있던 유교는 조선의 멸망과 함께 그 권위를 상당 부분 상실했고, 심지어 망국의 책임론에 휩싸이며 더욱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에 일종의 '종교적 공백 상태'를 야기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유교적 기반이 상대적으로 취약하고, 상업 활동을 통해 새로운 사상에 대한 수용성이 높았던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개신교의 대부흥운동이 원산과 평양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지역적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시험 제도로 인해 고도로 발달했던 조선의 문자 문화와 상대적으로 높은 식자율 또한 기독교 확산에 중요한 이점으로 작용했다. 조선 후기에는 신분제의 동요와 함께 양반의 수가 급증하고, 평민층 자제들도 서당 교육을 통해 글을 익히는 경우가 흔해졌다. 이는 선교사가 직접 방문하여 복음을 전파하지 않더라도,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접하고 이해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덕분에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자발적으로, 그리고 비교적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여기에 또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 있는데 바로 성경의 한글 번역이었다. 기존의 유교 경전이나 불교 경전은 대부분 어려운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던 반면, 기독교는 초기부터 성경을 비롯한 주요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했다. 이는 지식인뿐만 아니라 평범한 민중들까지도 쉽게 성경을 접하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기독교 대중화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처럼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한국 기독교의 독특한 성장은, 종교에 대한 유연한 태도와 발달된 미디어 문화라는 기반 위에서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 후기부터 시작된 서학의 수용과 기독교의 전래는 한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초기에는 학문적 호기심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신앙 공동체로 발전했고, 때로는 극심한 박해를 견뎌내며 순교의 피를 흘리기도 했다. 개항 이후 본격적으로 유입된 개신교는 교육과 의료를 통해 근대 문물 수용의 통로가 되었으며, 일제강점기와 군부독재 시절에는 민족의 독립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린 기독교는 서구 문물의 수용을 촉진하고, 민주주의와 산업화 과정에 필요한 지적, 윤리적 기반을 제공하는 데 기여했다. 그 결과 오늘날 대한민국은 압축적인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달성한 모범적인 국가로 평가받는 동시에, 세계적으로도 유례없이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다채로운 종교 지형을 가진 나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한국 문명 스물한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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