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양반 되기 열풍이 한국 민주주의를 만들었다

조선의 유산 계급 지향

by 김욱

서구 사회가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격렬한 계급투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기존의 신분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 구조를 모색하던 시기, 지구 반대편의 조선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혁명과 사상적 전환을 통해 서구에서 계급의 견고한 장벽이 허물어지고 세습 귀족 계급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갈 때, 오히려 조선에서는 지배층을 형성하던 양반 계급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조선시대 국가 운영의 기초 자료였던 호구 장적(戶籍)은 이러한 양반 계급의 비정상적인 팽창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당시 호구 파악을 위해 3년마다 정기적으로 조사하여 작성된 이 장적 기록들은 조선 후기 사회 변동의 생생한 증거를 담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경상도 대구부의 경우 1690년(숙종 16년) 전체 가구 중 양반 호(戶)의 비율이 9.2%에 불과했으나, 약 170년이 흐른 1858년(철종 9년)에는 무려 70.3%까지 치솟았다. 이는 한 세기가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양반의 비율이 7배 이상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인접한 언양현(현재 울산광역시 언양읍 일대)의 상황은 더욱 극적이다. 1711년(숙종 37년) 양반 호의 비율은 12.4%였으나, 1861년(철종 12년)에는 80.2%로 폭증하여, 해당 지역의 다섯 가구 중 네 가구가 양반으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수치는 특정 지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약간의 지역적 편차는 존재했지만, 조선 후기 양반 계급의 폭발적인 증가는 전국적으로 나타난 보편적인 경향이었다. 다양한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볼 때, 조선 후기 전체 인구 중 양반이 차지하는 비율은 적게는 30%에서 많게는 70%에 육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사회에서 양반은 단순한 상류층을 넘어, 학문과 관직을 독점하고 사회 규범을 주도하는 명실상부한 지배계급이었다. 한 사회의 지배계급이 전체 인구의 과반수를 넘거나 그에 육박하는 상황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대단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이는 조선 사회가 지배계급으로의 진입 문턱이 상대적으로 낮았거나, 혹은 지배계급의 지위를 획득하려는 사회적 열망이 매우 강력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처럼 양반 계급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을까?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과거제도라는 공인된 신분 상승 통로의 확대다. 과거는 능력과 학식을 통해 관직에 나아가고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정당한 방법이었다. 조선 초기 과거 제도는 3년마다 33명의 급제자를 선발하는 식년시(式年試)가 그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정기 시험 외에도 국가적 경사나 특별한 필요에 의해 시행되는 별시(別試), 증광시(增廣試), 알성시(謁聖試) 등 다양한 형태의 비정기 특별 과거가 매우 자주 시행되었다.


특히 무과(武科) 급제자가 급증했다. 문반(文班) 중심의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는 국방의 필요성과 더불어 신분 상승을 원하는 이들의 수요가 맞물리면서 무과 합격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때로는 한 번의 무과 시험에서 수천 명을 선발하는 경우도 있어, 이를 두고 '만과(萬科)'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였다. 문과에서 여러 차례 고배를 마신 응시생들이 상대적으로 문턱이 낮은 무과로 방향을 틀어 합격하기도 했다. 후기로 갈수록 과거제도는 더 많은 이들에게 양반으로 편입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양반의 문을 여는 또 다른 중요한 수단으로 공명첩(空名帖)이 있었다. 공명첩은 글자 그대로 이름 쓰는 칸이 비어 있는 임명장으로, 국가 재정이 궁핍해졌을 때 재물을 납부한 사람에게 그 대가로 수여되었다. 이를 통해 수여자는 실제 직무가 없는 명예직이나 산직(散職)을 얻었지만,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고 해당 신분에 따르는 일정한 혜택도 누릴 수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공명첩이 발행된 사례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겪으면서 국가 재정이 파탄 지경에 이르자, 공명첩은 중요한 비상 대책으로 적극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명첩 발행은 조선 후기 내내 지속되었으며, 때로는 남발되는 경향까지 보였다. 조선 후기의 문예부흥기를 이끌었던 정조 재위 기간(1776~1800년)에만 무려 23,310장의 공명첩이 발매되었다. 공명첩의 확산은 양반이라는 지위가 더 이상 혈통이나 학문적 성취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돈과 노력을 통해서도 접근 가능한 계급이라는 인식을 사회 전반에 심어주었다. 이러한 상상력은 조선의 역동성을 증폭시키는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양반 계급의 확대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존재는 바로 재지양반(在地兩班)이었다. 재지양반은 조선시대에 과거를 통해 중앙 관계에 진출하여 관직 생활을 하기보다는, 지방에 세거(世居)하면서 해당 지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양반층을 의미한다. 이들은 부계(父系) 혈연을 중심으로 동성(同姓) 마을을 이루어 집단적인 세력을 형성했으며, 지역 사회의 서원이나 향교를 장악하고 향약을 주도하는 등 유교적 교양과 생활양식을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권위를 공고히 했다. 또한, 상당한 규모의 토지를 소유하며 경제적 기반을 다졌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 사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과시하고 유지했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재지양반들이 과거 합격이라는 공식적인 국가의 승인 절차 없이도, 지역 사회 내에서의 세력과 영향력을 바탕으로 사실상 양반 계급의 지위를 획득하고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국가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 일종의 지역 기반 사회 운동 또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계급이 형성되고 재생산되었음을 시사한다. 지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유교적 권위를 통해 양반 신분을 인정받는 이러한 사회적 승격 방식은 해당 지역에서의 지속적인 양반 재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재지양반의 존재와 그들의 생활 방식은 주변의 하층민들에게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성장한 평민이나 중인 계층은 재지양반의 유교적 교양과 생활양식을 적극적으로 모방하며 자신들도 양반으로 인정받고자 노력했는데, 이러한 현상을 '모칭유학(冒稱幼學)'이라한다. 즉, 정식으로 유학(幼學, 과거를 준비하는 학생) 신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유학이라 칭하며 양반 행세를 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양반 계층은 더욱 빠른 속도로 확대되었다. 조선 후기, '양반 되기' 열풍은 말 그대로 조선 팔도를 휩쓸었고, 너도나도 양반을 자처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렇듯 조선이 계급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반면, 동시대 서구 사회는 계급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서구에서는 사회 유동성의 증대가 기존 계급 질서를 잠식하며 해체로 이끌었지만, 한국에서는 오히려 계급 자체의 확장성이 사회 전체를 장악하는 독특한 양상이 전개되었다. 결과적으로 서구에서는 세습 귀족이 점차 소멸했지만, 한국에서는 이론상 '모두가 양반'이 될 수 있는 사회로 변모해갔다.


그렇다면 서구는 왜 조선처럼 계급의 문을 쉽게 열지 못했을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서구의 귀족 계급이 혈통과 신성에 기반했기 때문이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여겨지는 혈통과 그에 따른 특권은 외부인의 진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폐쇄적인 장벽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혈통과 신성으로 단단히 닫힌 문은 쉽게 열릴 수 없었고, 결국 부르주아 혁명과 산업화라는 거대한 사회적 유동성에 떠밀려 귀족 계급 자체가 해체되거나 그 영향력이 급격히 약화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서구에서 계급은 개인의 사회적 기능이나 노력, 성취에 대한 보상이라기보다는 태생적으로 결정되는 존재의 본질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상황은 달랐다. 과거제도라는 능력주의적 요소가 비록 제한적이었을지언정 계급 형성의 중요한 축으로 작동했기에, 개인의 능력과 노력을 통해 계급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회적 믿음이 존재했다. 따라서 굳이 계급 자체를 파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개인의 노력으로 계급의 문을 열거나, 혹은 그것이 어렵다면 국가가 문을 조금 더 넓혀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조선과 서구의 계급 질서 변동에 상이한 경로를 부여한 것이다.


조선이 서구보다 상대적으로 쉽게 계급의 문을 열 수 있었던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양반 계급의 성격 차이, 특히 토지 소유권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서구의 귀족은 광대한 토지를 세습적으로 소유하고 그 토지에 대한 봉건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영주(領主)였다. 그들의 경제적 기반과 정치적 권력은 토지 소유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반면, 조선의 양반은 서구의 귀족과 같은 절대적인 토지 영유권자가 아니었다. 물론 많은 양반이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고 지주로서 경제적 부를 누렸지만, 법적으로 조선에서 모든 토지의 최종 소유권은 국왕에게 귀속된다는 왕토사상(王土思想)이 지배적이었다. 양반은 일반 평민이나 심지어 노비와도 마찬가지로 국가로부터 토지를 분배받거나 매매를 통해 소유권을 확보하는, 동등한 위치의 토지 소유 주체였을 뿐이다.


조선에서 토지 영유권의 정점에는 오직 임금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서구의 경우, 왕뿐만 아니라 수많은 귀족 역시 강력한 토지 영유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의 권리는 왕권과 경쟁하거나 때로는 이를 능가하기도 했다. 서구 근대사의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러한 귀족들의 토지 영유권을 해체하고 국가 중심의 토지 제도를 확립하는 과정이었다. 부르주아 혁명은 귀족의 정치적 특권뿐 아니라 경제적 기반인 토지 소유의 특권까지 폐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렇기에 서구에서 계급의 해체는 토지 소유 구조의 근본적인 변혁과 맞물려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조선의 양반은 이러한 봉건적 토지 영유권이 없었기에, 신분 변동이 토지 소유권의 근본적인 재편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것이 계급의 문을 서구보다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열 수 있었던 구조적인 배경이다.


그렇다면 같은 유교 문명권이었던 중국은 왜 조선과 같은 '계급 지향'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중국은 조선과 달리 광대한 영토를 가진 다민족 제국이었으며, 종교적으로도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었다. 유교는 물론 중요한 통치 이념이자 지식인 계층의 핵심 사상이었지만,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유일무이한 절대 규범은 아니었다. 도교, 불교 등 다양한 사상과 종교 전통이 사회 전반에 걸쳐 혼재하며 공존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8세기 중국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건륭제(乾隆帝, 재위 1735~1796)는 티베트 불교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그는 티베트, 몽골, 만주족 등 유교 문화권과는 거리가 있는 이민족들의 정치적 충성심을 확보하고 제국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문화적·종교적 수단으로 티베트 불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다원적인 통치 환경 속에서, 조선의 양반과 같은 특정 계층(중국의 경우 사대부)을 전국적인 문화 모델로 삼아 그 수를 인위적으로 늘리고 생활양식을 확산시키는 것은 통치 전략으로서 큰 의미를 가지기 어려웠다. 중국은 설령 사대부 인구가 늘어난다고 해도, 그것이 곧바로 국가 통합 강화나 통치 효율성 증대로 이어질 수 있는 문명적 기초가 부재했다. 다원적 제국이라는 구조, 복수의 종교와 이념의 공존, 광활한 국토에서 비롯되는 중앙과 지방 간의 물리적·문화적 거리 등은 사대부의 생활양식을 보편화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고, 그러한 확장을 시도할 실익 또한 크지 않았다.


조선은 중국과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 조건이었다. 협소한 영토,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 그리고 무엇보다 성리학이라는 단일한 국가 이념이 사회 전반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조선에서는 양반을 국가적인 문화 표준이자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양반 계층의 생활양식과 가치관을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키는 것이 곧 국가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통치의 안정성을 높이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단일 이념 국가 조선에서 양반은 단순한 지배계급을 넘어, 과거를 통해 선발된 유능한 관료이자 동시에 국가 이념인 성리학의 가치를 전파하고 실천하는 일종의 '이념 전도사' 역할을 수행했다.


따라서 국가가 나서서 과거 시험을 확대하고 공명첩을 발행하는 등의 방식으로 양반의 수를 늘리는 것은, 한편으로는 관료 충원의 필요성을 만족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 백성들의 신분 상승 욕구를 국가가 충족시켜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는 사회 구성원들의 불만을 완화하고 국가 체제에 대한 자발적인 동조를 이끌어내는 사회 통합의 기제로도 작동했다. 조선 특유의 사회·문화적 환경이 양반 계층의 확산을 단순한 신분 변동을 넘어선 국가적 차원의 통치 전략으로 기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이러한 계급 지향이 곧바로 부의 증대나 실질적인 사회경제적 계층 이동의 활성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양반의 수가 폭증하면서 한정된 관직과 토지를 둘러싼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많은 양반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잔반(殘班)' 현상도 심화되었다. 그렇다면 조선의 계급 지향은 결국 무가치한 명예와 상징자본만을 추구했던 허망한 몸짓이었을까? 혹은 체면과 허례허식에만 치중했던 조선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에 불과했을까?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조선의 계급 지향은 전혀 예상치 못한, 그러나 매우 중요한 긍정적 효과를 파생시켰다. 그것은 바로 대중의 문화적·정치적 수준의 집단적인 상승이다. 비록 양반이 된다는 것이 직접적인 물질적 풍요를 보장해주지는 못했을지라도, 양반이 되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열망과 노력은 조선 사회 전반에 유교적 교양을 광범위하게 보급하는 결과를 낳았다. 양반의 언행과 생활양식을 모방하고, 그들의 학문과 사상을 학습하려는 과정 속에서 유교적 가치와 지식은 점차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 깊숙이 체화되었고, 이는 문명적 교양 자산으로 축적되었다.


유교 이념의 핵심은 개인의 수양을 넘어 사회와 국가를 올바르게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치 철학에 있다. 조선 후기, 양반을 지향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유교적 정치 이념은 소수의 지배층을 넘어 훨씬 더 넓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확산되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단순한 통치의 대상을 넘어, 국가와 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할 의무와 권리를 지닌 "교양 있는 정치 주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로 요약되는, 개인의 도덕적 수양에서 시작하여 가정을 안정시키고, 나아가 나라를 다스려 천하를 평화롭게 한다는 유교적 이상의 보편화는 자연스럽게 대중의 정치 참여에 대한 열망과 당위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서구사회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선구적이었던 3·1운동은 바로 이러한 문화적 토양 위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계층의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일제의 폭압에 항거했던 3·1운동은, 바로 조선의 계급 지향 과정에서 쌓인 대중의 유교적 교양 덕분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비록 무한정한 자가 확장을 통해 양반이라는 전통적 계급은 그 경계가 모호해지며 사실상 해체되었지만, 그 계급이 추구하고 확산시켰던 유교적 교양은 질곡의 시대를 넘어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지탱하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문화적 뿌리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 교양은 훗날 한국 사회가 근대적 전환기를 맞이했을 때, 서구의 시민의식과는 다른 독특한 한국적 시민의식을 형성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조선은 지배계급인 양반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정치적·문화적 교양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한국 문명 특유의 '계급 지향의 역설'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양반 지향의 유산은 해방 이후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도 서구 사회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독특한 양상을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민주화 투쟁의 주도 세력이 서구처럼 노동계급이나 부르주아 계급이 아니라 '학생'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1980년대 군부독재에 맞서 한국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학생운동은 핵심적인 동력이었다. 당시 대학 캠퍼스는 단순한 지식 전달의 공간을 넘어, 치열한 정치적 각성과 윤리적 실천이 이루어지는 장이었다. 학생들은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 행동에 나서는 것을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일종의 '도덕적 책무'처럼 여겼다. 누군가는 앞장서서 구호를 외쳤고, 누군가는 자욱한 최루탄 속에서 시위를 이어갔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수배와 구속, 고문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감내했다. 그 모든 격렬한 행동의 바탕에는 단순한 분노나 즉흥적인 감정을 넘어선, 깊은 윤리적 자기 강박과 시대적 소명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학문하는 유생(儒生)들이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오히려 독려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임금에게 올리는 유생들의 집단 상소는 때로는 정국의 흐름을 바꾸는 주요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 한국의 학생운동은 바로 이러한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비판적 지성과 실천적 참여의 교양이 현대적 형태로 다시 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대학생들은 단지 억압적인 정치 현실에 대한 반감만으로 거리로 나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도서관에 앉아 책만 읽는 것이 과연 지식인으로서 옳은 일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이러한 자기 성찰은 유교적 교양에 깊이 뿌리내린 것이었다. 유교에서 지식은 단순한 앎을 넘어 사회적 책임을 수반하는 것이었고, 배움은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개혁에 대한 강렬한 의지였다. 공부하는 사람이 자신이 속한 시대의 아픔과 모순을 외면한다면 그는 지식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라 여겨졌다. 그 자격은 현실 문제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용기 있는 실천을 통해 입증될 수 있었다. 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학생은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분위기, 정치적 문제에 대한 침묵은 교양 있는 사람의 무책임한 방관이라는 도덕적 감각은 단연코 한국 문명이 낳은 특수한 역사적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종종 조선 문명의 정체성과 전근대성을 비판하면서 그 근거로 노비제를 드는 경우가 있다. 조선이 엄격한 신분 사회였으며, 이로 인해 사회 전체의 유동성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노비제는 조선만의 특수한 제도가 아니라,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전근대 농경 사회가 공통으로 존재했던 피지배층 제도였다. 물론 조선의 노비 규모나 처우에 대한 비판은 타당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조선 사회 전체를 '정체된 사회'로 규정하는 것은 단편적인 시각이다.


오히려 사회 유동성이라는 측면에서 조선을 바라본다면, 노비제의 존재보다 앞서 살펴본 '양반의 범람' 현상이 훨씬 더 주목할 만한 요소다. 세계 어느 문명사에서도 특정 지배 계급을 자처하거나 그렇게 인정받는 인구가 전체의 절반을 넘거나 그에 육박했던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인류사적으로 매우 이례적인 문명 현상이 바로 조선 후기에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조선은 결코 사회 유동성이 낮은 정체된 국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동시대 그 어느 사회보다 계층 이동의 욕망이 강하게 분출했고, 그 결과 사회 전체가 역동적으로 요동쳤던 사회라고 평가할 수 있다. 조선이라는 문명을 규정짓는 핵심적인 특성은 ‘노비'가 아니라 '양반' 또는 '양반 지향성'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조선은 폐쇄적이고 정체된 신분 사회가 아니라, 비록 완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교육과 교양, 그리고 때로는 경제력을 통해 상향 이동이 가능했던, 혹은 가능하다고 믿었던 사회였다. 사회 구성원들은 위로 향하려는 강렬한 이동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것이 조선 후기 사회의 중요한 동력이었다.


이렇게 조선 후기의 독특한 '계급 지향'과 그로 인한 사회적 역동성을 이해할 때, 비로소 3·1운동에서부터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 그리고 두 차례에 걸친 대통령 탄핵에 이르기까지 현대 한국 사회가 보여준 엄청난 역동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조선 후기, 양반이 되고자 했던 대중의 거대한 에너지는 비록 실질적인 부의 분배나 완전한 계층 소멸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형성된 높은 수준의 정치의식과 사회 참여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국가 이념과 만나역동성이 폭발한 것이다.


조선의 계급 지향은 현대 한국 사회에 강력한 평등 의식을 남겼다. 계급을 넘을 수 없는 견고한 선으로 여기며 그 안에서의 권리 투쟁에 집중했던 서구의 역사와 달리, 계급의 경계 자체가 유동적이었고 심지어 소멸에 가까울 정도로 확장되었던 독특한 역사를 경험했던 한국인들은, 특정 계급으로 자신을 규정하거나 타인에 의해 구분되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졌다. 서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계급적 정체성에 기반한 정치적·사회적 분화가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구의 '계급투쟁'보다 오히려 조선의 '계급 지향'이 사회 유동성에 더 강력한 동력을 제공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든다. 이는 조선 문명이 현대 한국에 남긴 또 하나의 중요한 역설적 유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문명 열아홉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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