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의 강력한 공론 전통

조선의 유산 공론

by 김욱

한국 문명이 세계 여타 문명권과 비교하여 독보적으로 강력한 정치적 전통을 구축했다면, 그건 바로 ‘공론’이다. 유교는 군주의 통치 권력이 신성이나 타고난 혈통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덕(德)’과 ‘의(義)’에 기반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덕은 포용적 리더십과 도덕적 수양을 의미하며, 의는 공평무사한 원칙에 따라 국가를 운영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살피는 정의로운 정치를 뜻했다. 따라서 조선의 군주는 자신의 모든 언행과 정책 결정이 이러한 덕과 의의 가치를 혹여나 거스르지 않았는지, 신하와 백성들로부터 끊임없이 검증받고 평가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군주 개인은 결코 완벽한 성인일 수 없으므로, 반드시 신하들의 충언과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겸허한 자세를 통해 비로소 도덕적 통치를 완성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유교 정치철학의 핵심이었다. 즉, 왕은 사사로운 감정이나 특정 세력의 이익이 아닌, 국가 공동체의 보편적이고 정의로운 의견, 바로 ‘공론’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유교적 공론의 이상을 현실 정치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몰두했던 나라가 바로 조선이다.


공론이 한 나라의 정치 과정에서 생명력을 갖고 활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권력 정점에 있는 군주의 태도가 중요했다. 조선은 군주에게 신하들이 올리는 비판과 조언, 즉 ‘간언(諫言)’을 너그럽게 수용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심지어 신하의 간언에 사실관계의 오류가 있거나 표현이 다소 과격할지라도,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용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간언에 대한 관용이 보장되어야 공론 형성의 장이 위축되지 않고, 다양한 의견이 자유롭게 오가는 ‘언로(言路)’가 더욱 넓어져 막힘없이 소통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들을 줄 아는 임금’, 즉 신하와 백성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 자질은 유교 정치에서 공론의 주재자인 군주가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도덕적 자격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군주가 열린 마음으로 언론을 수용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납간(納諫)’이라고 칭했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납간의 자세를 충실히 실천한 세종, 성종, 정조와 같은 왕들은 후대에 길이 칭송받는 성군(聖君)으로 기록되었다. 반면, 귀를 닫고 신하들의 충언을 억압하며 독단적인 통치를 행했던 연산군이나 광해군은 폭군으로 역사에 그 오명을 남겼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선비를 숙청하며 언로를 차단했고, 광해군 역시 비판적인 신하들을 탄압하며 공론의 장을 위축시켰다.


그러나 군주의 개인적인 태도와 도덕적 다짐만으로는 공론의 활성화와 지속성을 온전히 보장할 수 없었다. 만약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납간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언로를 탄압하는 왕이 연이어 왕위를 계승한다면, 어렵게 쌓아 올린 공론의 전통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공론의 장이 안정적으로 지속되고 국가 운영의 핵심 원리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법과 제도가 필수적이었다. 조선은 바로 이러한 법과 제도적 장치를 매우 잘 갖춘, 동시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강력한 언론권을 보장한 나라였다. 대표적인 기관이 바로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 홍문관(弘文館)으로 구성된 언론삼사(言論三司), 또는 대간(臺諫)이라 불리는 제도다. 사간원은 주로 국왕의 잘못을 간쟁(諫爭)하는 역할을, 사헌부는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고 탄핵하는 풍헌(風憲)의 역할을, 홍문관은 경서와 사적의 관리, 문한의 처리, 왕의 자문에 응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때로는 정책 비판에도 참여했다. 이들 언론삼사에게는 국왕과 조정의 대신들에게 백성과 사림의 공론을 가감 없이 전달하고,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부당함과 불합리함을 비판할 수 있는 막중한 권한과 책임이 부여되었다.


대간으로 불린 언론삼사의 관리들은 비록 직접적인 행정 명령권이나 군사 지휘권 같은 실질적인 권력은 갖지 못했지만, 그 어떤 고위 대신보다도 국왕에게 강력하고 직설적으로 간언할 수 있는 특수한 정치적 지위를 누렸다. 그들의 비판은 때로는 국왕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그 발언의 근거가 사사로운 이익이 아닌 ‘공론’에 있다는 정당성을 확보했기에 함부로 억누를 수 없었다. 조선 사회에서 ‘공론’은 때로는 국왕의 명령보다도 상위에 있는 정치적·도덕적 정당성의 최종 근거였다. 만약 왕이 잘못된 판단을 하거나 부당한 명령을 내릴 경우, 대간이 이를 지적하고 바로잡도록 노력하는 것이 핵심적인 의무이자 정통적인 정치 질서였다. 성종 대의 문신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비궁당기(匪躬堂記)>에는 이러한 대간의 책무가 매우 비장하게 묘사되어 있다. 대간은 임금의 역린을 건드려 죽음이나 형벌을 받게 될지라도, 국가와 백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간언해야 하는 존재임을 역설했다.


“대간이라는 것은 조정의 공론을 맡고 있는 곳이다. 임금은 구중궁궐의 높은 곳에 있고 억만 백성의 위에 있으므로, 그 높음은 해와 달에 비할 것이 아니며, 그 위엄은 천둥과 벼락에 비할 뿐만이 아니다. 그런데도 천안(天顔)에 항거하고 용린(龍鱗, 용의 비늘, 즉 임금의 노여움)을 거스르는 일은 오직 대간만이 그것을 할 수 있으며, 금문(金門)을 밀어 열고 옥지(玉墀)에서 부르짖으며 호소하는 일도 오직 대간만이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임금의 좌우에 서서 임금과 더불어 옳고 그름을 다투어 임금이 옳다고 하면 대간은 옳지 않다고 하며, 임금이 옳지 않다고 하면 대간은 옳다고 하여 위엄을 무릅쓰고 범하면서 피하지 아니하며, 강경하여 굽히지 아니하며, 비록 머리가 부서질지라도 사양하지 아니하는데, 어찌 형벌을 피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옷자락을 잡고 간한 일을 되풀이할 수 있으니, 난함(欄檻, 궁궐의 부러진 난간)이 부러지는 일만 어찌 홀로 아름답겠는가? 이런 경우는 비록 비궁(匪躬, 자신을 돌보지 않음)이라고 하더라도 가하다.” (『성종실록』 권161, 1483년(성종 14년) 12월 7일)


그런데 조선은 앞서 언급한 언론삼사와 같은 당대의 강력한 공론장 구축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조선은 더 나아가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역사 기록을 통해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를 향한 ‘역사의 공론장’까지 치밀하게 만들었다. 실록은 해당 왕의 재위 기간 동안 일어났던 모든 중요한 사건과 언행을 기록한 공식적인 역사서임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왕은 그 내용에 일절 개입할 수 없도록 철저히 차단되었다. 실록 편찬의 기초 자료가 되는 사초(史草)를 작성하는 사관(史官)은 독립적인 지위에서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할 권한을 가졌다. 사관은 때로는 왕이 출입을 막은 공간까지 침범하여 상황을 기록하려 했고, 왕이 “이것만은 기록하지 말라”고 간청하거나 위협하는 말조차도 여과 없이 기록으로 남겼다. 이 때문에 수많은 조선의 왕들이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모든 것을 기록하는 사관의 존재를 극도로 의식하여 말과 행동을 조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관은 왕의 작은 잘못이나 인간적인 허점까지도 숨기지 않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려 노력했으며, 때로는 특정 사안에 대해 사관 자신의 비판적인 평가(사론, 史論)까지 덧붙여 남겼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왕은 절대 자신의 시대에 편찬되는 사초나 실록의 내용을 열람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실록은 해당 임금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이전 왕의 사초를 모아 국가적인 사업으로 편찬되었다. 다음 세대의 왕과 신하들에게 교훈을 남기는 거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현대의 언론과 정치인의 관계처럼, 조선의 왕은 실록 앞에서는 철저한 취재 대상이자 역사적 평가를 받는 ‘약자’의 위치에 놓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후에나 평가받게 되는 실록을 왕은 왜 그토록 두려워했을까? 권력의 정점에 있는 절대군주에게 사후의 역사적 평가가 당장의 현실 정치보다 더 큰 무게감으로 다가왔을지,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그 두려움이 잘 체감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평생을 유교 경전의 가르침과 역사적 교훈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성장하고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의 왕에게, 실록은 단순한 과거 사실의 기록이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치적이 후대에 영원히 박제되어 평가받는 준엄한 ‘역사의 법정’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선대 왕들의 실록을 통해 그들의 성공과 실패, 영광과 오욕의 기록을 듣고 보면서, 언젠가 자신에게도 똑같이 엄정한 역사의 심판이 내려질 것임을 스스로 성찰하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모든 언행을 한 자 한 자 기록하는 사관의 존재는 왕에게 자신이 단지 현재를 살아가는 개인이 아니라, 장구한 역사 속에서 평가받는 ‘실존적 존재’임을 끊임없이 인식시켜 주었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대간이 현재의 공론으로, 미래에는 사관이 기록한 역사의 공론으로 왕을 압박했다. 여기에 더해, 왕은 매일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야간에 이르기까지 하루에도 여러 차례 경연(經筵)이라는 학문 토론과 국정 운영 논의의 장에 참석해야 했다. 경연에서 신하들은 유교 경전과 역사적 사례를 들어가며 왕을 교육하고, 때로는 날카로운 질문과 비판으로 왕을 몰아붙였다. 이처럼 대간의 직언, 사관의 기록, 경연에서의 토론이라는 씨줄과 날줄로 촘촘하게 짜인 공론의 그물망 속에 조선의 왕은 존재했다.


조선의 공론장은 궁궐 안의 제도화된 장치만으로 국한되지 않았다. 공론은 궁궐의 담장을 넘어 훨씬 더 넓은 사회적 기반 위에서 형성되고 작동했다. 조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재야의 관료나 과거를 준비하는 유생들, 심지어는 성균관이나 지방 향교의 학생들까지도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통로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왕에게 올리는 글, 상소(上疏)였다. 유생들은 국가 정책의 문제점, 관리들의 비리, 민생의 어려움, 심지어 왕의 부덕함까지 지적하는 내용을 담아 상소문을 작성했다. 이렇게 작성된 상소는 승정원과 같은 공식적인 기관을 통해 왕에게 보고되었고, 왕은 이를 신중히 검토한 후 자신의 의견이나 처리 결과를 담은 ‘비답(批答)’을 내려 상소에 응답했다. 상소의 내용은 때로는 매우 직설적이고 비판적이어서 상소자가 처벌받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는 선비들은 자신의 의지와 비판 정신을 보여주기 위해 상소를 주저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상소 문화가 더욱 발전하여, 한두 명이 아닌 수천, 심지어 1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함께 연명하여 올리는 거대한 규모의 상소인 ‘만인소(萬人疏)’가 등장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1792년(정조 16년)에 사도세자의 신원 회복과 추숭을 요구하며 영남 지역 유생들이 올린 ‘영남만인소’였다. 이 상소에는 경상도 유생 이우를 비롯하여 무려 1만 57명이 서명하여 참여했다. 이러한 만인소는 단순히 의견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특정 사안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와 강력한 정치적 압력을 형성하는 역할을 했다. 현대 한국 사회의 촛불집회와 같이 다수의 시민이 참여하여 공론을 형성하고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문화의 원형적인 모습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상소의 영향력은 그것이 국왕에게 전달되어 특정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중요한 상소는 국왕에게 올라가는 동시에, 그 내용이 필사본 형태로 복사되어 마치 오늘날의 논평이나 성명서처럼 전국의 지식인 사회로 빠르게 유통되었다. 각 지역의 서원(書院)이나 향교(鄕校), 그리고 뜻있는 선비들의 사랑방에서는 이렇게 입수된 상소문을 함께 읽고 그 내용에 대해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중앙 정치의 현안이 곧바로 지방 지식인 사회의 공통된 관심사이자 공론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특정 상소는 단순한 개인의 의견을 넘어 광범위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여론을 조직하는 강력한 매개체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조선 사회가 비록 현대적인 대중 매체는 없었지만, 지식인 네트워크를 통해 상당히 높은 수준의 정보 공유와 공론 형성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대다수의 일반 백성들은 어땠을까? 이들은 공론장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던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조선은 일반 백성들 또한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격쟁(擊錚)’이다. 격쟁은 일반 백성이 임금의 행차 길목이나 궁궐 문 앞에서 징이나 꽹과리와 같은 타악기를 시끄럽게 쳐서 임금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 자신의 억울한 사연이나 건의 사항을 직접 구두로 호소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문자를 통한 상소가 어려운 백성들에게 주어진 직접적인 소통 수단이었다. 실제로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정조 재위 24년 동안 격쟁이 보고된 건수가 무려 1,490여 건에 달할 정도로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격쟁의 내용은 주로 지방 관리의 부정부패, 사적인 원한 관계, 경제적 어려움 등 다양했다. 격쟁이 너무나 빈번하게 발생하여 철종 대에는 격쟁을 임금이 행차할 때에만 할 수 있도록 제한을 두기도 했다.


이처럼 강력한 공론 전통은 조선을 당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언론의 나라’로 만들었다. 조선의 언론 전통은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 신문과 잡지의 등장, 일제강점기의 민족 언론 투쟁, 그리고 해방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의 언론의 역할로 이어져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박정희 유신 체제의 몰락 과정, 전두환 정권의 6월 항쟁을 통한 붕괴, 그리고 비교적 최근의 두 대통령의 탄핵에 이르기까지, 그 격동의 역사적 국면 이면에는 항상 부패와 비리를 파헤치고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언론의 끈질긴 보도가 있었다. 언론의 보도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그에 기반한 투쟁이 민주주의의 중요한 동력이었다.


근대 이후 수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비서구 국가들이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를 앞다투어 도입했지만, 그 성과는 나라마다 천차만별로 나타났다. 똑같은 의회 제도, 선거 제도, 정당 제도를 이식했는데도 어떤 나라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민주주의를 안착시킨 반면, 어떤 나라는 권위주의로 회귀하거나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으며 실패의 길을 걸었다. 그중에서도 한국은 서구의 선진국들조차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만큼 짧은 기간 안에 역동적인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나라로 평가받는다. 식민 지배와 전쟁, 가난과 분단이라는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한국은 치열하고 평화적인 ‘시민 저항’을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발전시켜 왔다. 이처럼 한국 민주주의가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성공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었던 근본적 동력은, 바로 조선 문명이 물려준 강력한 ‘공론 전통’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되기 훨씬 이전부터 한국 사회에는 권력을 비판하고 공적 담론을 형성하는 정치적 토양이 이미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서구 근대 시민 사회의 형성과 발전을 설명하면서 ‘공론장(public sphere, Öffentlichkeit)’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18세기 유럽에서는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과 더불어 신문, 잡지, 정기간행물과 같은 인쇄 산업이 발달하고, 살롱이나 커피하우스 같은 자율적인 토론 공간이 확대되면서 시민들이 국가 권력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공적 담론을 형성하고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해 이성적인 비판을 가하는 공론장이 출현했다. 이러한 공론장은 국가 권력을 감시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동력으로 작동하며 근대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공론 전통의 형성과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조선은 서구보다 오히려 더 빨랐거나 적어도 그 영향력에 있어서는 훨씬 더 컸다. 물론 조선의 공론은 주로 양반 사대부라는 제한된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 내용 또한 유교적 가치관의 테두리 안에 머물렀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서구의 부르주아 공론장이 국가로부터 독립된 시민사회 내부의 자율성을 강조했다면, 조선의 공론은 상당 부분 국가 제도 내에서 작동했다는 차이점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공론은 국가 권력의 정점에 있는 왕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정책 결정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며, 심지어 왕의 교체나 정치세력의 부침까지 가져올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수많은 정치학 교과서들은 민주주의를 설명할 때 주로 의회, 선거, 정당, 권력 분립과 같은 제도적 장치들을 중심으로 기술한다. 물론 이러한 제도들은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시스템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들이 단순히 형식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넘어 실제로 ‘민주적’으로 기능하고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려면, 그 제도들을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정교한 엔진과 튼튼한 바퀴, 세련된 차체를 갖춘 자동차라 할지라도, 실제로 그 자동차를 달리게 하는 것은 휘발유나 전기와 같은 ‘연료’다. 연료가 공급되지 않으면 자동차는 그저 값비싼 고철 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공론의 에너지’다. 만약 공론이 부재한다면, 선거는 정책과 비전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이미지와 인기에만 의존하는 인기투표로 전락할 것이며, 의회는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한 숙의의 장이 아니라 특정 지역이나 집단의 사사로운 이익을 교섭하고 나눠 갖는 이전투구의 장으로 변질될 것이다. 또한 정당은 뚜렷한 이념과 정책 없이 선거 때마다 유권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브랜드나 정치 기술자들의 집합체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결국 현대 민주주의의 성패와 그 질적 수준은 공론의 활성화 여부와 그 내용에 의해 결정된다. 공론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개방적이고, 다양한 의견들이 숙의적(熟議的) 과정을 거치며,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와 윤리적 기준을 지향할수록 그 사회의 민주주의는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 반대로 공론이 특정 세력에 의해 독점되거나, 감정적인 선동과 가짜뉴스에 의해 왜곡되고,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의 편향된 정보 속에 갇혀 파편화되어 있다면, 아무리 훌륭한 민주주의 제도를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용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는 단순히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제도가 의지하고 있는 사회적 에너지, 즉 공론의 질(質)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올바른 공론을 형성하는 능력이 곧 민주주의의 품질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하나의 제도나 이념만으로 완성될 수 있는 체제가 아니다. 권력 분립의 원칙, 법치주의, 대의민주주의, 그리고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 시스템 등 수많은 정치적 가치와 절차들이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야만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 서구의 경우, 이러한 다양한 가치와 제도들이 수 세기에 걸친 시행착오와 점진적인 사회 변화 속에서 천천히 발전해왔다. 그러나 한국은 해방 이후 서구식 민주주의를 급격하게 이식받았고, 그 제도를 운영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기반이나 시민적 경험도 매우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빠른 속도로 권위주의 체제를 극복하고 역동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해냈으며, 어느새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고 참여적인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 해답은 바로 한국 사회 깊숙이 내재된,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에너지인 ‘공론(公論)의 전통’이 강력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의회나 언론 같은 공식적인 제도가 독재나 불신으로 제 역할을 못 할 때, 사회는 광장이라는 대안적 공론장을 열어 여론을 형성하고 권력을 압박하는 방식으로 제도의 미비함을 스스로 보완해 나갔다. 이는 형식적 제도의 실패를, 살아있는 공론의 힘으로 극복해 온 한국 민주주의만의 독특한 저력이었다. 21세기 한국의 광장을 밝혔던 촛불시위는 바로 이러한 조선의 공론 전통이 서구의 민주주의 제도와 만나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업그레이드’시킨 장면이다.



한국 문명 열여덟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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