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 역사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여정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서문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제헌헌법 서문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바탕으로 건립되었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제헌헌법은 단순한 법률 문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민주주의의 뿌리를 천명하는 역사적인 선언이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서울의 태화관에서 대한 독립을 세계에 알리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시작되었다. 학생, 상인, 노동자, 농민 등 각계각층의 민중이 신분과 지역을 초월하여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평화적인 시위를 무자비하게 탄압했고,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가 목숨을 잃거나 투옥되고 부상당했다. 약 두 달간 이어진 이 운동에는 연인원 수백만 명이 참여했다. 이는 당시 한국 인구를 고려할 때 실로 엄청난 규모의 시민 항쟁이었다. 3·1운동은 한국 민중이 정치적 주체로서의 면모를 처음으로 드러낸 근대적인 혁명이었다. 이 운동은 한국인의 민족 자결 의지와 주권의식을 명확하게 세계에 알렸고 한국인의 가슴 깊이 민주주의의 씨앗을 심었다.
3·1운동의 뜨거운 열기는 곧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역사적인 결실로 이어졌다.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세계에 천명한 3·1운동의 여세를 몰아, 1919년 4월 11일, 상하이로 망명한 민족 지도자들은 민주공화제를 국체의 근본으로 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왕정이 아닌 국민이 주인이 되는 공화국을 선포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3·1운동은 이처럼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으며, 한국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유교적 민본주의 전통이 강했던 한국 사회에서, 3·1운동은 민본주의를 근대적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전통적인 사상에 더하여, 이제는 국민 스스로가 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3·1운동을 통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왕정에서 공화제로의 전환, 민권 선언, 삼권분립, 인권 보장이라는 임시헌장의 핵심 가치들이 해방 후 제헌헌법에서 1987년 민주화 헌법으로까지 이어진다. 임시정부 헌법은 한국이 어떻게 출발했고 왜 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텍스트다. 결국, 한국 민주주의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된 민주공화제의 정신적 기반과 실질적인 경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했지만 한반도는 곧바로 미소 양군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이념 대립과 국제 정세의 영향 속에서 1948년 남과 북에 각각 다른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국내외적인 명망을 지니고 있었지만, 점차 권위주의적 통치 행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6.25 전쟁을 거치면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정적을 탄압하고, 장기 집권을 위해 발췌개헌(1952), 사사오입 개헌(1954) 등 무리한 헌법 개정을 강행하며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국민들의 불만은 누적되었고, 마침내 1960년 3월 15일에 치러진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노골적인 부정선거가 자행되자 국민들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어 폭발하게 된다. 특히 마산 시위에서 실종된 고등학생 김주열 군의 시신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다에서 발견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전국적인 규모의 항거로 확산되었다.
1960년 4월 19일, 약 10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경무대(현 청와대) 앞으로 몰려가 "이승만 하야"와 "부정선거 다시 하라"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비무장 상태의 시위대를 향해 경찰은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180여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그러나 학생과 시민들은 총탄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4월 25일, 전국의 대학교수단 259명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며 거리 행진에 나선 것은 이승만 정권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유교 전통의 한국에서 지성의 상징인 교수들까지 정권의 부도덕성을 질타하고 나선 것은 더 이상 정권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결국 국민적인 저항과 국내외의 압력에 직면한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4·19 혁명은 ‘민주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가 단순한 명목상의 조항이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적인 가치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립 이후 최초로 시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값진 경험은 이어질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정신적 자산이 되었다. 특히 폭력 혁명과 군사 쿠데타가 빈번했던 제3세계 정치사 속에서, 민간 주도의 민주 항쟁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보기 드문 성공 사례였으며, 냉전과 탈식민, 비서구 문명권이라는 복잡한 세계사적 조건 속에서 ‘시민에 의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최초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4·19 혁명의 숭고한 정신과 시민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주주의의 시계는 또 다시 멈추게 된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 ‘국가 안정’과 ‘공산주의 위협 제거’라는 명분을 내세워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박정희는 1963년 민정 이양이라는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군부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이어갔다. 특히 1972년에는 자신의 장기 집권을 위해 국회를 해산하고 대통령 간선제, 긴급조치 발동권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더욱 강력한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유신 체제 하에서 비판적인 언론과 지식인, 학생, 시민들은 ‘긴급조치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무자비하게 탄압받았고, 사회 전체는 공포와 침묵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학생과 노동자, 재야인사, 종교계 인사들은 끊임없이 연대하여 독재 정권에 맞서 끈질긴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1979년, 박정희 정권의 철권 통치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도화선이 된 것은 바로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들불처럼 번진 부마민주항쟁이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유신 체제 반대 시위로 시작된 이 항쟁은 순식간에 일반 시민 수천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로 확산되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공공건물에 불을 지르고, 시청을 점거했으며, 경찰차를 전복하는 등 격렬한 저항을 펼쳤다. 항쟁의 불길은 10월 18일 마산 지역까지 번져나갔고, 박정희 정권은 10월 20일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정권 출범 이후 최대 규모의 도시 봉기이자, 억압적인 유신 체제에 대한 민중들의 전면적인 저항이었다. 이 항쟁은 더 이상 유신 체제가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박정희는 이러한 민심의 이반을 강압적인 통치로 억누르려 했지만, 오히려 정권 내부의 균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길고 어두웠던 유신 체제는 종말을 맞게 된다.
박정희 사망 이후 잠시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의 기대감이 감돌았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권력 공백기를 틈타 전두환, 노태우 등 군부 내 핵심 세력인 '신군부'가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12.12 사태)을 일으켜 군권을 장악했다. 신군부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열망을 짓밟고 권력 장악 시나리오를 착착 진행해 나갔다. 1980년 5월,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김대중, 김영삼 등 주요 정치인들을 체포하며 본격적인 권력 찬탈에 나섰다. 이러한 폭압적인 조치에 맞서 5월 18일, 광주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분연히 일어나 "계엄령 철폐",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을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것이 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시작이다.
평화적으로 시작된 시위에 대해 신군부는 공수부대 등 계엄군을 투입하여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잔혹한 방식으로 시민들을 학살했다. 총검으로 찌르고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했으며, 심지어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된 헬기에서 시민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은 스스로 시민군을 조직하여 무기고를 점거하고 계엄군에 맞서 열흘간 처절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철저히 차단된 채 고립된 광주는 결국 5월 27일 새벽,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의 무력 진압으로 함락되고 말았다. 공식적인 발표 외에도 수많은 시민들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었고, 부상자와 구속자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다. 그러나 동시에, 국가 폭력에 맞선 시민들의 용감한 연대와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숭고한 투쟁이었으며,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도덕적 기초이자 중요한 정치적 이정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80년대 내내, 5·18의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핵심적인 의제였다. 광주라는 한 지역에서 시작된 항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 사회 전체가 그 아픔을 공유하고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더욱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1980년대 학생운동, 노동운동, 종교계, 지식인들은 광주를 기억의 중심에 놓고 더욱 강력하게 민주화 운동을 조직해 나갔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87년 민주화 체제를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역사적 기억이자 정신적 토대였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신군부는 1981년 제5공화국을 출범시켜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등 극단적인 억압 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나 긴 침묵과 탄압의 시기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은 결코 꺼지지 않았고, 마침내 1980년대 중반부터 반독재 민주화 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1984년에는 야권과 재야 세력이 연합하여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며 조직적인 저항의 기반을 마련했고, 학생 운동 역시 더욱 활발하게 조직화되었다. 학생들은 군사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학내외에서 시위를 주도하며 민주화 운동의 선봉 역할을 했다. 이러한 학생들의 투쟁은 점차 노동계, 종교계,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그 폭과 깊이를 더해갔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되어 온 민주화의 에너지는 1987년, 마침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면서 전국적인 분노가 들끓었고, 6월 9일에는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주도하에 수백만 명이 참여하는 전국적인 민주화 항쟁을 개시했다. 학생들은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섰고,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이에 동참했으며, 지식인과 종교계 인사들은 민주화 운동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힘을 보탰다. 마침내, 끈질긴 국민들의 저항에 직면한 신군부는 6·29 민주화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개헌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1987년 말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민주주의의 분기점이자, 억압적인 권위주의 체제에서 실질적인 민주국가로 나아가는 역사적인 출발점이다. 이 항쟁은 단순히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는 의미를 넘어,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주의의 가치를 확산시키고 제도적인 틀을 마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6월 항쟁은 특정 계층이나 집단의 저항이 아닌, 시민, 학생, 노동자, 종교계 등 모든 세력이 연대한 ‘전 국민적 항쟁’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깊다. 대학생과 청년들이 앞장섰고, 도시 중산층과 직장인까지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를 외쳤다. 노동자들은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이어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항쟁의 불길을 더욱 거세게 타오르게 했으며,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비롯한 종교계는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민주화 운동을 굳건히 뒷받침했다. 수십 년에 걸친 국민들의 끈질긴 투쟁과 희생이 마침내 1987년을 기점으로 제도화된 민주주의로 연결된 것이다.
1972년 유신 체제 이후 오랫동안 무력화되었던 정당 정치는 87년 민주항쟁 이후 비로소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야당의 활동이 보장되고 국회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민주주의는 더 이상 헌법 속의 추상적인 이상이 아닌, 일상적인 정치 운영의 기본적인 틀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87년 민주항쟁은 한국 민주주의의 제도적인 출발점이었다. 법치주의, 권력 분립, 기본권 보장이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들이 사회 전반에 걸쳐 일상화된 민주주의 체제가 비로소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독보적인 특징 중 하나는, 집단적인 시민 행동이 질서와 도덕성을 유지하면서도 강력한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을 일컬어 ‘집회 민주주의’ 혹은 ‘광장 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서 ‘광장’은 단순한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 국민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고 정치적인 의사를 표출하는 중요한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러한 광장 민주주의는 단순히 정부 정책에 반대하거나 정권에 저항하는 수단을 넘어, 한국 정치 시스템의 일부로서 기능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제도권 정치, 즉 정당, 국회, 행정부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민의를 제대로 수렴하지 못할 때, 광장은 시민들이 직접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여론을 형성하며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는 '제4의 정치 공간'이 되어 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2016년 말부터 2017년 초까지 이어진 촛불집회다. 국정농단 사태에 분노한 시민들은 매주 주말 광화문 광장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광장에 모여 평화적인 촛불집회를 열고 대통령의 퇴진과 탄핵을 요구했다. 남녀노소, 직업, 이념 성향을 가리지 않고 수백만, 연인원 천만 명 이상이 참여한 이 촛불집회는 놀라울 정도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면서도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러한 시민들의 압도적인 요구는 결국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과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헌정사상 최초로 시민의 힘이 대통령을 파면시킨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촛불집회는 한국의 광장 민주주의가 얼마나 성숙하고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다.
돌이켜보면, 한국 민주주의는 3·1운동의 숭고한 독립 정신에서 싹을 틔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통해 민주공화국의 이상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이후 권위주의적인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맞선 4.19 혁명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시민의 힘을 확인했으며, 암울했던 군부 독재 시절 광주의 외침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국민 스스로의 힘으로 권위주의 체제를 극복하고 제도적인 민주주의를 확립했다. 이후에도 촛불집회와 같은 광장 민주주의를 통해 시민들은 끊임없이 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워나갔다. 한국 민주주의는 단지 서구의 제도를 수입하여 이식한 것이 아니라, 식민 지배, 전쟁, 분단, 독재라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 수많은 시민들의 피와 땀, 눈물과 희생을 통해 스스로 쟁취하고 발전시켜 온 소중한 자산이다.
특히, 비폭력적인 집단행동을 통해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내면서도 놀라운 질서와 도덕성을 유지하는 '광장 민주주의'의 전통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한국 민주주의만의 독특한 품격이자 힘이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가 단순히 법과 제도라는 형식적 틀만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집단적인 도덕성, 그리고 민주주의를 향한 강한 열망을 바탕으로 살아 숨 쉬는 '역동체'임을 보여준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출발하여 짧은 기간 동안 역동적인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한국의 경험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를 겪고 있는 많은 국가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는 한국문명이 인류에게 제시하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모델이다. 대륙에서 시작된 유교가 한반도에서 더 꽃을 피운 것처럼 서구문명이 만든 민주주의를 한국문명이 더 고도화 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