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는 도덕적 이상

한국 민주주의의 양상

by 김욱

민주주의는 근대 서구 문명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발명품 중 하나로 꼽힌다. 그 기원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에서 찾을 수 있지만, 현대적 의미의 대의 민주주의는 계몽주의 사상과 시민 혁명을 거치며 유럽과 북미 대륙에서 발전했다. 지리적으로 유럽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한 이들 지역과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자리한 한국은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문명적으로 큰 차이를 보였다. 한국 사회가 서구에서 발원한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를 온전히 이해하고 내면화하여 성공적으로 이식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였다. 언어, 관습, 사회 구조는 물론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서구 사회와 한국 사회는 너무나 달랐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문명적 간극 때문에 비서구 사회가 서구의 제도를 수용할 때 발생하는 마찰과 부작용을 예상했다.


그러나 한국은 이러한 예상을 뛰어넘어 비서구권 국가들 중 서구식 민주주의를 가장 성공적으로 도입하고 발전시킨 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민주주의를 제도의 형식만 빌려온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살아 작동하는 정치 문화로 승화시킨 것이다. 단지 선거를 도입하고 국회를 구성하는 수준을 넘어, 한국 민주주의는 사회의 근본 운영 원리이자 집단적 열망의 상징이 되었다. 제도의 맥락도 다르고 환경도 다른데, 어떻게 한국은 외래의 민주주의를 그토록 깊숙이 내재화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서구의 모델과는 어떤 다른, 혹은 독특한 양상을 보이게 되었을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동아시아 문명을 떠받치던 근본 이념인 유교의 지위를 심각하게 흔들었다. 중화 질서의 붕괴, 전통 국가의 무능력, 서구 과학기술 및 군사력과의 현격한 격차는 유교가 더 이상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이끌어갈 사상적 기반이 될 수 없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중국과 베트남 같은 유교 문화권 국가들은 이러한 이념적 공백을 새로운 공산주의로 메꾸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외부의 간섭(미국의 영향)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하는 해방 후 정치 지형 속에서 공산주의는 선택지에서 제외되었다.


대신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를 새로운 정치 이념이자 사회 운영 원리로 받아들였다. 공산주의가 중국과 베트남 사회를 재편하는 강력한 동력이 되었던 것처럼, 민주주의는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움직이는 폭발적인 힘을 발휘했다. 1960년 4.19 혁명부터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주요 변곡점들은 모두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촉발된 거대한 사회적, 정치적 변동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새로운 '천명', 즉 하늘의 뜻에 준하는 정치적 정당성의 근본 원리이자 반드시 실현해야 할 도덕적 이상으로 수용되었다.


유교 문화권에서 '명분'의 사회적 에너지는 다른 문명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다. 명분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사람들을 움직이는 강력한 도덕적 동인이다. 조선 시대 사림 세력이 수많은 사화(士禍)로 좌절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이 바로 도덕적 '명분'이었다. 그들은 명분을 통해 기득권에 맞서고 결국 주류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처럼 명분이 중요한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유교 이념의 빈자리를 채웠을 때, 이는 필연적으로 도덕적 명분과 결합하게 되었다. 유교 문명에서 정치는 곧 도덕의 실현이었다. 군주는 백성을 위한 도덕적 통치를 해야만 하늘의 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근대 한국 사회에서 '민주적'이라는 개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민주적'이라는 말 자체가 도덕적 우위를 내포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 투쟁은 따라서 단순한 정치권력 투쟁이 아니라, 부도덕한 권력에 맞서 도덕적 이상을 실현하려는 '도덕적 서사'로 받아들여졌다. 민주주의는 달성해야 할 정치적 목표인 동시에, 반드시 완수해야 할 도덕적 과업이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도덕적 서사'는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을 '열사(烈士)' 또는 '투사(鬪士)'로 기리는 기억 문화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박종철, 이한열, 전태일과 같은 이름들은 단순히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인물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도덕적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로 기억된다. 이들에 대한 추모는 개인적인 슬픔을 넘어, 현재의 정치적 기억을 형성하고 민주주의라는 도덕적 실천을 다짐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이러한 기억 문화는 한국의 역사적 전통 속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사육신, 성삼문처럼 단종에 대한 충의를 지키다 죽은 인물, 조광조처럼 도덕적 정치를 실현하려다 기득권의 음해로 몰락한 인물, 더 나아가 고려 말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절의를 지킨 정몽주와 같은 인물들은 한국사에서 '도덕과 충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로 기억되고 기려져 왔다. 이들은 비록 당대에는 좌절하거나 처형당했을지라도, 후대에는 도덕적 정치를 구현하려다 희생된 영웅으로 복권되어 새로운 시대 질서의 정당성을 세우는 상징이 되었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나타난 '열사, 투사'를 기리는 문화는 이러한 유교적 전통이 현대적으로 계승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에도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무라이의 서사, 즉 '무사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서사는 주로 개인적인 충의나 집단의 결속력을 강조하는 문화적 코드로 작동할 뿐, 현대 일본 민주주의 체제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정치적 신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일본 근현대사에서 특정 인물의 희생이 국가의 도덕적 정당성의 뿌리가 된다는 식의 서사는 한국에 비해 현저히 약하다.


이는 양국 근대 국가의 '건국 신화'가 근본적으로 다른 영향도 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왕정을 타도한 혁명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천황의 권위를 복고하여 근대 국가를 만든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그들의 정통성은 전통의 성공적인 계승과 근대화의 성취에 있었다. 따라서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은 '국가 발전의 비용'으로 처리될 수는 있어도, 국가의 도덕적 정통성을 구성하는 '순교 서사'가 될 필요는 없었다. 반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3·1운동과 임시정부가 상징하듯, 제국주의와 왕정에 맞선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대한민국의 건국 신화는 '투쟁과 희생' 그 자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은,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정통성을 재확인하고 그 도덕적 명분을 강화하는 성스러운 제물이 된다. 즉, 일본은 '연속성' 위에서 정통성을 찾았고, 한국은 '투쟁' 속에서 정통성을 세웠다. 이것이 양국에서 희생의 서사가 다르게 작동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한국 사회에서 '정통성' 개념이 격렬한 과거사 논쟁으로 표출되는 것 역시 매우 유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 문화에서 정통은 단순히 왕조의 혈통 계승 문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덕적 리더십의 계승 여부, 하늘의 명을 받은 도덕적 통치를 이어가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이러한 유교적 정통성 개념은 현대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도덕적 명분과 결합되어 작동한다. 예를 들어, '친일'이라는 딱지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에 대한 판단을 넘어, 해당 인물이나 세력이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윤리적 존재 자격을 상실했다는 의미로 작동한다. 이는 유교 문화의 핵심인 "역사적 정통성"과 "도덕적 계승" 개념이 현대 정치에서 재해석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과거 '역적'으로 몰렸던 인물들이 후대에 '충신'이나 '열사'로 복권되면서 새로운 왕조나 시대의 정통성을 세웠던 것처럼, 한국 사회는 과거사를 통해 '도덕적 정통성'을 선별하고 도덕적 우위에 기반한 서사를 재구성한다. 보수정당이 한국 민주주의 역사를 해방 직후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경향이 강하고, 진보정당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까지 거슬러 올라가려고 하는 것은 결국 역사적 정통성을 잇는 세력임을 주장하려는 '정통성 싸움'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통성 논쟁을 단순히 정치적 갈등이나 한국 민주주의의 독특한 양상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정통성 논쟁은 유교 문화에 기반한 한국 민주주의가 그 동력을 유지하고 집단적 구심점을 확보하는 핵심 기제다. 신을 믿지 않는(혹은 정치 영역에서 신의 역할이 크지 않은) 유교 문명권에서 개인과 집단의 존재 의미는 현재의 삶과 투쟁이 미래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기억되고 평가될 것인가에 크게 의존한다. 현재의 희생과 노력, 그리고 추구하는 가치가 후대에 의해 '정통성' 있는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잊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개인의 도덕적 행위와 집단의 역사적 서사를 더욱 중요하게 만든다. 신을 믿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구원이나 행위에 대한 궁극적인 심판이 신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이러한 역사적 기억에 대한 강박이 상대적으로 덜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과 같은 비신화적/비신학적 전통이 강한 사회에서는 '역사의 심판'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도덕적 평가이자 정통성 부여의 장이 되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 정통성을 확립하고 도덕적 대의를 기리는 행위는 개인과 집단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고 미래 세대에 대한 메시지를 남기는 중요한 방식이다. 정통성 논쟁은 한국 민주주의가 과거의 도덕적 자본을 현재의 동력으로 끌어와 공동체의 가치와 방향을 설정하는 중요한 정치적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민주주의를 도덕적 과업으로 받아들인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운동은 전면적인 성격을 띠었다. 서구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주로 국가 권력과 시민 사이의 관계, 그리고 제도적 균형과 개인의 자유 보장을 핵심으로 하는 국가적 정치 시스템의 구조 원리로 작동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민주주의는 국가 권력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모든 권위 체계를 재편해야 한다"는 믿음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대학, 학교, 회사, 노동조합, 시민 단체, 심지어 교회나 지역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집단과 조직에서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질서'의 확립이 시대적 과제로 여겨졌다. 대학 총장 직선제 요구, 학생회 자치권 확대, 교수협의회 구성, 노동조합 설립 및 활동 보장, 학부모의 교육 참여 확대 등 집단 내부의 의사결정 구조와 권력 관계를 민주화하려는 노력이 전면적으로 벌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주적이지 않다'는 비판은 단순한 절차적 지적을 넘어 도덕적 비난과 거의 동일시되기도 했다. 이는 민주주의가 국가 정치체제를 넘어 사회 공동체 전반의 운영 원리이자 구성원의 도덕적 정당성을 판단하는 지배 원리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서구에서도 대학이나 조직 내부에서의 의사결정 구조에 민주주의 원리를 적용하려는 논의가 물론 존재하지만, 그것이 사회 전체의 모든 집단 운영에 적용되어야 할 보편적인 도덕규범으로 확장되는 경향은 한국만큼 두드러지지 않는다.


서구 민주주의와 한국 민주주의는 그 발전 과정과 동력뿐만 아니라 사회 운동의 양상에서도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그리고 기존 질서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했던 서구의 운동은 급진적인 해방의 실험장이 되는 경향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1968년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의 학생 운동은 기존 사회의 도덕, 관습, 권위, 성(性) 규범 등 '자유롭지 않다'고 느낀 문화적 억압 구조 전반에 대한 저항을 통해 개인적, 사회적 해방을 추구했다. 히피 문화, 마약 실험, 성 해방 운동, 기성세대에 대한 전복적인 비판 등이 이 시기 운동의 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서구 지식인들은 68 운동을 단순한 '정치 운동'을 넘어, 기존 사회의 근본적인 규범 자체를 질문하고 개인의 실존적 자유를 탐구하는 문화적, 사회적 해방 운동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서구의 68 운동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자체를 지키거나 강화하기 위한 운동이라기보다는,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급진적이고 문화 비판적인 성격이 강했다.


반면, 한국의 민주화 운동 역시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는 유사했지만, 그 운동의 정당성과 동력의 근거는 도덕적 명분에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학생 운동가들에게는 청빈함, 금욕, 절제, 도덕적 단정성이 강조되었고, 사생활에서의 방종이나 쾌락 추구, 자율성 극대화는 오히려 운동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해치는 타락한 것으로 여겨졌다. 성적 해방이나 체제 전복을 위한 유희적이고 문화 비판적인 행위들은 비윤리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오히려 운동의 도덕적 명분을 훼손하고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도 있었다. 한국의 학생 운동이 이처럼 도덕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 데에는, 단순한 당위론적 차원을 넘어 한국 사회에 내재된 학생(혹은 지식인)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한국 학생운동이 이처럼 도덕성을 강조하고 청렴한 모습을 보인 것은, 단지 전략적인 선택뿐 아니라 학생이라는 위치에 대한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인식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조선 시대의 사림, 유생,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은 단순한 지식인이 아니었다. 이들은 왕과 권력자를 감시하고 비판하며 정치적 정당성을 논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올바른 도(道)와 학문을 닦은 자로서, 이들은 사회의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고 부정한 권력에 맞서 정론을 펴는 집단으로 인식되었다. 상소문을 올리고, 임금의 잘못된 명령에 대해 거열(拒閱, 읽기를 거부함)하거나 석고대죄, 또는 집단 시위를 벌이며 권력을 견제하는 주체였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한국의 학생운동은 서구에서 수입된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틀을 빌려왔지만, 그 운동을 이끌어간 주체들의 정신과 방식은 이미 한국 사회에 내재되어 있던 유교적 지식인(사림, 유생)의 저항 전통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유교 문화 속에서 학생은 가장 순수하고 정의에 가까운 위치로 여겨졌다. 권력이나 재물에 대한 욕심이 적고, 오로지 학문과 도덕을 닦는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민주화 과정에서 '학생'이라는 사회적 위치는 곧 '도덕적 심판의 자격'을 상징했다. 학생은 군대나 공권력과 같은 물리적 힘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존재였기에, 그들이 참여하는 운동의 힘은 순전히 그들의 '태도', 즉 도덕적 정당성과 진정성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비폭력, 자기 절제, 그리고 대중과 권력자에 대한 도덕적 호소라는 방식으로 귀결되었다. 민주화 항쟁의 주된 방식은 폭동이나 무력 충돌이 아니라, 시위와 선언, 공개 토론, 성명서 발표, 그리고 글쓰기를 통한 여론 형성 및 도덕적 압박이었다. 한국 학생운동은 물리적인 힘으로 정치권력을 무너뜨리기보다는, 정권을 부끄럽게 만들고 대중의 도덕적 공분을 이끌어내는 '도덕의 힘'을 바탕으로 했다.


이렇게 서구에서 건너온 민주주의는 한국의 깊고 풍부한 유교적 토양과 만나 독특하게 변모하고 성장했다. 민주주의를 단순한 정치 시스템이 아닌 도덕적 과업으로, 그리고 그 실현 과정을 도덕적 투쟁의 서사로 받아들였다. 과거사 해석을 통한 정통성 확보 노력, 사회 전반의 집단과 조직에 민주주의 원리를 적용하려는 전면성, 그리고 도덕적 명분과 비폭력 저항을 중시하는 사회 운동 방식은 이러한 융합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지난 100년 동안 한국 사회는 독특한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쌓아왔다. 그 결과 물리적인 힘이나 압도적인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시민들의 손에 들린 작은 촛불만으로도 부도덕하고 폭력적인 권력을 비판하고 심지어 퇴진시킬 수 있는 사회를 만들었다. 이는 민주주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한국 사회만의 경이로운 '민주주의 신화'가 아닐 수 없다. 한국 민주주의는 단순한 서구 모델의 이식 사례가 아니라, 고유한 문화적 유산 위에서 새로운 이념을 재해석하고 내재화하며 만들어낸 한국의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서구에서 민주주의를 배운 것처럼 다른 문명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배울 수도 있다. 그 다른 문명이 민주주의 본고장 서구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 문명 열일곱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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