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무한책임 철학 재이 사상
조선을 움직인 핵심적인 정치철학 중 하나는 '재이 사상(災異思想)'이다. 하늘이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나 일식과 같은 기이한 현상을 통해, 지상 통치자의 잘못된 정치를 경고한다는 사상인데 그 뿌리에는 '하늘과 인간은 서로 감응한다'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 있다. 당시 사람들은 군주가 스스로 덕을 쌓고 선정을 베풀면 하늘이 감응하여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재이 사상은 군주에게 막중한 책임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의 통치 행위를 규정하는 양날의 검이었다. 하늘의 재앙을 막으려면 왕이 올바르게 행동하고 정치를 잘해야 한다는 논리는 군주를 견제하는 강력한 장치였다. 하지만 반대로 하늘과 감응하여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또한 왕이었기에, 재이 사상은 왕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거가 되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비가 너무 많이 와도, 너무 안 와도 내 책임인 것 같다"는 말 속에 바로 그 리더십이 녹아있다. 이는 공동체의 안녕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재이 사상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 과거 군주가 두려워한 대상이 하늘이었다면, 오늘날의 리더는 여론의 원천인 국민을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재이 사상이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기록이 바로 『조선왕조실록』 정종 2년 6월 2일의 기사다. 이 기록에는 극심한 가뭄이 닥치자 임금과 신하들이 재앙의 원인을 자신들의 부덕함으로 돌리고, 임금이 하루 종일 반성하고 근신하자 그날 밤 바로 비가 내렸다는 극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재앙을 마주한 리더가 어떤 방식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당시의 관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임금이 하루 종일 자신을 돌아보며 근신하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사흘 만에 그쳤다.
좌의정 성석린과 우의정 민제가 편전(왕의 집무실)에 들어가 임금에게 경계의 말씀을 올렸다. 임금이 이를 듣고 하루 종일 반성하고 근신하니, 억수 같은 비가 내려 사흘 만에 그쳤다. 성석린 등이 아뢰었다.
"옛날 임금을 보필하던 신하들은 만약 홍수나 가뭄처럼 예측하지 못한 재난이 닥치면, 벼슬에서 물러남으로써 재앙이 사라지기를 빌었습니다. 지금 가뭄의 기운이 비록 극심한 정도는 아니오나 그 징조가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저희들이 털끝만큼의 도움도 드리지 못하면서 외람되게 재상의 자리에 있으니, 하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원하건대, 재능과 덕을 온전히 갖춘 인물을 뽑아 저희를 대신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었다.
"지금 사방에 큰 걱정거리가 없고, 대규모 토목 공사를 일으키지도 않아 백성들이 생업에 안정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가 오고 날이 개는 것이 때를 맞추지 못하니, 실로 저희들이 어질지 못한 탓이라 깊이 두렵습니다. 또한 저희는 폐하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항상 풍족하게 먹고 마시는데, 지금 한창 농사철에 볕만 들고 비가 오지 않아 가을 수확에 손실이 생길까 걱정됩니다. 청하건대, 금주령을 내려 나라의 경비를 절약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었다.
"현재 나라의 가장 큰 폐단은 오로지 노비 문제 하나입니다. 태상왕(이성계)께서 그 폐단을 깊이 아시고 '노비 변정 도감'을 설치하여 모든 소송을 공평하게 판결함으로써 다툼이 없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사헌부에 명하여 변정 도감의 잘못된 판결에 대한 상소를 받아 형조와 도관에 나누어 처리하게 하셨습니다. 저희가 생각하기에, 이렇게 처리하면 2~3년이 지나도 모든 사건을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원통하고 억울한 사정이 풀리지 못해 사회의 조화로운 기운을 해칠까 두렵습니다."
하고, 또 아뢰었다.
"옛 성군들께서는 재난이나 이상 현상을 당할 때마다 반드시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고, 음악을 멈추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성찰하셨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조용하고 한가하게 계실 때나 일상생활을 하실 때에도 반드시 경계하고 조심하는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시고, 혹시라도 태만하거나 소홀함이 없도록 하시어 하늘의 뜻에 보답하소서."
하니, 임금이 두 손을 마주 잡고 자세를 바로하며 말했다.
"경들이 나를 가르치는 도리와 나를 아끼는 정성이 지극하구려. 경계하고 조심하는 일에 관해서는, 과인이 본래 게으른 성품이라 애써 노력하여 하늘의 뜻에 부응하지는 못했으나, 경들이 이처럼 충심으로 나를 일깨워주니 내 어찌 감히 힘쓰지 않겠는가! 잘못 판결된 노비 문제는 다시 의논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이날 임금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성찰하며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고, 밤이 되자 비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