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중국에 치밀하고 현명하게 대처한 태종

by 김욱

태종 6년 4월 19일 중국 사신이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도착했다. 황제가 탐라(제주)에 있는 동불상을 요구했다. 조상을 위한 제전을 거행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황제가 불교를 좋아해서 불교식 제전을 치르는 것은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왜 제주에서 불상을 찾을까? 그 이유는 다음날 기록에 나온다. 제주 동불상은 원나라 양공(뛰어난 기술자)이 만든 것이었다. 4월 20일 실록의 중국 사신의 말은 이렇다.


"제주(濟州) 법화사(法華寺)의 미타삼존(彌陀三尊)은 원나라 때 양공(良工)이 만든 것입니다. 저희들이 곧바로 가서 취(取)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도 남는 한가지 의문이 있었다. 불상을 가져오라고 하면 될 걸 사신이 굳이 왜 제주까지 가서 가져온다는 걸까?


조선은 명나라가 제주의 형세를 살피는 것을 두려워 했다. 제주를 보여주면 안될 사정이 있었던듯 하다. 그래서 박모라는 신하를 보내 불상을 급히 육지로 가져오게 했다. 그러면 중국 사신이 불상도 없는 제주에 들어갈 일이 없다.


4월 25일 중국 사신이 제주의 불상을 가지러 떠났다. 그런데 중국 사신이 남원에서 말에 떨어져 팔을 다친다. 다행스럽게도 일정이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서울을 떠난 박모는 제주에서 해남현으로 17일만에 불상을 가져온다. 기대 이상 빠른 속도에 나중에 박모는 상까지 받았다.


그런데 조선 조정의 걱정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제 중국 사신이 가져오는 불상에 대한 영접을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황제의 깊은 뜻이 담긴 불상이므로 제후국인 조선으로선 예의를 갖춰야 했다. 하지만 조선은 숭유억불의 국가다. 황제의 칙서나 하사품 대하듯이 불상에 인사를 할 순 없었다. 신하들은 대체로 중국 천자를 위해 존경하는 뜻을 보이자고 했지만 태종은 반발했다.


7월 18일 드디어 제주를 떠난 불상이 서울에 도착했다. 중국 사신은 당연하다는듯 불상에 대한 조선 왕의 예의를 요구했다. 태종은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온 것은 천사(天使 천자의 사신)를 위한 것뿐이지, 불상[銅像]을 위한 것은 아니오. 만약 동불(銅佛)이 중국에서 왔다면, 내가 마땅히 절하여 경근(敬謹)의 뜻을 표해야 옳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아니한데 어찌 절할 필요가 있겠소?"


그러니까 중국에서 가져온 황제의 하사품이라면 예의를 표하겠지만 자신이 다스리는 땅에서 온 불상에 그러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또 신하들이 문제였다. 태종이 이러한 뜻을 한번 더 물어봤는데 신하들이 천자가 불교를 너무나 좋아하고 중국 사신 황엄이 못된 인간이라 그냥 예의를 표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준 것이다. 그러자 태종이 중국 사신을 이렇게 두려워 하는 신하들과 무슨 일을 하겠냐며 빡친다. 최종적으로 태종은 불상에 대한 예절을 거절한다.


"번국(藩國)의 화복(禍福)은 천자(天子)의 손에 달려 있지 동불(銅佛)에 있는 것이 아니오. 마땅히 먼저 천자의 사신을 보아야지, 어찌 내 나라 동불에 절할 수 있겠소?"


1406년 7월 22일 석달 동안 조선을 쑤셔댔던 중국 사신들이 불상을 들고 떠난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약소국으로서 뼈아픈 기록이다. 그래도 태종의 현명한 대처를 보면서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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