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조선을 뽑아 중국 황제에 보내야 했던 조선굴욕사

13세 이상 25세 이하 양가 처녀의 혼인이 전면 금지되다

by 김욱

"조선에 가서 국왕에게 말하여 잘 생긴 여자가 있으면 몇 명을 데리고 오라"


1408년 4월 16일, 명나라 사신이 전한 영락제의 한마디는 조선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즉시 '진헌색'이라는 임시 관청이 설치되고, 나라 전체에 처녀 금혼령이 내려졌다. 천인을 제외한 13세 이상 25세 이하 양가 처녀의 혼인이 전면 금지된 것이다. 조정은 각 도에 내관을 급파하여 황제에게 바칠 처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어느 부모가 금지옥엽 같은 딸을 멀고 낯선 이국땅으로 순순히 보내려 할까. 금혼령을 어기고 몰래 딸의 혼사를 진행한 양반들이 속출했다. 대제학과 총제 같은 고위 관료들마저 예외는 아니어서, 옥에 갇히고 유배를 떠나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관아에서는 처녀를 숨겼다는 이유로 백성들을 잡아 가두고 매질을 일삼았고, 그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마침내 5월, 잔인한 '미인 선발전'의 막이 올랐다. 5월 11일, 태종과 원경왕후는 한양에서 뽑힌 73명의 처녀들을 직접 살폈고, 19일에는 광연루에서 본격적인 간택이 이루어졌다. 6월 3일에는 의정부에서 각 도에서 올라온 처녀들 중 7명을 추려냈다.


하지만 명나라 사신 황엄의 눈은 만족할 줄 몰랐다. 7월 2일, 경복궁에서 의정부와 황엄이 함께 처녀들을 선발하는 자리. 황엄은 "아름다운 여인이 보이지 않는다"며 경상도에서 올라온 처녀들을 담당한 내관을 결박하고 곤장을 치려 했다. 다급해진 태종은 신하를 보내 황엄을 달랬다.


"이 아이들은 멀리 부모 곁을 떠나야 할 처지를 근심하여, 음식을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해 날로 수척해진 것입니다. 괴이하게 여기지 마시고, 다시 명나라식 화장을 시켜보시면 어떻겠습니까?"


7월 3일 중국에 보낼 처녀를 다시 선발하게 했다. 각 도에 순찰사와 함께 내관도 한 사람씩 따라가게 했다. 처녀들을 빠짐 없이 샅샅이 뒤지게 했다.


"고운 여자가 있거든 모두 뽑아 정결하게 빗질하고 단장시켜 중국 사신의 사열을 기다리고, 만일 여자를 숨기고 내놓으려고 하지 않거나, 혹은 침구(針灸 침으로 얼굴을 돌아가게 한 걸까?)하거나 머리를 자르고 약(藥)을 붙이고 하여 여러가지 방법으로 꾀를 써서 선택을 피하려고 꾀하는 자는... 직첩을 회수하고 가산을 적몰하라."


7월 5일 중국 사신 황엄이 처녀 31인을 뽑았다. 그러고는 처녀를 더 뽑아야 한다며 직접 밖에 가서 보겠다고 했다. 그러자 임금이 나가봐야 농가의 계집만 볼텐데 거기서 무슨 미색을 얻을 수 있겠냐며 말렸다. 황엄은 국왕의 성의를 알고싶었던 거지 나가가자 한 건 아니었다며 돌아갔다.


이후로 황엄이 뽑는 처녀 선발전이 10월 3일까지 석달 동안 경복궁에서 10차례 열렸다. 이후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10월 6일엔 뽑힌 처녀 중 44인을 뽑고 나머지는 돌려보냈다. 10월 11일 드디어 중국에 보낼 쳐녀 5인을 최종적으로 뽑았다. 뽑힌 5인에 대한 태종의 인물평이 실록에 남아있는데 의역하면 이렇다.


"황엄의 미모 기준이 틀렸다. 임씨는 관음보살의 상 같아서 애교와 태도가 없고, 여씨는 입술이 넓고 이마는 좁은데 그게 무슨 인물이냐?"


11월 12일 황엄이 드디어 처녀 5인을 데리고 중국으로 떠났다. 처녀를 요구하러 조선에 온지 5개월만이었다. 중국에 도착한 처녀들은 황제의 후궁이 되었고 조선에 있는 부친과 가족들은 벼슬을 받았다. 이후 중국에 사신으로 종종 다녀오기도 했다.


처녀들이 중국으로 갔지만 금혼령은 바로 풀리지 않았다. 일단 20세 이상만 혼인이 허락되었다. 황엄은 중국으로 떠나기 전 2등으로 선발된 처녀 27명의 혼인을 금할 것을 요구했다. 임금이 혼기가 차는데 언제까지 그럴 순 없다며 연한을 정해달라고 하자 나중에 사신을 보내 기별을 하겠다고 했다.


나라의 힘이 약해, 딸들을 머나먼 이국에 보내야만 했던, 실록에 남겨진 조선의 아픈 역사 한 페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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