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폐가 편리한 걸 너무나 잘 알았던 조선의 관료들
조선시대에도 지폐의 편리함과 유용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상업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고 쌀과 베 같은 현물이 주된 교환 수단이었던 조선의 현실에서, 지폐는 뿌리내리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관료들은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고 상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지폐 유통을 시도하였다. 아래의 글은 바로 지폐를 도입하려던 그 노력의 흔적이다. 《태종실록》 3년(1403년) 9월 5일의 기사에서, 당시 사헌부가 베 화폐의 단점과 지폐의 장점을 조목조목 비교하며 왕을 설득하는 부분을 발췌 요약하여 현대어로 번역한 것이다.
전하께서는 신사년(1401년)에 대신들과 의논하여 지폐 제도를 시행하셨으나, 백성들이 그 편리함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불편하다는 여론에 밀려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신들이 이미 한 차례 재시행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기에, 다시금 지폐의 필요성을 아뢰옵니다.
먼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베(布) 화폐의 문제점을 말씀드립니다. 베는 삼(麻)의 생산량에 따라 공급이 불안정하고, 아낙네들의 수고로움으로 어렵게 생산될 뿐만 아니라, 부피가 크고 무거워 많은 양을 거래하기 어렵습니다. 화폐로서의 가치 또한 온전하지 못합니다. 정해진 규격(한 필)에 맞지 않거나, 찢어지거나 흠이 있으면 제값을 받지 못하고, 여러 조각을 이어 붙여 쓸 수도 없으니 그 불편함이 매우 큽니다.
반면 지폐(楮貨)는 이러한 모든 단점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종이는 원료를 구하기 쉽고 인쇄를 통해 대량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무게가 거의 없어 많은 돈도 손쉽게 휴대할 수 있습니다. 조금 낡거나 찢어져도 그 가치가 사라지지 않으며, 적은 단위로도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고, 먼 지방까지 가지고 가서 쓸 수 있으니 이야말로 진정한 화폐라 할 수 있습니다.
전하, 지폐와 베 화폐 중 어느 것이 더 나라에 이롭겠습니까? 재화의 이익이 온 나라를 도는 것은 샘물(泉)이 솟아 흐르는 것과 같기에 돈(錢)을 '샘'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어찌 국가의 혈맥과 같은 돈의 유통을 막으려 하십니까? 이미 중국에서는 한나라부터 당, 송, 원을 거쳐 현재의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지폐 제도를 성공적으로 시행하여 그 이로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화폐 발행의 막대한 이익을 포기하지 마시고, 선진 문물인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다시 지폐를 유통시켜 주시옵소서. 백성들이란 나라에서 어떻게 이끄느냐에 따라 움직이는 법입니다. 지금이라도 결단을 내리신다면 결코 늦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