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과 신하들의 짜고치는 인자한 군주 연기
태종 15년(1415년) 6월 6일, 왕비의 동생들인 민무휼·민무회 형제가 탄핵의 칼날 위에 선다. 죄목은 2년 전 세자에게 던진 "저희 가문에서 자라나지 않으셨습니까?"라는 한마디 말이었다. 이는 미래의 왕에게 외척으로서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불충한 의도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처음 혐의를 부인했다. 세자가 2년이나 지난 일을 이제 와서 고발했다는 점도 의아했다. 치밀하게 계획된 정치적 숙청이었던 것이다. 이미 그들의 형인 민무구·민무질을 제거했던 태종에게, 이 사건은 그 마지막 작업을 위한 명분이었던 것이다.
결국 두 형제는 유배되었지만, 태종의 진짜 고민은 이제부터였다. 왕자의 난 때 자신을 도운 아내의 혈육들을 이미 둘이나 죽인 상황에서, 남은 형제들마저 직접 처단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나 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왕과 신하들의 거대한 정치 연극이 시작된다. 왕의 의중을 간파한 신하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상소문을 빗발치게 올리기 시작한다. 실록에 민무휼 민무회 두 형제의 이름으로 검색해 보면, 탄핵 이후 두 형제가 죽기까지 약 7개월간 그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는 무려 36회나 나온다. 한 달에 다섯 번 이상이다.
마침내 태종 16년 1월, 태종의 기이한 명령이 떨어진다. "자진하라"가 아니라, "자진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아내의 형제들에게 차마 직접 죽음을 명할 수 없다는 군주의 고뇌를 연기하면서도, '죽으라'는 실제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교묘한 언어였다. 그의 '인자한 군주' 연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왕명을 집행한 원주 목사 권우가 "왕의 뜻에 따라 자결을 독촉했다"고 보고하자, 태종은 대노하며 그를 의금부에 가둔다. 자신의 '관대한 허락'을 '잔인한 강요'로 왜곡했다는 이유였다. 두 형제의 죽음은 자신의 뜻이 아닌, 명령을 잘못 이해한 신하의 과잉 충성 탓이었다.
민무휼 민무회 두 형제가 죽고 1년 9개월이나 지난 뒤인 태종 17년 10월, 태종의 인자한 군주 연기는 화룡점정을 찍는다. 태종은 민씨 형제의 사건을 다시 언급하며 "억지로 자결하게 한 것은 진실로 나의 뜻이 아니었다"고 공표하고, 이를 교훈 삼아 앞으로는 왕의 공식 문서 없이는 사형을 집행할 수 없다는 법을 만든다. 태종의 위선이 얼마나 깊고 치밀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폭군처럼 대놓고 칼을 휘두르는 대신, 어떻게든 '자비로운 군주'의 외관을 유지하려 했던 이 집요한 연기는 조선의 정치 문화에 중요한 유산을 남긴다. 외관이 자비를 표방하면, 그 내용 또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싫어하는 군주라는 '역할'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결국 국가 시스템이 폭력보다는 절차와 명분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그 전통의 힘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도 보이지 않는 유산으로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두 차례의 탄핵도 그렇게 평화롭게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태종 16년 1월 13일
민무휼과 민무회,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다
의정부에서 모든 관리를 거느리고 대궐 뜰로 나아가 민무휼과 민무회의 죄를 처단해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들이 생각하건대, 불충한 죄는 나라의 법으로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하는 것으로, 하늘과 땅이 용납할 수 없는 죄입니다. 지난번 역적 민무구와 민무질이 이미 처형되었으니, 그들의 동생인 민무휼과 민무회는 마땅히 이를 보고 경계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반역의 마음을 품고 왕실을 해치려 했으며, 거짓말을 꾸며내어 성상의 덕에 흠집을 내고, 자기 형들이 죄 없이 죽었다며 몰래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 불충한 죄가 이토록 명백하니 법대로 처단함이 마땅한데, 전하께서 가벼운 법을 적용하여 지방으로 유배 보내는 데 그치셨으므로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 중에 실망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의(大義)에 따라 결단하시어 국법을 바로 세워 후세를 경계하소서. 또한 민무구 등 네 형제의 처자식들 또한 모두 법률에 따라 처리하시어 신하와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해 주시옵소서."
임금이 (원로대신인) 하륜에게 속마음을 전했다.
"내가 어찌 민무휼과 민무회를 아끼고 보호하겠는가? 다만 그들의 늙은 어머니 송씨가 마음에 걸리고, 중전이 몹시 애통해하기 때문일세."
하니, 하륜이 대답했다.
"이들이 만약 도망쳐 강이라도 건너면 큰일이며, 설령 우리나라에 있더라도 이들을 찾아 체포하느라 소란이 클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은 즉시 끊어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정승의 말이 옳도다."
임금은 곧 의금부 도사 이맹진을 원주로, 송인산을 청주로 보내며 그 지역 수령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을 전하게 했다.
"그들을 단단히 지켜 도망치지 못하게 하고, 만약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거든 굳이 막지는 말라."
1월 15일에 이맹진이 돌아오고, 16일에 송인산이 돌아와서 아뢰었다.
"민무휼과 민무회가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임금이 다음과 같이 교지를 내렸다.
"민무휼과 민무회 등의 불충한 죄를 의정부, 공신, 육조, 대간 등 모든 관청에서 여러 차례 처벌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나는 오직 정비(왕비 원경왕후)의 가까운 혈육이기에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모두 지방으로 유배 보냈었다. 그런데 그들이 스스로 죄를 깨닫고 잇달아 목매어 죽었으니, 이제 더는 거론하지 말라.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 등 네 형제의 처자식들은 모두 먼 곳으로 유배 보내라."
그리고 형조에 명하여, 민무휼의 전처 자식들은 외조부인 이직에게 맡기고, 민무회의 전처 자식들은 그들을 길러준 외조모 김익달의 처에게 맡기며, 민무구 형제의 어린 자식들은 친척에게 맡겨 길에서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