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비우자, 대충이라도 정리하자’라며 스스로 달래면서 미니멀 사피엔스의 삶을 시작했다. 우리 집은 잡지에 나오는 물건이 거의 없는 그런 완벽한 집은 아니다. 미니멀리스트로서 완벽한 사람이 사는 집도 아니다. 나와 가족이 사는 집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집이지만 그 안에 정리와 비움의 흔적이 조금씩 보이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매일 조금씩 비우고 정리하면서 성장하는 미니멀 사피엔스가 사는 집이다. 이제부터 나는 미니멀 사피엔스가 되기로 했다.
20년을 모시고 살았던 시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나라로 소풍을 떠나셨다. 식구들과 마지막 인사도 못 하고 갑자기 가셨다. 이웃집에서 탄 냄새가 너무 심하다는 신고를 해서 아파트 경비원이 비상 연락망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했다. 설 연휴 마지막 날, 늘 어머니가 걱정인 남편은 근무지인 부산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명절 스트레스로 힘이 든 나는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다 최대한 늦게 집에 들어가고 있었다. 딸들은 학원에 가고 집에는 어머니 혼자 있었다. 요즘 치매 증상이 가볍지 않아 걱정하던 차였다. 올해 복직을 해야 해서 어머니 문제로 남편과 자주 의논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었다. 워낙 고집이 세고 본인이 치매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머리에 좋은 영양제라고 했는데도 어떻게 아셨는지 치매약이라고 드시기를 거부했다. 그랬던 분이 아무도 없는 집에서 홀로 쓰러지셨다. 본인이 까맣게 태운 냄비를 닦고, 차가운 주방에 쓰러지셨다.
주방 가위가 필요했는데 평소 보관하던 곳에 보이지 않는다. 이상했다. 분명히 주방 가위가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어머니 죽음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무서운 상상도 해보았다. 나에게 풀기 어려운 숙제였다. 가위는 어디 있을까? 삼우제도 지났고 어머니 방을 정리하기로 했다. 어머님이 가지고 있던 물건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막막했다. 우선 옷장에 들어있는 옷부터 정리했다. 평소 검소한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치매 증상 초기일 때 잃어버린 통장들도 이불 사이사이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문제의 주방 가위도 어머니 옷장에서 나왔다. 가위를 찾기 전에 무서운 상상을 했던 내가 바보 같았다.
일상이 평온했던 어느 날, 뉴스에서 믿기 어려운 일이 속보로 나왔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도후쿠 지방 태평양 해역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그로 인해 쓰나미가 들이닥쳤다는 뉴스다. 갑자기 일어난 자연재해로 집 안에 있던 물건들이 흉기가 되거나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이 일은 간소하게 최소한의 물건으로만 생활하는 게 낫다는 인식의 변화를 불러왔다. 미니멀 라이프의 필요성이 자연스럽게 대두되었고, 한국에도 미니멀 라이프 붐이 일어났다. 나에게도 시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내 인생에 쓰나미 같은 변곡점이 되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가지고 있는 많은 물건은 누군가에게 치워야 할 짐이다. ‘꼭 필요한 것만 남겨야겠구나.’ 그리고 내가 떠난 자리에서 따뜻함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삶의 모습이 좋게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언제 떠날지 모르지만, 남겨진 것들에 대한 미련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훨훨 날아가고 싶다.
“사람이 천지 사이를 살아가는 것은 문득 먼 길을 가는 나그네가 여관 가운데서 지내면서 꼼꼼하게 갖추어진 집을 구하는 것 같아서, 그 어리석음을 비웃지 않을 사람이 없다.” 다산 정약용이 1810년에 한 말씀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갈 때고 마찬가지다. 결국에 그 사람이 살아온 모습이 기억될 뿐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이면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할 것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소유하고 있는 물건을 단순화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간결하고 단순해지기 위해 슬기로운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면 될 것 같다. 그래서 나를 사피엔스에 ‘미니멀’을 붙여 ‘미니멀 사피엔스’로 부르고 싶다. 슬기롭게 내 삶을 비워 내면서 단순하게 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