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첫사랑
마음은 조용히,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 중이었고,
그 누나는 새로 들어온 시설 직원이었다.
내가 먼저 그 공간에 있었고,
그 누나는 어느 날 갑자기 출근을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그랬다.
예쁘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인상.
속으로는 ‘대학생 봉사자분인가?’ 싶었다.
젊어 보였고, 두세 살 정도 위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그날 하루만 오고 가는 사람 같았다.
근데 알고 보니 그분은
정식 직원이셨다.
그 이후로 자주 보게 됐지만,
함께 일하거나 대화를 많이 나눌 일은 없었다.
근무가 겹쳐도 인사만 하는 정도.
거의 아무런 접점 없이
5개월 정도가 그렇게 흘러갔다.
딱히 엮일 일도 없었고,
사실 그 시절의 나는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도 별로 없었다.
그냥 하루하루를 흘러가는 대로 버티는 중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직원분들 사이에서 그 누나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씩 들려왔다.
“그 친구 참 싹싹하지 않냐?”
“되게 따뜻한 사람 같더라.”
“성격도 괜찮고, 일도 잘하잖아.”
처음엔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그 말들이 조금씩 쌓이니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 누나를 바라보게 되기 시작했다.
그쯤에 내가 본 그 누나는
작은 도움에도 고마움을 표현하고,
어떤 일도 쉽게 넘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당연하게 여겨도 될 상황에서도
고개 숙여 인사하고,
말 한 마디에도 성의가 느껴졌다.
겉으론 조용하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속은 단단한 사람 같았다.
외유내강이라는 말이 괜히 떠올랐고,
자꾸 그 누나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내가 돌려줘야 할 물건이 있어서 그분을 불렀다.
그냥 이름을 부른 건데,
그때 그분이
“네?!”
하고 반응하는데…
그 목소리 톤, 눈동자, 반응 속도—
뭔가 너무 귀여워서
순간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졌다.
그리고 그 순간
“아, 큰일 났다.”
“나 이 사람 좋아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건 뭔가 갑작스러운 감정이라기보다,
천천히 쌓여오던 마음이 문득 얼굴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현실이 머릿속을 차지했다.
복무는 아직도 7개월이나 남았고,
내가 먼저 다가가는 건
그분에게 분명히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고,
그분은 정직원이고,
나는 그냥 잠깐 머무는 사람.
너무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보이면
괜한 이야기거리가 될 수도 있었고,
나는 괜찮아도
그 말들이 누나에게 상처나 불편함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접자. 그냥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할 마음이구나.”
하지만 그리고 얼마 뒤,
우리는 처음으로 함께 근무를 하게 됐다.
그동안 한 번도 스케줄이 겹친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우연히 같이 서게 된 거였다.
그날 누나는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OO씨! 옷 너무 귀여워요!”
심장이 진짜 터지는 줄 알았다.
어떻게 대답했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아닌 척했다.
그리고 누나는
“혹시 일하다 전화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전화번호 교환해요 우리~”
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그 사람의 이름을 정확히 처음 알았다.
그 정도로 접점이 없던 사이였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카카오톡 친구가 되었다.
그날 밤,
누나의 프사를 봤다.
너무 예뻤다.
사진 하나만 봐도,
왜 내가 이 마음을 키우면 안 되는지
스스로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강하게 다짐했다.
“더 커지기 전에,
지금 이 마음은 꼭 접어야겠다.”
하지만 그런 다짐도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뒤 우리는 시설에서 나들이를 갔다.
여름 즈음이었고,
햇볕이 강해서 나는 챙이 큰 모자를 썼다.
그런데 그 누나가 또 말했다.
“머야~ OO씨 모자도 너무 귀엽잖아?!!”
또 심장이 쿵 하고 무너졌다.
나는 또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 순간을 그냥 넘겼다.
왜냐하면…
접어야 하니까.
그 이후로도 마음은 계속 왔다 갔다 했다.
접어야지, 접어야지.
계속 다짐했지만
막상 보면 또 예뻤고,
말투도 착했고,
웃는 모습도 자꾸 생각났다.
어느 순간부터
누나를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 없었고,
안 보고 싶은 순간도 없었다.
너무 마음이 커지기 전에 어떻게든 끊어보려고,
어쩔 수 없이 휴가를 3일 쓰기로 했다.
수, 목, 금.
일부러 평일을 붙여서
그 시간 동안 누나를 보지 않으면서
조금이라도 마음을 접을 수 있길 바랐다.
그때가 마음을 자각하고 2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그리고 일요일.
이제 출근이 다가오는데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뭐 한 것도 없잖아?
정리할 감정이랄 것도 없고… ㅋㅋ”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아서
평소보다 20분 정도 일찍 출근했다.
그리고 그날,
누나가 안경을 쓰고 출근했다.
그 순간
내가 5일 동안 마음먹은 게
진짜 단 한순간에 다 날아가 버렸다.
너무 예뻤다.
정말, 그날의 누나는
무슨 말로도 설명이 안 될 만큼 예뻤다.
그 한 장면만으로
다시 마음이 흔들리고,
다시 시작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결심했다.
다가가야겠다.
복무는 이제 4개월쯤 남은 시점이었다.
“이제는 조금씩 다가가도 괜찮지 않을까.”
그 생각이 들면서도
같이 따라온 의문도 있었다.
“이게 맞는 걸까?”
“내가 뭔가를 하면
그 사람이 불편해지진 않을까?”
그리고 나이 차이에 대한 생각도
한 번은 스쳐갔다.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았지만
그건 진심 앞에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냥
그 사람이 좋았다.
그게 다였다.
이제는 연락할 명분이 필요했다.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누나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핑계.
그러다 떠오른 게 있었다.
예전부터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누나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OO씨, 무슨 책 읽어요?”
그리고 어느 날 엘리베이터 안,
정적이 너무 어색해서
내가 먼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책 좋아하시나 봐요?”
그랬더니 누나는
“네, 나중에 제가 빌려드릴게요.”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이
며칠이고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그 말을 핑계 삼아
처음으로 카톡을 보냈다.
“혹시… 책 좀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
누나는 당연하다는 듯
“그럼요, 빌려드릴게요~”
라고 답했다.
나는 책을 받고 나서부터 또 고민이 시작됐다.
이걸 그냥 읽고 끝내야 하나?
그럼 나는 그 책을 빌린 사람으로만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독후감을 써서 드리자.”
조금 유치할 수도 있지만,
그게 내가 진심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 같았다.
그렇게 책을 읽고,
조금씩 적어둔 생각들을
하나의 짧은 독후감으로 정리해서
카톡으로 누나에게 보냈다.
조금 긴장됐지만,
누나의 반응은 너무 따뜻했다.
“귀여워ㅋㅋㅋ 다음에 또 책 빌려드릴게요~!”
그날 이후로
우리는 조금 더 편하게
근무 중에도 카톡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서로의 취미 이야기,
어린 시절 기억들,
일상 속의 사소한 순간들까지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출근한 시간 내내 거의 카톡만 했던 날들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째 책을 빌릴 즈음,
나는 여름휴가를 앞두고
계속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을까.
말은 너무 무겁지 않게,
하지만 마음은 조금 담아서.
그러다 떠올랐다.
그 누나가 예전에
내가 쓴 모자가 귀엽다고 했던
그 나들이 날.
그날 내가 찍었던 풍경 사진들 중
마음에 드는 장면 하나를 골라
책갈피로 만들어 선물하기로 했다.
계속 걱정이 들었다.
혹시 부담스러워하면 어쩌지.
내 마음이 들키면 어쩌지.
하지만
“그래도 이건 꼭 드려야겠다.”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책갈피에는
누나의 이니셜을 작게 새겼다.
며칠 뒤,
외근을 나가는 누나가 보였다.
나는 용기 내어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다녀오시면… 잠깐 저한테 와주세요.”
“어? 네!
여름휴가 잘 다녀오셨어요? 히힣”
그 짧은 대답에
신난 표정과 발걸음이 보였다.
그걸 보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정말 귀여웠다.
그리고 누나가 돌아왔을 때
나는 준비해둔
책갈피와 책, 그리고 독후감을 함께 건넸다.
누나는 정말 기뻐했다.
웃으면서, 놀라면서,
진심으로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그날
나는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내 마음이
이렇게라도 전해졌으면 좋겠다.”
그날 밤
누나에게서 카톡이 왔다.
“OO씨… 짱… ㅠㅠㅠ”
그 한 줄이
그날 내 기분을 다 말해줬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책을 빌려주고, 빌리고
출근하면 늘
누나와 카톡을 주고받았다.
그때가 복무 4개월 정도 남았을 때였다.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고,
100일이라는 숫자가 눈앞에 딱 들어왔던 어느 날,
나는 카톡으로 조용히 누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 오늘로 100일 남았어요ㅠㅠ”
누나는 잠시 후 이렇게 답했다.
“씨에겐 좋은 일인데…
너무 아쉬워요…
가지 말라고도 못하고… ㅠㅠ”
그 말이
너무 좋았다.
진심인지, 예의인지 구분이 안 돼도
그 말이 내 마음을 울렸다.
이젠
진짜 내 마음을 결정해야 할 때였다.
데이트 신청을 하자니
아직은 너무 이르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기엔
내 마음이 이미 너무 커져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할 수 있는 선에서,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은 뭘까?”
하지만 여전히
보는 눈이 많았다.
그래서
대놓고 친한 척은 하지 않기로 했다.
누나를 위해서였다.
나는 떠나지만,
그 누나는 그 자리에 남는다.
그리고
남겨지는 사람에게
괜한 소문이 붙는 건
내가 제일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산책을 가자고 제안했다.
가볍게,
그냥 잠깐 걸으면서 얘기하고 싶었던 마음.
하지만 누나는
“오늘 너무 더워요~”
라고 하며
거절했다.
살짝 상처였지만, 괜찮았다.
정말 더운 날이었고,
그게 진짜 이유이길 바랐다.
며칠 뒤,
나는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에도 같은 이유로
거절이었다.
그때도,
그게 진짜 이유이길 바랐다.
그 이후로 나는
계속 누나에게
“얼마 안 남았어요~”,
“이제 두 자릿수예요~”
하고 자랑하듯 말했다.
그럴 때마다
누나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끔은 웃으면서
“가지 마요~ 그냥 계속 해요~”
라고 말하기도 했고,
그런 말들이
장난처럼 들려도
마음은 너무 기뻤다.
혹시
예의로 하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쉬워하는 표정만큼은,
지금 생각해도
가짜는 아니었다.
그건 분명히
진짜였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카톡을 주고받았다.
만나면 장난도 치고,
밥 먹으면서 소소하게 대화도 나누고,
서로가 조금씩 편해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할 수 있는 만큼,
내 마음을 조금씩 티 내려고 했다.
예를 들면,
누나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걸 보면
괜히 기다렸다가 같이 타고,
당시 영양사님이 안 계실 때는
일부러 누나에게 식권을 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땐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 같았다.
시간은 흘러
복무가 한 달 남았을 무렵,
진짜 결정을 해야 했다.
“누나는 나에게 호감이 있는 걸까?”
“이성으로서?
아니면 단지 나이 차가 나는 동생으로서 귀여워하는 걸까?”
“나는 이 마음을 그냥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그냥 그렇게 떠나야 하는 걸까?”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내 취미는
사진 찍는 것과 전시회 구경이었다.
그건 누나도 알고 있었고,
우리는 전시회 얘기를 종종 나눴다.
“여기 가봤어요?”
“저기 되게 괜찮았어요.”
“거기 나중에 같이 가요~”
같은 말들이
장난처럼 오가기도 했고,
때론 진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산책 제안을 두 번이나 거절당했던 나에겐
그마저도 쉽게 꺼내기 어려운 말이 되었다.
그래도 이제
남은 시간은 거의 없었다.
복무는 3주밖에 남지 않았고,
나는 10일의 휴가를 남겨둔 상태였다.
전역 전 2주 동안 휴가를 내고
사실상 그 시설과의 마지막 인사를 준비해야 했다.
그래서 마지막 도전을 해보기로 했다.
그날,
나는 누나에게 연락을 했다.
나: 선생님, 최근에 전시회 다녀오셨어요?
누나: 최근에 OO다녀왔어요.
나: 아, 정말요?
누나: 근데 왜요?? 왜 물어보셨어요?
나: 아니, 제가 전시회 티켓이 있는데…
이번 주말에 시간 되시면 같이 가실래요??
누나: 오!!! 좋아요!!!
신난당!!!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정말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걸
같이 할 수 있다니.
그 짧은 대화 안에
그동안 혼자 조용히 품어온 마음들이
살짝 빛을 본 느낌이었다.
마침내,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이 되었다.
밖에서 만난 누나는
훨씬 더 예뻤고,
훨씬 더 좋았다.
근무 중이 아니었고,
눈치 볼 직원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사이도 조금 더
자연스러워졌다.
말도 편해졌고,
서로 웃고,
작은 장난과 가벼운 터치도
자연스럽게 오갔다.
정말
썸을 타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내가 처음 제안했던 전시회를 함께 본 뒤
누나가
“내가 하나 아는 곳 있어 거기 가자.”
라며 자신이 가보고 싶던 전시회도 이야기했다.
그렇게
처음엔 단순히 몇 시간만 함께할 예정이었던 하루가
조금씩,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더 길어졌다.
전시회를 보고
점심을 먹고,
카페에 들르고,
또 다른 전시회까지.
가을의 하루를
꽉 채워 같이 보냈다.
아직도 그날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날의 나는
더 헷갈렸다.
누나가 나에게 하는 말,
표정,
눈빛,
장난들
분명히 호감은 느껴졌다.
하지만
그 이상일까?
정말,
이성으로서의 감정일까?
아니면 그냥
정이 많고 따뜻한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채웠다.
그런데도
그 순간의 누나가 너무 좋아서
그런 복잡한 생각들은
일단 잠시 치워두기로 했다.
그렇게
저녁 전시회까지 보고 나니,
헤어지기 너무 아쉬웠다.
“이런 기회가 또 있을까…?”
그때
누나가 말했다.
“헤어지기 아쉬운데
저녁 먹고 갈래?”
나는
너무 좋다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우리는 종로 거리를 걸었다.
가을 공기가 살짝 차가웠고,
하늘도 예뻤고,
분위기도 좋았다.
그리고
모든 게 설렜다.
누나는 예뻤고,
길가의 공원도 예뻤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공원을 걸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서로를 놀리고, 웃고,
장난을 주고받았다.
그 순간
누나가
내게 장난을 치다가
갑자기 말했다.
“미안ㅋㅋㅋ
너가 너무 좋으니까 그렇—”
말을
그대로 마치지 못하고,
다시 집어넣었다.
마치
무언가를 실수로 내뱉은 사람처럼.
그 순간의 그 말.
그 말의 반.
그 표정.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 말을
그 표정을
못 들은 척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괜히 확인해서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그저 좋아서,
조금 더 있고 싶었고,
그걸로 충분했다.
그리고
이제
진짜 헤어져야 할 시간.
우리는 조용히
지하철역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말할까, 말지 말까’
그 생각으로 가득했다.
계속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입을 열었다.
“누나…
내가 누나 좋아하는 거 알아?”
누나의 표정은
오묘했다.
사실
나는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거절당해도 괜찮아.”
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 말을 꺼내는 순간,
그 표정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응…
알지…”
누나는 그렇게 말하며
살짝 웃었다.
“OO아,
내가 들어본 고백 중에
제일 귀여운 고백이었던 것 같아.”
그런데
그 웃음은
기뻐하는 웃음이 아니라,
조금 슬픈 웃음처럼 느껴졌다.
그 뒤로
누나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전 연애 얘기,
그동안 있었던 일들,
힘들었던 감정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호감은 있었고…
우리 썸도 분명히 탔지.
근데…
지금은 내가 누굴 만날 상황이 안될거 같아.”
나는 안다.
그게
흔한 거절의 말이라는 걸.
조심스럽게,
상대의 마음을 최대한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말.
그런데도
그날의 나는
그 말 하나하나를
다 믿고 싶었다.
“그래도 그 이유가 진짜였으면 좋겠다.”
“정말, 그냥 타이밍이 안 맞은 거였으면.”
그게
내 마음속에 남은
마지막 희망 같은 거였다.
사실 그 이후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어떻게 대답했는지도 모르겠고,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도,
어떤 말로 마무리했는지도…
그저 기억나는 건
마음이
천천히,
조용히
무너졌다는 느낌뿐이다.
그날 이후,
나는 한 번 더 누나를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정말 더 비참해질 것 같았다.
그때 나는
거의 매일 울었다.
원래도 눈물이 많은 편이었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눈물이 많았었나?”
싶을 정도였다.
길을 걷다가 혼자 울기도 했고,
집에서도,
샤워하다가,
누워서 천장을 보다가
혼자 울었다.
어느 날은
이 슬픔을 떨쳐내고 싶어서
혼자 전시회를 찾아갔다.
가장 좋아하던 공간이었고,
가장 나다운 시간이었기에
조금이라도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그곳에 서 있는 순간
눈물이 나서
그냥 바로 나와버렸다.
그 사람과 함께했던 공간이라서,
그 공간에 담긴 감정이
그날 이후로
모두 바뀌어버린 느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왜 우리는,
사귀지도 않은 사람이
이토록 오래도록 아플 수 있는 걸까?
아마
많은 걸 함께했기에 후회가 없는 연인보다,
함께하고 싶었던 게 너무 많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관계라서
더 아팠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
우리는 몇 번,
짧게 마주쳤다.
그때마다 누나는
나를 배려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편하게 대해주려고 애쓰는 모습.
그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편한 척을 하고 있는 누나의 얼굴에서
은근히 불편함이 비치곤 했다.
그리고 그게,
왜 이렇게 미안한지 모르겠다.
내가 착한 척을 하고 싶은건지….
지금은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났다.
4개월쯤 됐을 때까진
매일 생각났고,
보고 싶었다.
결국 나는
누나와 나눈 모든 카톡을 지웠다.
5개월쯤 됐을 때부터는
그 빈도가 조금 줄었지만
여전히 그리움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완전히 잊고 싶어서,
누나를 카톡 친구에서 삭제했다.
누나는
본인이 먼저 친구추가를 해야
서로 친구가 되는 설정을 해두었기에,
내가 다시 추가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래서
이 방법이
확실히 잊기에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 효과가
조금씩 생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매일 생각은 나지만,
그건 점점
희미해진다.
사귀었던 사람은
함께한 시간이 많기에
후회도 적다.
하지만
사귀지 못했던 사람과는
하고 싶었던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후회가 더 진하게 남는 것 같다.
그 차이가
슬픔의 크기를 바꾸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6개월이 지나도록,
누나가 밉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저
누나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게 다였다.
진심으로.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나 역시
조금은 누나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젠 정말,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이 긴 마음을
천천히 놓아주고 싶다.
-책갈피에 쓰인 사진-
“짝사랑은 마음의 독백이다. 그 독백은 때로 시가 되지만, 때로는 눈물이 된다.”
비르지니아 울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