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산소에 들렀다가 가족 무리에서 이탈해 혼자 나와 있다. 누군가 김제에 있는 공원으로 산책하러 가자고 제안했지만,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빈츠 한 조각, 책 읽을 시간이 간절했기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작년 추석에도 그랬다. 성묘 후 어디론가 떠나는, 혼자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없기에 애초에 개인적 선택의 자유가 박탈된. 가자고 하면 동행해 주는 게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가려는 장소도 매력적이지 않았고, 모여있는 사람들도 '이제 이만하면 되었다' 싶을 만큼 사적 모임 시간을 충족하고 있었으니까.
가기 싫은 자, 우리 차로 모여라! 이렇게 급 편성된 조에 아가씨티가 물씬 나는 조카 세 명이 합류했다. 평소 운전할 때 조용한 걸 선호하는 편이라 가급적 소란이 일어날 수 있는 요소를 차단하는데, 이 친구들과는 나눠도 나눠도 지루하지 않은 '꿈' 얘기를 할 수 있어서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변호사, 판사, 국정원 등 꿈이 다섯 개라는 조카. 국어와 수학은 좋은데, 영어와 과학은 싫어서 문과를 갈지, 이과를 갈지 고민이라는 이제 곧 중학생이 되는 조카. 그런 그들을 참견하고 싶어지는, 나는 아직 내가 무엇을 하게 될지 모르겠다, 라고 말하는 가장 나이 먹은 나. 십 대들과 나누는 대화는 체념, 걱정, 우려가 생략된 무한한 가능성만이 빛나는 말들이라 더 지속해도 좋았으련만, 누군가와 함께 있다가도 빨리 혼자가 되고 싶어지는 나는, 목적지에 도착 즉시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곳으로 떠났다.
나에겐 좀 그런 반골 기질이 있는 것 같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게 분명한. 마음이 이끌리지 않는 것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내 시간과 에너지를 악착같이 챙기는. 그래서 사람과의 만남도 자연스러운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5인 이상 모임을 적잖이 스트레스받곤 했는데, 자기 이야기에 심취해 듣는 이의 안색을 살피지 않은 유형이라던가, '이 구역은 내가 접수한다'로 말할 수 있는 자기만족 리더형, 대화 지분은 다 가져가 놓고 다른 사람들 이야기엔 스마트폰 속으로 쏙 빠지는 라인업에 특히 민감했다. 아차차, 먹고사는 인생사 빼놓을 수 없는 문제도 있지. 어차피 밥 따로 먹고 한 마디 섞지도 않을 거, 뭐 하러 단체석에 우르르 몰려가 '너는 설렁탕, 나는 갈비탕' 손 흔들고 있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과 두루두루 어울리는 게, 서로 겉도는 이야기를 하다가 허무하게 헤어지는 게, 내겐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삶을 바라보는 가치관, 지향성에 '접점'이 없는 사람이라도, 다채로운 빛깔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모르게 지니고 있던 '벽'을 깰 수가 있고, 나아가 몰랐던 세상에 흠뻑 빠져들 수도 있는 일이니까. 내겐 '애니어그램'도 그중 하나였는데, 나는 사람의 일부분만 보고 "너 A형이지." 하고 어림짐작하는 것도 싫어하지만, 몇 번 유형, 몇 번 유형하면서 정해진 타입 안에 편입시키는 건 더더욱 싫어했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내가 얼마나 복잡한 인간인데(애초에 테스트에 성심성의껏 임하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 많은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을 취합해 단 하나의 유형으로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랬던 내가 마니산에서 만난 등산객에게 막걸리 한잔 얻어 마시며, '4번 유형으로 태어나 7번 유형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듣고, 우리나라 애니어그램의 대가라는 분을 한 번은 찾아뵙고 싶은 마음이 드니, 사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사람과 그들이 나누는 생각, 취향에 대한 호불호가 강해도, 예전보다는 사람을 보는 시선이 관대해졌음을 많이 느낀다. 했던 말 조금씩 다르게 변주해서 하고 또 하는 사람을 보면 자신의 예술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부단히 나아가는가 싶고, 한때 거부감을 가졌던 존재도 다 각자의 장점과 아름다움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음이 보이니 말이다.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단,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평소 가깝게 지내고 싶고 흠모하던 사람이라도,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면 그만큼 탈이 나는 법이니 적당한 거리를 살피는 '촉'은 살려둘 필요가 있다. 밥을 좋아하는지, 빵을 좋아하는지. 커피를 좋아하는지 차를 좋아하는지, 상대방의 기호를 파악하려는 노력도 함께. 빅뱅과 악뮤 노래를 즐겨 듣는 내가 트로트 메들리를 부르며 흥겨워하는 사람들과 섞여 있는 것만큼은 좀처럼 즐겁지 않으니 말이다.
각자 잘 살아가는 인생이 모인 집단에서는 A와 B가 만나도 즐겁고, A B C D가 함께 만나도 즐겁다. 우리 부디 함께 하는 개인이 되기를, 서로의 성장과 발전을 기꺼이 응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그러기 위해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고, 내일 만나는 사람에게 만나서 기쁨이 되는 존재로 다가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