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저 내일 갈 수도 있어요."
"오늘 갈 줄 알았는데?"
사람을 내치는데, 떠나게 하는데 많은 말이 필요할까. 설 명절에 우리 식구끼리 여행 가려던 마음을 접고 용인에 짐을 풀었고, 연휴가 끝나면 나와 아이들은 강원도 태백으로 떠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날씨 예보에는 절대 지금 가서는 안 된다는 상징적인 숫자, -17 이 보였기에, 엄마 눈치 보면서도 하루만 더 버텨볼 심산이었다. 그랬는데, 몸서리치게 싸늘한 목소리가 온몸에 박히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서둘러 짐을 싸며 아이들을 들들 볶았다. 놀고 있지 말라고, 나갈 태세를 갖추라고. 그런 나 자신도 몸에서 스팀 나는 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밥은 먹고 가라는 소리가 어찌나 허황되게 느껴지는지. 짐 들어주려는 손길도 거부하고, 그렇게 집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생각할 시간도 벌 겸, 몇 가지 볼일도 볼 겸, 지척에 있는 롯데시네마 건물 내 종로 서적에 가서 책을 둘러보는데, 이대로 강원도로 넘어갈지, 좀 더 내 시간을 확보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느라 책은 쓱쓱 느낌으로만 훑다가, 정신과 박티팔씨의 엉뚱하지만 도움이 되는 인간 관찰의 기술, 이라는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관찰, 관찰하고 싶었다. 엄마라는 사람을, 엄마의 진짜 속마음을. 딸을 그토록 불편하게 대하는 이유가 뭔지, '입 다물어' '꼴 보기 싫어' 같은 원색적인 말로 상처 주는 이유가 뭔지. 나에게 직접적으로 하는 말이든,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을 표현하는 말이든 '엄마의 말'이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말들이 흘러나올 때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완벽한 타인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눈은 내리는데 배는 고프고. 체류하느냐, 표류하느냐를 고민하다가 일단 밥부터 먹고 보자는 생각에 수제비와 칼국수로 갈린 의견을 통합할 수 있는 동네 맛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남편과 전화 연결을 통한 현재 상황 보고와 대책 논의. 그에 따르면, 엄마는 내가 용인에 올 때마다 애들은 티브이 보여 주고 혼자 나가는 것과 남편 밥도 안 차려주고 놀러 다니는 것을 마뜩잖게 여겼다. 그놈의 밥, 밥! 김미경 강사가 지방에 가서 강의할 때면 "강사님이 이렇게 나와서 강의하면 남편 밥은 누가 차려줘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더니, 아무리 우리는 평화롭게 잘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나와 아이들이 없으면 남편도 제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기꺼이 환영한다고 얘기해도, 뒤에는 꼭 이런 말이 따라붙었다. 그래도 아빠는 안 그래, 그래도 엄마는 안 그래.
재작년 이맘때쯤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식사하고 있는 내게 '이번만은 할 말을 해야겠다'라는 비장한 각오로 다가와 "너도 이제 애들도 다 컸는데 일해야 하지 않겠니? 집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 보면 한심해."라는 말에 중상을 입었던 경험. 그때도 내 인생에 참견하려 드는 엄마에 반발해 평창으로 떠났더랬지.
'이 사람들은 왜 자기 기준에서만 바라보고 판단하는 거야?! 나 남편이랑 싸우는 일도 없이 잘살고 있다니까? 말을 안 했을 뿐이지, 우리, (은행 돈으로) 아파트에도 투자하고 경제적으로도 탄탄하게 기반 잡고 있다니까?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이렇게 속에서 뭉글뭉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태백으로 향하는데, 잠시 한눈팔고 우측 차선으로 넘어갔을 찰나에, 내가 이대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저세상에 가야 엄마가 후회로 몸부림칠까? 그러기나 하려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면서, 속에서 "엄마 돌아가시면 장례식에나 갈게요. 그때까지 만나지 맙시다!" 같은 무시무시한 말이 나뒹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아이러니한 건, 나의 이런 가시 돋친, 살아있는 감정이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는 부드러운 윤활유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들이 나를 불편한 존재로 여겨서는 안 돼, 좋은 말로 설득하고 친절하게 대하자, 하는 식의 결코 장시간 지속하지 않을 다짐.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세상 다정한 엄마가 되어서 (3시간째 자는) 아이들을 깨우고, 평상시 대화를 많이 나누는 엄마로 빙의해 지리와 (우리 가족의) 역사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아이들끼리 집에 있을 때, 엄마가 밖에서 전화해서는 두 아들과 함께 있던 조카에게 "준이, 윤이 싸우면 전화해!"라고 했다고. '우리의 존재가 그토록 거슬렸을까, 정말 미운 털이 박혀도 단단히 박혔구나' 생각하니 금세 울적해져서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려 애썼다. 다행인 건, 아이들은 그런 엄마의 영향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할머니가 까칠하게 대할 때면 기분이 좀 나쁘긴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티브이만 보면 됩니다! 할아버지한테 용돈까지 받으면 더 좋고요' 참 건강한 아이들을 만났다. 내가
아이들 덕분에 마음이 많이 녹아내리긴 했지만, 가슴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분노와 적개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툭툭 튀어나오는 '버럭'이 그 증거. 어제저녁엔 아빠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원점으로 회귀하는 말에 휩쓸리다가, 결국, 밀던 쇼핑 카트를 멈추고 '당신은 옳지 않다'라고 주장하는 갖은 증거를 쏟아냈다. 솔직히 황당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아웅다웅하느라 자식들에게 예민함과 눈치 보기의 정신적 잔재를 남긴 사람들이, 멀쩡하게 잘살고 있는 나에게 본인들의 가치관을 옮겨 심으려는 것이…. 그러다 결국, 마트 한복판에 서서 목소리를 높이는 여자가 되고 말았다. 내가 그토록 경멸했던, 장소 불문하고 '쩌렁쩌렁' 울리게 만드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렇게 한껏 날을 세운 채 아빠에게 말했더랬지. 계속 같은 얘기할 거면 전화하지 말라고, 받고 싶지 않다고.
내 힘으로 그분들의 일상에 변화를 주거나, 인식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막상 2:1로 몰아붙이는 견해의 오류를 맞닥뜨리게 되자 그동안 잠자코 있던 억눌린 감정들이 활활 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사랑한다,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러기엔 그동안 무관심, 무반응에 막혀버리거나, 제대로 유통되지 못한 얘기들이 너무도 많아서, 각자의 '사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되기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엄마가) 아무리 그래도, 앞으로 안 보고 살 거냐'라는 논리에 마음에도 없는 안부 전화는 No! 그저 처음 만난 사람에게 초코파이 하나 나누어 주는 등산객의 마음처럼, 적당히 가깝고, 적당히 친절함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기를, 서로에게 실수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럼, 제 마음에 새 살이 돋을 때까지 당분간 연락 좀 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