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정신 놓고 다니는 일이 빈번해진다. 녹아있는 눈길을 달리다가 덤프트럭이 뿌려주신 흙탕물 세례에 좀비 차가 되어버린 지 어언 5일째. 태백에서는 날씨가 영하로 떨어지면 자동 세차장 운영을 할 수 없기에, 이제나 할 수 있을까, 저제나 할 수 있을까 애타게 기다리다가, 결국 집으로 복귀하고 나서야 근처 주유소에서 목욕재계를 할 수 있었다. 차 내부 어디를 둘러보아도 쓰레기 없는 깔끔한 곳을 찾기 힘든 상태라 대충 주워 담아 '나 좀 보세요'하고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파란색 봉투에 버렸다가 그 위치가 아니라며 사장님한테 혼나고, "다음부터는 잘 인지할게요."라고 사과하며 그렇게 교양 없는 여자가 아님을 어필했다.
그대로 도로로 진입하려던 순간, 주행 가능한 거리가 50km에 턱걸이하고 있는 게 보여서 셀프 주유기 앞에 차를 세웠는데, 사실 나는 알아서 모든 걸 다 해주는 '사람'이 사라지고, 기계가 교대 근무를 하게 된 걸 슬퍼하는 아날로그 인간이었다. 기름 넣으러 갔다가 'Self'만 보면 도망치는. 왠지 내가 주유하면 30초마다 1km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그랬던 인간이 오늘은 무슨 배짱인지 '한 번 해보자'하는 마음이었는데, 생각보다 간단하게 끝난 것을 싱거워하며 커피숍에 도착했을 때, CCTV 공화국의 저력을 믿고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주유소로, 간만에 현금을 두둑이 품고 있는 지갑을 찾으러. '역시~ 대한민국!'이라는 감탄사가 증명하듯 내 지갑은 주유기 위에 조신하게 누워있었고, 혹시나하는 마음에 내부를 살폈을 땐 속이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어? 현금이 있긴 있는데, 어째서 육만 천 원이지? 내가 분명히 십만 원을 넣어두었고, 현금 쓴 거라고는 식당에서 애들 옥수수 과자 사준 것밖에 없는데…'
눈 뜨고 코 베였다고 말하기엔 정확한 증거가 없고, 사실 확인을 하기엔 어정쩡한 액수. 나와 끝까지 함께할 '덜렁거림'에 대한 비용이라 생각하고 머릿속에서 삭제해 나가는데, 혹시 잃어버린 게 맞는다면, 본디 나갔어야 할 5만 원이 알아서 사라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백 여행 이틀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못 마신 지 단 하루 만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커피는 마시고 시작해야지!' 하는 아우성에, '태백시청 커피숍'으로 검색한 곳 중 가장 '핫플'로 보이는 장소를 골라 찾아가는 길이었다. 내비게이션 지도상으로는 목적지에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라는 거야? 핸들을 두 손으로 꼭 붙들고 두리번 두리번거리다가…, 쿵! 아~ 이 얼마 만에 저지른 접촉 사고인가, 왜 항상 쭈그리가 되는 건 나여야만 하는가.
어떻게 대처를 하긴 해야 하는데, 두어 군데 난 새끼손톱만한 '외상'을 두고 보험에 접수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럴 경우에, 통상 5에서 10만 원 정도로 퉁치고 보는데, 그러고 싶은 마음마저. "어디 부서진 곳은 없는 것 같은데(당연히 없지. 딱 봐도 알잖아요?) 저도 세차해 봐야 알 것 같고, 그래도 도색은 해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갑'님의 발언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잘 넘어가야 해. 저 아저씨도 지금 그냥 봐줘야 하나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게 틀림없어. 못된 사람이었다면, 평화 협상 분위기도 아니었을 거야…. 여행에 사건 한 자락 끼워 넣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를 '선생님'으로 호칭하는 '정중한 비굴함'으로 어떻게든 돈 안 들이고 해결하고 싶었다.
"선생님, 한 번만 봐주세요."
"저희 멀리서 왔는데, 선처를 부탁드려요."
"불쌍한 애들 봐서라도, (또) 봐주세요."
마침 밖으로 나온 아이들이 마지막 말을 듣고, "엄마, 우리가 왜 불쌍한 애들이야?" 하고 물었는데, 어쩌다 그 말을 입에 담은 나도 후회스럽다만, 상황을 모면하는 게 더 중요했던 나는 그런 비굴함조차 감당할 수 있었다. '비굴함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야. 니들이 보험료 올라가는 소리를 알아?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다행히 나의 '갑'님은 "그러게 왜 가다가 급정거를 합니까?"라고 적반하장으로 구는 말 한마디 없이, 그저 수그리고 들어가는 나를 정상 참작하셨는지(똥차로 변한 아방이도 한몫했다), "제가 도색할게요."라는 아름다운 말을 남기고 길을 떠나셨다. 마치, 마음 바뀌기 전에 저 먼저 갑니다, 라고 말하는 듯한 뒷모습을 남기고.
아…,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란 게, 최소한의 성의와 진심만 있으면 해결 못 할 건 없구나. 모든 걸 가성비의 논리로 생각하는 내가, 자칫 '여행 한 번 하려다 수십만 원 날아가게 생겼네', '숙박 저렴하게 예약했다고, 룸 업그레이드해줬다고 좋아하면 뭐 하나. 정신 똑디 안 차리면 그만인데' 자책하며 여행의 즐거움을 망가뜨릴 수 있었던 일도, 체구만큼이나 마음 넉넉하신 분을 만나 깔끔하게 마무리되니 어찌나 감사하던지.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길을 조심히 운전하고 가시라고 뒤 범퍼에 대고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감사해요, 복 많이 받으세요,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