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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저씨 2

by 청초마녀


정치에 관심이 없다. 내가 아는 거라곤 대통령이 문재인이요, 국무총리가 정세균이라는 사실뿐이고(국무총리 씩이나 아는 건 코로나 상황 대책 발표로 자주 등장하시기도 하지만, 남편 직장 내 매점 사장님의 오라버니이기도 해서), 20여 년 전엔 중국 어학연수를 마치고 갓 귀국했을 때 박근혜가 누군지도 몰라 아빠를 충격에 빠뜨려서, 다음 날 그가 신청한 중앙일보를 보고서야 놀랄만한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내가 '슬로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지었네'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문재인 정권의 사람이 먼저다. 사람이 먼저이고, 사람이 전부인 건 정치에서만 잘 먹힌 게 아니라, 내 삶의 최전선에 있는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으로 시작하고 사람으로 끝나는 여행. 아무리 기대보다 실망스러운 곳이라도 거기에서 만난 사람이 좋으면 평점 4.25 정도는 줄만했고, 장소도 좋은데 사람마저 친절하면 두고두고 꺼내 먹는 추억이 되었다.


이번 태백 여행의 메인은 태백산에 오르는 것이었건만, 목요일부터 풀린다는 날씨는 여전히 산에 오르기에 부적합 상태였고, 우리의 '1박'이 아쉽게 사라지지 않도록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목적지를 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선택한 코스가 한강 발원지인 검룡소와 용연동굴. 사실 그동안 여행 다니며 동굴이란 동굴은 다 다녀본 까닭에, 매표소에서 "초등학생 둘, 성인 한 명이요."라고 말하면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여긴 그냥 시간 때우러 가는 곳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괜스레 불평하는 말이 창구를 타고 넘나들었다.


"주차장이 이렇게 넓고, 차도 거의 없는데 주차비를 받네요? 태백 여행하면서 주차비 받는 곳은 처음이에요."

"여름이면 여기 주차장에 차가 꽉 차요. 저희도 어쩔 수 없어요."


아휴…, 나 왜 이러니? 고작 2천 원에 꺼내지 않아도 될 말로 긴장과 피로를 해소하려는 나를 재빨리 운전석에 쑤셔 넣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동굴을 향해 직접 차를 끌고 올라갔다. 비수기이기도 하지만, 코로나 여파로 한적하다 못해 썰렁하기까지 한 동굴 앞 주차장. 차가 올라오는 것을 본 남자 직원 두 분이 오랜만에 등장한 인류를 반기듯 푸근한 미소로 나타났다. 그분들을 보는데 어릴 때 자주 뵙던 아빠의 술친구, 아니, 삼촌을 만난 느낌이라, 동굴에 대한 사전 정보보다는 '먹는 문제'에 대한 질문이 먼저 튀어나왔다. "혹시, 근처에 갈만한 식당 있어요?" 순간, '이 분야는 내가 전문가이지!'라고 말하는 듯 적극적 관심을 표하는 직원분은 친히 핸드폰에 저장된 맛집을 공유해 주시며, 본인도 안 가본 곳이긴 한데 맛있어 보이더라는, 사실과 무관할 수 있는 개인적 소견도 덧붙여 주셨다.


동굴 탐험은 예상보다 길고, 생각보다 많은 볼거리로 세 모자에게 만족을 주는 곳이었다. '또 동굴이니?' 무시했던 마음이 미안할 정도로. 처음 입구를 내려갔을 때만 해도 조악하게 꾸며놓은 분수대에 첫인상이 좋지 못했다. '아…, 이런 인공적인 빛을 보려고 온 게 아닌데…' '이거 진짜 30분이면 다 도는 거 아니야? 그럼 시간이 어정쩡하게 남는데 뭐 한담…' 미리 계획하고, 앞서 걱정하는 법이 없는 나도 다음 일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시작이었다고 말하면 상상이 될까? 하지만 진짜는 안에, 더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다. 그곳엔 여느 동굴과 확연히 다른 특징이 있었는데, 정말 신비한 용 한 마리가 숨어있을 것 같은 큰 구멍이 많다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앞서가던 아이들이 무섭다고 호들갑 떨어도 애써 덤덤한 척하다가, 막상 그 구간을 지날 땐 같이 가자며 짜증을 내기도.


동굴에서 살아남기 위해_사실은 시간 끌기 위해_아이들과 포옹과 입맞춤으로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아직 가야 할 길은 먼데 시간이 제법 흐르고 있었다. 자신이 '흑룡' 띠라 그런지 유독 '용'과 관련된 형상에 관심을 보이며 두루두루, 자세히 살펴보시는 아드님. 덕분에 그곳으로 안내한 나는 상당히 흡족해하고 있었고, 통과하는 길목마다 '우~'하고 입을 내밀며 뽀뽀해야 지나갈 수 있게 해주는 아이를 응대하는 게 순간순간이 즐겁고 행복해서 용연동굴을 마음속에 '인생 동굴'로 새겨 넣고 있었다. 그렇게 이젠 좀 끝나도 좋은데? 라는 생각이 들 즈음, 저 멀리서 약간의 염려와 다수의 의아함을 품은 직원 한 분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났는데 안 나오셔서…" 라는 말을 남긴 그는 살짝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이렇게 오랫동안 구경하는 사람들은 처음 봤다는 듯이. 그러고는 생존 확인되었으니 괜찮다고, 천천히 둘러보고 나오라는 말을 전하고 순식간에 사라지셨다.



아이의 마음에도 직원분들의 친절한 마음이 느껴졌는지, 둘째 녀석은 보이지도 않는 박쥐와 제 딴에 신기한 것들을 찍더니 아저씨 보여드리겠다 하고(그걸 다 받아주셨다), 나는 속으로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라고 읊조리고 있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을 땐 나에게도 아주아주 특별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분이 직접 검색해서 손글씨로 적어주신 맛집 리스트! 식당에 대한 간략한 브리핑과 함께, 그중에서도 별표 하나 추가한 00마을을 특별히 추천해 주시는 정성이 어찌나 감사한지, 태백을 넘어 강원도와 사랑에 빠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덕분에 맛있는 식사는 물론이고 그날의 모든 기억을 좋게 만들 수 있었던…. 감사합니다, 아저씨, 용연동굴에 대한 추억은 아저씨와 함께 오래오래 함께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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