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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무게는 마음을 싣고

by 청초마녀

매일 몸무게를 잰다. 정확한 수치 확인을 위해 몸에 남은 수분 한 방울이라도 더 빼고, 오차 범위에 지장을 주지 않을 잠옷을 입고. 그런데, 우리 집 체중계는 몸의 무게만이 아니라 마음 상태도 측정하는 것인지, '어제 내 하루가 어땠는가'에 따라 55 능선을 넘나들며 희비가 엇갈리곤 했다. '양'으로만 놓고 본다면야 먹는 건 크게 변동이 없는데, 기분에 따라 몸무게가 들쑥날쑥한다고 할까. 확실히 덜 움직이고 더 가라앉아 있는 날엔, 다음날 '나의 어제'를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는 숫자가 발아래 있었다.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지금 하는 것을 이 시간 이후에도 지속하고 싶지 않다, 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날. 잘 쓰인 글이지만, '작가의 말'에 다다르기까지 나와는 결이 다른 감각과 사유를 따라가느라 평균 이상의 에너지를 쏟고 나니, 책이고 뭐고, 산이고 뭐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 하루를 건너고 싶었다. 약간은 '될 대로 돼라' 하는 그런 마음. 그렇게 무작정 기차표를 끊고, 평소 가보고 싶었던 대전의 한 독립서점으로 향했다. '어떤 곳이길래 나의 우상인 작가님들이 줄줄이 다녀가신 거지?'라는 호기심이 가득했던 터. 한 번 마음에 스며든 것은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로서는, 어제가 서점 여행 가기 딱 좋은 날이었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생각보다 쉽고 간단하게 도착한 서점 앞에서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창가로 보이는 책들이 아닌, '성심당 주차장'이라 쓰여있는 표지판이었다. '응? 성심당? 내가 아는 그 성심당?' 잡지에서 익힌 유명세를 두 눈으로 맞이하니 반갑고 설레기도 해서, 드나드는 차를 진두지휘하시는 아저씨께 "이 근처에 성심당이 있어요?" 하고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을 건넸다. 어쩐지 안내해 주시는 아저씨 역시 '너만 안 보인단 말이야?'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 어쨌든 서점 하나 바라보고 왔는데, 성심당이라는 빵까지 따 가게 생겼으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내키면 하고 보는 자유로움이 나를 대전까지 데려다주었지만, 그 자유로움이 지나치면 스스로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을까. 훌쩍 떠난 여행이 그저 헛된 짓이 아니길 바라고 있었나 보다.


생각보다 아담한 공간엔 읽은 책, 안 읽은 책, 처음 보는 책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허나 '득템'이라고 할 만한 새로운 발견은 없어서 서가에 꽂힌 책을 꼼꼼히 둘러보고 있는데, 한 권의 책을 계기로 스텝과 대화를 나누면서 여섯 권의 책을 순식간에 구매하고 말았다. 나 오늘 집에 안 갈래…는 아니고, 나 오늘 지르고 볼래, 노래하는 마음으로. 사실 나는 인터넷 서점의 할인 혜택과 추가 적립, 그리고 (비록 포인트는 차감되지만) 사은품 증정에 집착했던 사람인데, 언제부터인가 내 취향에 맞는 컬렉션이 가득한 서점에 가면 마음도 열리고 지갑도 열리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책은, 현장 구매가 제맛이라며.


묻고 따지지도 않고 십만 원에 달하는 책을 구매한 내가 고마웠는지, 스텝이 커피 한잔 대접하겠다고 했지만, 마침 남편으로부터 도착한 술 약속 통보 덕분에 편히 머물 여유가 없었다. 기차를 타야 하고, 집에 가기 전에 반찬 쇼핑도 해야 하니까. 그 이전엔? 성심당의 부추빵과 튀김소보로도 데려가야 하니까. 하지만 막상 그곳에 들어섰을 땐, 서점에서 충전된 영혼이 진열대 위에 가득 놓인 빵 사이로 흩어지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나가. 너 그렇게 빵 좋아하지도 않잖아. 소화 잘 못 시키잖아. 괜히 남들 따라서 욕심부리지 말고, 내려놔!' 분명 이런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아무 생각 없이 샀다가 아무 생각 없이 한입 베어 물고 말았다. 아쉽게 놓쳐버린, 20분마다 한 번 오는 버스를 기다리며.




무리한 구매욕에 사버린 먹지도 않을 빵을 바라보며, 차라리 서점에 더 머무르며 커피나 한잔 마실걸, 책이나 한 권 더 구매할 걸 후회하느라 마음에 번뇌를 키우긴 했지만, 무턱대고 떠난 서점 나들이는 분명 내게 청량한 자극이 되었다. 종이백 가득 담아온 책들이 혼자 있는 시간을 외롭지 않게 해줄 것이고, 갈까 말까 망설이느라 선택하지 못한 채 우유부단함에 갇혀버리기보다, 직감을 믿고 능동적으로 만들어 낸 하루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회피이고 도피일지언정,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쌓여있는 돌덩이 하나를 내려놓기에 충분했다. 그런 덕분인지 간밤에 몸무게도 오백 그램이나 줄었다. 체중계 이 녀석, 내 마음마저 재고 있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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