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의 동침 Episode 4.
매뉴얼은 때로 지침이 아니라, 날카로운 무기가 된다.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교사의 적이 바로 또 다른 교사임을 깨닫는다.
12월 23일.
크리스마스 사흘 전, 겨울방학을 불과 며칠 앞둔 날이었다.
창밖엔 잿빛 구름이 내려앉아 있었고, 교무실 난방기 바람은 건조하게 귀를 울렸다.
하영은 인성부장이자 학교폭력 책임교사였지만, 평소 실무는 담당교사가 맡았다.
그날 아침, 교무실 문이 열리며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었다.
미진이 엄마가 들어왔다.
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그것도 학교폭력 업무를 맡고 있는 사람답게 손에는 두툼한 매뉴얼이 들려 있었다.
“제 아이를 괴롭힌 학생이 있습니다.”
가해자 명단은 한 명.
짧고 단호한 말투였지만, 표정에는 아직 약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학교폭력담당교사가 차분히 기록하고, 사안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런데 다음 날, 같은 문이 다시 열렸다.
미진이 엄마의 발걸음은 더 빠르고,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가해자가 한 명이 아니었어요. 두 명입니다.”
탁, 서류를 책상 위에 놓으며,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이건 집단 폭행이에요.”
순간, 교무실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담당교사의 눈썹이 번쩍 올라가고, 고음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집단 폭행이라뇨? 그건 너무—”
담당교사는 말끝을 올리며 손바닥을 펼쳤다.
“너무가 아니라, 두 명이면 집단이잖아요.”
미진이 엄마는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책상 위 매뉴얼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목소리가 부딪힐 때마다 얇은 칼날이 튀었다.
책상 위 커피는 식어가고, 서류 모서리만 점점 눅눅해졌다.
하영은 그 뒤에서 가만히 지켜봤다.
감정이 앞서는 순간, 매뉴얼은 지침이 아니라 무기가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며.
사흘째 되는 날, 미진이 엄마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교무실로 번졌다.
이번엔 두 명이 아니라 반 전체였다.
“서른 명 모두가 우리 아이를 괴롭혔습니다.”
이젠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그날부터 하영의 책상 위엔 학교폭력 서류가 눈처럼 쌓였다.
가해자 상담, 피해자 상담, 학부모 전화, 조사 기록…
종일 뛰어다녀도 서류더미는 줄지 않았다.
밤 11시.
난방기 바람은 이미 멈췄고, 교무실 안 공기는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 운동장은 가로등 불빛 아래 얼어붙어, 숨죽인 듯 고요했다.
복사기만이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위이잉—찰칵.
종이가 한 장, 또 한 장, 바깥 트레이 위로 떨어졌다.
하영은 무심히 그 종이를 모아 쌓았다.
이미 같은 문장을 하루에 수십 번은 본 듯한 기분이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자 허리가 뻣뻣하게 당겼다.
손끝은 건조하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종이 냄새와 토너 냄새가 공기 속에 섞여 코끝에 맴돌았다.
휴대폰 화면엔 집에서 보낸 메시지가 몇 개 깜빡이고 있었지만, 읽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교무실 문틈으로 스며드는 복도 바람이 차가웠다.
그 순간, 하영은 이상하게도—
서류더미가 무게가 아니라, 벽처럼 자신을 둘러싸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벽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는… 설명하기 힘든 예감이 스쳤다.
며칠 뒤, 도교육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미진이 엄마가 학교를 공식적으로 신고했다는 통보.
‘학교가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몰아세운다.’
신고 대상은 교감과 담당교사였다.
명단엔 하영 이름이 없었다.
교무실에서 그 사실을 들었을 때, 하영은 잠시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다음 순간, 등줄기를 스치는 서늘한 바람을 느꼈다.
폭풍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유일하게 비를 맞지 않은 사람처럼—
이번엔 비켜갔지만, 다음번엔 자신일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창밖 어둠처럼 천천히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