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순『질문 빈곤 사회』로 교육 속 질문의 의미를 다시 묻다
#성찰의 의미
우리는 ‘평가’에 너무 익숙하다.
그러나 그 평가가 어느새 줄 세우기로 전락했음을,
우리는 종종 너무 늦게 깨닫는다.
“성찰하는 삶은 평가와는 다르다.”
성찰은 단순히 결과를 평가하는 도구가 아니다.
성찰은 나와 나의 관계, 나와 타자의 관계,
그리고 ‘세계 안의 나’를 깊이 들여다보는 힘이다.
그렇다면, 성찰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그것은 관심과 호기심, 그리고 '왜?'라고 묻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스스로 질문하지 않으면,
우리는 타인의 질문을 외면하게 되고,
비판적 사유 없이 왜곡된 이데올로기를 따르게 된다.
그 결과,
‘선량한 무지’가 악이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몰라서 침묵하고,
침묵했기에 결국 가담하게 되는 현실.
그런 삶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아이들을 ‘질문하는 존재’로 길어내야 한다.
그 질문을 통해 아이는
누군가의 정답이 아닌, 자기만의 앎을 얻는다.
#교사는 ‘산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교사의 역할은 무엇일까?
질문을 통해 새로운 삶을 스스로 깨우치도록 돕는 산파.
소크라테스가 그랬듯,
교사는 질문으로 생각을 낳게 하고,
그 생각이 태어나는 과정을 돕는 조력자여야 한다.
교사의 말은 지식을 ‘가르치는’ 데서 멈추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질문을 ‘끌어내는’ 말이어야 한다.
지금, 나는 어떤 질문을 하고 있는가?
아이들을 침묵시키는 질문인가,
아니면 생각을 시작하게 만드는 질문인가?
좋은 질문은 왜곡된 전제를 품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헛된 질문, 무의미한 질문,
이미 기울어진 전제에서 출발하는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진다.
“열심히 하면 다 잘될 거야.”
“좋은 대학 가야 성공하지.”
“학교는 원래 그런 거야.”
이 익숙한 말들은 겉보기엔 조언 같지만,
사실은 질문을 막는 문장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왜곡된 전제가 숨어 있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좋은 대학’은 누구의 기준인가?
‘원래 그런 것’이라면, 정말 바꾸지 않아도 되는가?
질문 없이 받아들인 전제들은
아이들을 생각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고,
결국, 지배 담론을 답습하는 사람으로 길러낸다.
그러므로 교사는
아이들에게 ‘좋은 말’을 건네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질문하게 돕는 사람이어야 한다.
틀린 질문을 반복하기보다,
왜곡된 전제를 벗겨내고,
다시 묻게 하는 사람,
그 산파가 바로 교사다.
#‘질문 빈곤 사회’를 넘어서
이런 교육 현실 앞에서,
강남순의 『질문 빈곤 사회』는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다시 묻게 한다.
질문은 도전이다.
익숙한 질서를 흔드는 혼란이며,
변화를 촉진하는 불씨다.
우리는 질문을 꺼려한다.
그러나 질문을 피하는 사회 속에서도,
아이들에게 질문의 가치를 일깨워야 할 사람이 있다.
바로, 교사다.
교사가 먼저 질문하지 않으면,
아이도 질문을 멈춘다.
아이들이 정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자신의 호기심을 깨닫고,
그 호기심이 깨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교사의 가장 근본적인 역할이 아닐까.
그래야 아이는
보다 나은 ‘나의 삶’을 상상하고,
보다 나은 ‘우리의 세계’를 모색하며,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로 자란다.
정답을 가르치는 교사보다,
함께 질문을 던지는 교사.
그 질문 앞에서 망설일 수 있는 교사.
오늘 이 시대, 진짜 교육을 열어가는 사람은 그런 교사다.
#질문하는 교사로 산다는 것
매일 수업을 한다.
하지만, 내게 남는 질문은 무엇인가?
이 수업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질문은 아이의 사유를 여는가, 닫는가?
나는 이제,
교실에서 질문을 낳는 산파가 되고 싶다.
줄 세우기식 평가가 아니라,
아이와 나의 삶을 함께 성찰하는 수업.
그런 수업을 꿈꾼다.
질문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성찰의 시작이며, 교육의 본질이다.
나는 오늘도, 아이들과 함께 묻는다.
“정말 그런가?”
그 물음에서,
배움은 다시 깨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