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득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에세이를 좋아하는 편인데 그가 야구장에서 야구 경기를 보다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는 구절이 특히 좋았다. 글을 잘 쓰는 편은 아니지만 글 쓰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20대부터 가끔 신변잡기적인 글을 써 왔다. 물론 혼자 중얼거리는 수준이었다. 다행히 끈기라는 건 또 있어서 제법 끈질기게 지금도 써 내려가고 있다. 나도 책을 써 볼까 하는 생각은 이미 오랫동안 묵혀 두어서 먼지가 풀풀 날 정도지만 밥 벌어먹고 살기도 바쁜 요즘 시대에 지금 당장 책 한 권을 뚝딱 쓸 수는 없었다. 이게 바로 현실이다. 현실.
어느새 30대 중반, 이제는 뭔가 내 이야기를 제대로 해 보고 싶었다.
30대 기혼 여성. 국제결혼. 무자녀. 해외 거주자. 해외부동산 보유. 국문과 졸업. 10년 차 한국어 교사. 석사 중도 포기. 채식주의자. 최근의 취미는 등산. 최근 관심사는 주식 투자. 책 쓰기. 이렇게 간단히 나열된 단어만으로도 남들에게 충분히 나를 설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고심해서 만들어 낸 긴 호흡의 문장으로 나를 찬찬히 설명하고 싶었다. 식당 일이 끝나고 시간을 내서 소설을 썼던 하루키처럼 나도 저녁 강의를 하기 전에 집중해서 글을 쓰면 어떻게든 될 거 같았다.
그럼 무엇을 쓸까? 브런치를 쭉 훑어보니 다양한 주제들이 있다. 나도 뭔가 잘 팔릴 주제를 선정해 각 잡고 써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든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주제들이 있다. 예를 들면 "30대 여성 헬조선 탈출기" 같은 거? 아니야 요즘 누가 '헬조선'이라는 고릿타분한 단어를 쓰겠어. 그럼 "30대 여성 해외부동산 보유기"이런 건 어때? 다들 투자에 진심인 시대이니 좀 눈길을 끌 것 같은데? 그런데 이것도 잘 쓸 자신이 없다. 가계부도 안 쓰는데 무슨 얼어 죽을 부동산 이야기야.
아무래도 모르겠다. 모르겠어서 그냥 내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내가 하루키의 에세이를 좋아하는 것처럼 별거 아닌 이야기를 진심으로 쓰면 누군가는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앞에서 쭉 나열한 단어들을 키워드 삼아 조금 더 세심하게 조각조각 나누어 시간을 들여 쓰면 될 것 같다. 그래서 나의 브런치 주제는 30대 여성의 해외 일상이다. 와 이렇게 쓰고 나니 진짜 별거 없다. 그런데 어쩌겠어. 그게 나라는 사람인데. 과대 포장 없이 그냥 평범한 나에 대해 써야 오래 쓸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대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만 이야기를 할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 내가 쓸 글에서 등장하는 대만은 분석 대상도 아니고 비교 대상도 아니며 소개해야 하는 대상도 아니다. 그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터전이고 앞으로 별일이 없으면 죽을 때까지 살아갈 수도 있는 곳이다. 내 글에서 앞으로 종종 등장할 대만이라는 곳을 그냥 한국의 서울, 경기도, 부산 아니면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어딘가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에게 있어서 대만이라는 곳은 그저 나를 열심히 먹여살려야 하는 공간이다. 지극히 일상적이며 반복적인 공간. 따라서 무기력에 빠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재밋거리를 찾아내야 하는 공간. 그렇기에 코로나로 해외여행을 갈 수 없는 요즘, 나의 글에서 뭔가 이국적이며 색다른 여행지로서의 대만의 모습을 찾으려는 분들에게는 김새는 글이 될 수도 있겠다. 내가 쓸 글들은 평범한 생활자로서 살아가는 대만, 프리랜서로서 먹고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대만, 일상이 너무나 구태의연하여 뭐 재미있는 거 없나 두리번거리는 공간으로의 대만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나도 어떤 글을 쓰게 될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하니 우선 쓰고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