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은 날 배신하지 않는다
작년 4월, 그러니까 대만에 코로나가 확산되기 전 호기롭게 PT를 끊었다. 미술관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발견한 작은 여성 전용 피트니스센터에 홀린 듯이 들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트레이너 선생님과 회원들도 다 여성이었던 것도 마음에 들었지만 유리 벽 너머로 한 여자분이 땀을 흘리며 역도를 들었다 내렸다 하는 모습이 참 생경해서 나도 한번 해 보고 싶었다. 꽤 오랫동안 요가를 해 왔지만 항상 새로운 운동에 대한 갈망 같은 게 있었는데 헬스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PT를 받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첫 수업을 듣고 나서 갑자기 코시국이 터졌다. 항상 0이었던 대만의 확진자 수가 하루아침에 300명 대가 되니 대만 사람들은 패닉 상태였다. 물건 사재기도 있었고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나도 강의가 취소되었고 당연히 PT도 언제 다시 시작하겠다는 기약 없이 중단이 되었다. 결국 나는 잠시 한국으로 피신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지난여름과 가을을 보내고 다시 대만에 돌아오니 내가 없는 동안 대만 사람들은 기어이 다시 확진자를 0으로 만들어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드디어 올해 1월부터 다시 PT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등산 말고는 운동을 전혀 하지 않은 터라 오랜만에 받은 PT는 조금은 버거웠다. 요가를 할 때 필요한 근육과 헬스를 할 때 필요한 근육은 그 위치와 사용 방법이 달랐다. 예전에 요가 선생님과 필라테스 선생님이 자세를 설명해 주실 때 근육 쓰임이 약간 달라 혼란스러웠는데 PT는 또 달랐다. 날개뼈는 어떻게 아래로 내리라는 건지, 가슴 근육으로 덤벨을 올리라는데 무슨 느낌인지 사실 아직도 감이 안 온다.
그런데 요가와 필라테스를 한창 미친 듯이 할 때 만들어 놓은 속근육의 부스러기가 아직 남아있었는지 의외로 초보 티는 빨리 벗어났고 이제는 매번 갈 때마다 PT 선생님이 야금야금 증량을 하시는 바람에 1시간짜리 운동이 끝나면 내 사지가 온전히 내 것이 아닌 느낌을 받게 된다. 아, 여기가 엉덩이 근육이었구나. 복근이라는 녀석은 웃을 때 꽤 많이 사용되는군. 그래 맞아. 나한테 코어라는 친구가 있었지... 역시 근육은 날 배신하지 않는다. 꾸준히 운동을 한 과거의 나를 칭찬하며 운동의 끈을 놓지 않은 오늘의 나를 칭찬하고 싶었다.
지난 몇 년간 저축하듯이 조금씩 모아둔 근육으로 오늘을 살 수 있게 된 것처럼 이제는 좀 다른 근육을 단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육이라기보다는 습관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바로 글을 쓰는 습관. 올해는 뭔가 진심을 담아 내 이야기를 쓰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물구나무서기를 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코어가 턱없이 부족하다. 언젠가 물구나무를 서려면 오늘 당장 1분 동안 플랭크 자세로 버티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글 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쓰려면 몇 가지 선행해 두어야 할 게 있다. 짬짬이 책을 읽어서 평소에 머리 근육을 많이 단련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일정 시간 앉아서 진득하니 써 내려가는 엉덩이 근육도 필요하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아침에 일어나 의식적으로 몇 가지 일을 추가적으로 하고 있다. 기존의 아침 루틴은 뉴스 보고, 토픽 기출 문제 분석하는 게 다였는데 이제는 여기에 글쓰기를 더했다. 주로 저녁 강의만 있는 날만 가능한 일정이지만 앞으로는 욕심을 좀 더 부려서 매일 아침 글쓰기를 해 보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꽤 좋아하는 편인데 그가 쓴 에세이에서 "키친 테이블 소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그도 젊을 때는 생계를 위해 저녁에는 재즈 카페를 운영하고, 아침이 돼서야 재즈 카페의 테이블에서 틈틈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렇게 쓴 소설을 그는 "키친 테이블 소설"이라고 칭하는데 이때 쓴 소설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였고 군조 신인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나는 전업 작가가 되려고 하거나 문학상 수상 같은 거창한 목적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내 이야기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진심을 담아 쓰려고 할 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아침에 일어나 화장대에 앉아 글을 쓴다.
오랫동안 생각하고 기록하는 삶을 오랫동안 그만두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니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동안 너무 바빴다는, 누구라도 댈 수 있는 핑계를 대는 게 머쓱해서 다른 핑계를 한참 찾았지만 그게 맞다. 너무 바빴고 바쁜 동시에 너무 게을렀다. 김신지의 에세이 <기록하기로 했습니다>에서 오늘을 잘못 쓴 메모처럼 아무렇게나 구겨 쓰레기 통에 버리지 말고 잠들기 전 5분만이라도 시간의 틈새를 펼쳐 들여다보라는 구절이 마음을 콕하고 찔렀다. 그래서 나도 조금씩 글을 쓰기로 했다. 글을 쓰지 않는 삶은 너무나 슬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