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회사 PT 지옥도2
대표는 늘 같은 말을 했다.
“회사 잘되면 다 해결될 일이에요.”
그 말은 따뜻했다.
마치 난로 같은 말이었다.
문제는, 우리 회사가 난로를 켤 돈이 없는데도 난로 얘기만 했다는 거다.
아침 8시 40분, 출근하자마자 메신저 알림이 떴다.
대표: 팀장님, 오늘 회의실에서 잠깐 봐요! 분위기 잡아야 해서요�
‘분위기’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내 몸은 자동으로 긴장했다.
기획자가 트리거를 다루는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냥, 이 회사에서 ‘분위기’는 사람을 바꾸는 버튼이었기 때문이다.
회의실 문을 열자마자, 제작팀장이 먼저 앉아 있었다.
팔짱을 끼고 있었다.
표정은 “기획이 이상하니까 대충해요” 그 표정이었다.
이사는 노트북을 열고 말했다.
“어제 PT 피드백 들었지? ‘시안 아쉽다’.”
대표가 나를 보며 웃었다.
“그쵸, 팀장님이 잘 정리해주면 되잖아요.”
나는 속으로 ‘아, 오늘도 시작이구나’ 싶었다.
이 회사에서 “정리”는 문서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제작팀장이 툭 던졌다.
“근데요, 팀장님. 제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가이드가 너무 빡세요.”
“빡세다”는 말이 신기했다.
내가 준 건 가이드가 아니라 응급처치 키트였는데.
“제가 왜 빡세게 준 줄 알아요?” 내가 물었다.
제작팀장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고개는 “설명해봐요”의 고개였다.
나는 말했다.
“안 빡세게 주면, 안 나와요.”
이사는 웃듯이 말하고, 웃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그걸 팀장님이 커버하면 되잖아.”
대표가 바로 이어받았다.
“맞아요. 우리 팀장님은 원래 그런 거 잘하시잖아요.”
칭찬이었다.
이 회사에서 칭찬은 늘 추가 업무였다.
나는 그날 아침, 이상하게도 감정이 먼저 안 올라왔다.
대신 계산이 올라왔다.
그래. 회사가 잘되면 해결될까?
그럼 ‘잘된다’의 정의가 뭔데?
돈이 들어오면? 수주를 하면? 사람들이 행복해지면?
나는 아주 조용히 복수하기로 했다.
“대표님. 이사님.”
내가 말했다.
“회사 잘되면 해결된다고 하셨죠.”
대표는 반색했다.
“그쵸! 제가 늘 말하잖아요.”
“그러면,”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회사가 ‘잘된 상태’로 회의를 해볼게요.”
대표가 잠깐 멈췄다.
“…무슨 뜻이에요?”
나는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슬라이드를 한 장 띄웠다.
[슬라이드 1] 회사가 잘된 상태 시뮬레이션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게 더 웃겼다.
“가정해봅시다.”
“이번 분기 수주가 두 배입니다. 인력도 늘었어요. 예산도 여유 있어요.”
“그러면 오늘 회의에서 달라지는 게 뭐죠?”
대표가 말했다.
“사람이 늘잖아요.”
“좋습니다.”
나는 바로 다음 슬라이드를 넘겼다.
[슬라이드 2] 인력이 늘어도 안 바뀌는 것들
품질 기준 부재
승인 프로세스 부재
책임 범위 불명확
피드백 루프(‘아쉽다’) 반복
문제 발생 시 ‘분위기’로 덮기
이사가 눈썹을 찌푸렸다.
“팀장님 지금 회사 교육하러 오셨어요?”
나는 대답했다.
“아뇨. 회사가 잘되면 해결되는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대표는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갑자기 얇아졌다.
“팀장님… 이런 얘기는 분위기가…”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회사 잘됨의 조건은 매출이 아니었다.
우리 회사에서 회사가 ‘잘된다’는 건—
불편한 이야기가 사라지는 상태였다.
제작팀장이 말했다.
“근데 솔직히, 팀장님이 가이드 좀 덜 빡세게 주면… 저희도 더 창의적으로…”
나는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대신 종이를 한 장 꺼냈다.
그 종이는 어젯밤에 내가 만든 ‘기준’이었다.
“좋아요.”
“그럼 제가 가이드를 덜 빡세게 줄게요.”
대표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쵸! 서로 좀…”
나는 종이를 테이블 가운데에 놓았다.
“대신 이 기준으로 갑시다.”
종이에는 딱 다섯 줄만 있었다.
‘아쉽다’ 금지. 아쉬우면 이유를 적을 것.
카피 임의 수정 금지. 수정 시 이유와 대안을 적을 것.
퀄리티 기준: 레퍼런스 80% 미만이면 재작업.
야근의 정의: ‘남아있음’이 아니라 ‘완료함’.
기획/제작/대표/이사 승인 순서를 문서로 남길 것.
대표가 종이를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팀장님… 너무 딱딱해요.”
이사가 말했다.
“현실적으로 우리 회사가 그런 프로세스를 어떻게…”
제작팀장은 종이를 툭 밀었다.
“그럼 저희는 더 못하죠. 부담돼요.”
그 순간, 나는 정말 웃음이 나왔다.
내가 방금 본 건 의견이 아니었다.
기준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합창이었다.
회의는 결론 없이 끝났다.
결론이 없는 게 결론이었다.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메신저에 알림이 떴다.
대표: 팀장님… 제작팀장 기분 상한 것 같아요. 잘 달래주세요.
이사: 오늘 오후까지 PT 리허설 자료 정리해줘요.
제작팀장: (읽씹)
나는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내 손등을 한 번 쳐다봤다.
언제부터인지 손이 얇아져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구동되는 무엇”이 되어가는 손이었다.
그때, 팀원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그 말이 너무 오랜만이라, 나는 잠깐 멈췄다.
괜찮냐는 질문은 외주가 아니라 사람의 말이니까.
“응.”
나는 대답했다.
“괜찮아. 그냥…”
그냥, 오늘도 회사가 좋아지면 해결될 거라면서
회사 대신 내가 해결되는 날이구나.
오후 5시, PT 리허설.
회의실에는 대표, 이사, 제작팀장이 앉아 있었다.
대표가 말했다.
“자, 오늘은 분위기 좋게 갑시다.”
이사가 말했다.
“시간 없으니까 핵심만.”
제작팀장은 말했다.
“이해가 안 가면 다시 설명해주세요.”
나는 발표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모두가 갑자기 나를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PT에서만,
나는 “성능이 좋아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슬라이드가 넘어갈 때마다
대표의 표정이 좋아졌다.
이사의 표정이 편해졌다.
제작팀장의 표정이… 잠깐 사라졌다.
PT는 내게 유일한 생존 공간이었다.
여기선 내가 말하면 사람들이 조용해지니까.
리허설이 끝나자 대표가 말했다.
“역시 팀장님이야. 잘했어요.”
이사가 덧붙였다.
“이 정도면 되겠네. 내일 클라한테는 이렇게 말하자.”
제작팀장은 핸드폰을 보며 말했다.
“근데 시안은… 아직 좀…”
나는 웃었다.
웃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웃었다.
대표가 나를 보며 말했다.
“팀장님, 회사 잘되면 다 해결될 일이에요.”
그 말이 오늘따라 더 또렷이 들렸다.
나는 그제야 결론을 얻었다.
회사 잘되면 해결되는 건 문제가 아니다.
해결되는 건—
내가 버티는 이유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버스 안에서 메모를 켰다.
그리고 아주 짧은 문장을 적었다.
“회사 잘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내가 멈추면 드러나는 거다.”
그 문장을 적자, 이상하게 숨이 조금 쉬어졌다.
거창한 반격이 아니라,
내가 나를 다시 “사람”으로 돌려놓는 한 줄.
그리고 나는 파일 하나를 만들었다.
퇴사_계획_진짜최종_v1(나만아는).txt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좋아. 이제부터는… 회사가 좋아지길 기다리지 말자.”
버스 창문에 내 얼굴이 비쳤다.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피곤한 얼굴이, 아주 작게 웃고 있었다.
처절해서 웃긴 얼굴.